[신세돈의 역사해석] 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 : #14 북량(E)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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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
(22) 독발이록고 죽음과 동생 독발녹단에게 위임(AD402)
남량의 2대 군주 독발이록고가 병이 들어 자리에 누웠다. 국가의 모든 권세를 동생 독발녹단에게 위임했다. 원래 그들의 아버지 남량의 창업주 독발사복건이 독발녹단을 매우 아껴서 이렇게 말했다.
“ 독발녹단의 식견과 지략은 너희들이 따라갈 바가 아니다.”
이 말을 깊이 새긴 독발이록고의 여러 형제들은 큰 형 독발이록고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도 이미 팔짱만 낀 채 모든 국사를 독발녹단에게 맡겼었다. 이제 독발이록고가 죽자 아무런 이의 없이 독발녹단을 후계자로 옹립하고 남량의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서진이 AD400년 1차로 멸망하고(걸복건귀 아들 걸복치반이 AD409년 다시 서진을 건국했다가 AD431년 그의 아들 걸복모말 때 2차로 멸망함) 서녕에 인질로 와있던 걸복치반이 도망가자 독발녹단은 그의 처자를 모두 돌려보내주었다. 걸복건귀는 돌아온 아들 걸복치반을 후진에게 보냈다. 주군 요흥은 그를 흥진(감숙성 임하현)태수로 삼았다.(AD402) 독발녹단은 끊임없이 여륭의 고장을 공략했지만 떨어뜨리지는 못했다.
(23) 후량 멸망과 북량의 후진 복속(AD403)
다음해 AD403년 남량의 독발녹단과 북량의 주군 저거몽손이 고장의 여륭을 집요하게 공격해 들어왔다. 북량이나 후진이나 남량 모두에게 고장은 전략적 요충지였으므로 먼저 점령하려는 의지가 강했던 곳이다. 여륭은 걱정에 가득찼다. 이런 상황을 잘 알고 있던 후진의 한 지략가가 요흥에게 이렇게 제안했다.
“ 여륭은 조상들의 덕을 입어서 전략적 요충지 고장을 겨우 지키고 있습니다.
곡식이 크게 부족하여 백성들이 거의 굶고 있지만
스스로 지켜내는 것을 보면 앞으로 다시 풍요로워지고 부흥하게 되면
결코 우리 땅이라고 하지 못할 것입니다.
비록 여기서 가는 길이 멀어도
비옥한 양주 땅을 지금 빼앗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요흥이 사신을 보내 여초를 조정에 들어오라고 했다. 여륭은 끝내 강토를 지키지 못할 것으로 판단하고 여초에게 후진조정이 자신을 영접하게 해 줄 것을 부탁하도록 했다. 요흥이 그 제안을 수락했다. 상서좌복야 제난과 진서장군 요힐과 좌현왕 걸복건귀와 진원장군 조요를 보내 보기병 4만 명을 이끌고 하서에서 여륭을 맞이했다. 남량왕 독발녹단은 창송(감숙성 무위시 남쪽)과 위안(감숙성 고랑현 동쪽)에 수비대를 보내 후진의 군대를 경계하도록 했다.
8월 여름 후진의 제난이 고장에 도착하자 여륭은 소거백마(素車白馬)로 길옆에서 이들을 맞이했다. 항복하는 여륭이 강하게 독촉하자 상서좌복야 제난이 고장을 괴롭히던 저거몽손을 공격했다. 저거몽손은 장막해를 보내 후진군을 방어했다. 마침내 북량의 저거몽손과 후진의 제난이 화해맹약을 맺고 저거몽손은 아우 저거나를 후진 조정에 보내 조공을 약속하도록 했다. 제난은 군사 3천명을 사마 왕상에게 배속시켜 고장에 주둔시키고 염송은 창송태수, 곽장은 반화태수로 임명한 다음 여륭의 온가족과 100만 호의 후량 주민을 이끌고 장안으로 들어왔다. 이로써 AD386년 여광에 의해 건국된 후량은 17년 만에 후진에 흡수되면서 완전히 멸망하고 말았다. 요흥은 여륭에게 산기상시, 여초에게 안정태수를 임명하고 여륭의 신하들을 재주에 따라 발탁하여 선임했다. 이제 후진은 동북쪽 탁발규의 북위와 함께 황하이북의 실질적인 패자가 됨 셈이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후진으로 하여금 더 이상 서쪽에 신경을 쓸 수 없는 형편을 만들었고 따라서 하서회랑의 여러 나라들에게 숨을 쉴 수 있는 여유를 제공하기도 했다.
[24] 환현의 동진 황제 독살과 즉위(AD403)
북위 탁발규가 후진의 요흥과 시벽대전(AD402)을 치르느라 정신이 없는 틈을 타 동진을 사실상 장악하고 있던 실세 동진 대장군 환현은 동진 황제 사마덕종을 밀어내고 스스로 황위에 올랐다.(12월 3일) 며칠 뒤 건강으로 들어가 황궁에서 어좌에 앉으려 할 때 의자가 무너져 내리는 일이 벌어졌다. 모든 신하들이 놀라서 어쩔 줄을 몰라 하는 동안 은중문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 성덕이 얼마나 깊고 무거운지
땅 마저도 폐하를 견딜 수가 없었나 봅니다.“
불안해 하던 환현은 은중문의 말에 크게 기뻐하면서 그를 기특하다고 생각했다. 환현은 황제를 구강으로 옮겼으나 수재가 빈번하게 발생하여 많은 사람들이 죽고 또 하늘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으므로 불안한 마음을 가눌 수가 없었다. 환현은 아주 작은 시혜를 베풀기를 좋아하였으며 모든 자잘한 일들을 스스로 꼼꼼히 챙겼기 때문에 일들이 매우 복잡해졌고 또 아랫사람들이 피곤해하고 싫어했다, 당연히 환현을 몰아내려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25] 유유의 반란(AD404)
가장 먼저 환현에게 반기를 든 사람은 익주(지금의 사천성)자사 모거였다. 환현이 환심을 사기 위하여 그에게 산기상시 및 좌장군이라는 직함을 얹어주기 위해 사신을 익주로 보냈다. 모거는 환현의 사신을 가두고 환현의 명령을 노골적으로 거부했다. 모거는 나아가 환현의 죄상을 낱낱이 밝히고 군사를 일으켜 환현의 휘하에 있는 파동, 건평의 태수를 격파했다.
당시 서주와 연주를 장악하고 있던 유유가 환수를 따라 조정에 입조했다. 환현은 유유의 풍채와 지도력에 감탄한 나머지 유유를 크게 환대하고 우대하기를 최측근 왕밀에게 은근히 지시했다. 환현의 부인 황후 유씨는 유유를 이참에 제거하라고 적극 권했지만 환현은 유유에게 중원지역 방어를 의지하려던 참이었으므로 부인의 간청을 들어 줄 수가 없었다. 환현에게 환대를 받고 경구(지금의 진강)로 돌아오던 유유는 측근 하무기와 함께 진 황실을 부흥시키자고 약속했다.
이 때 유유에게 동조하던 세력은 하무기 외에도 유의, 왕중덕과 왕맹덕 형제, 맹창, 위영지, 단빙지 제갈장민 신호흥 및 동후지 등이 곳곳에서 환현에게 대적하고 있었다. 유유의 여러 연합군의 공격을 받자 환현은 싸워보지도 않고 남쪽으로 도망쳤다. 유유는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서 유유히 건강으로 입경했다. 환현 밑에서 사도직을 맡았던 왕밀이 유유에게 양주자사를 내리자 유유는 사양했다. 다시 왕밀은 도독양서연예청기유병팔주제군사라는 직책으로 내리자 유유가 이를 받았다.
원래 유유는 한미한 집안 출신이었다. 지위도 낮았고 품행이 가볍고 경망하여 세상이 유유의 장래성을 미쳐 알아채지 못했다. 그러나 왕밀은 달랐다. 유유를 당대의 영웅으로 파악하고 오래 전부터 그를 옹호하며 지지해 줬다. 유유가 조규라는 사람과 도박을 하다가 빚을 못 갚게 되었을 때 조규는 유유를 말뚝에 묶어버렸다. 이 소식을 들은 왕밀이 급히 달려가 조규를 꾸짖고는 대신 빚을 갚아서 유유를 풀어주었다. 유유는 이 일로 왕밀에게 큰 고마움을 느끼게 되었는데 이런 연유 때문에 유유가 건강에 입성 했을때 환현의 사도였던 왕밀을 죽이기는커녕 그에게 조정의 중책을 떠맡기 것이다.
[26] 환현 참수(AD404)
환현은 구강에 유폐되었던 황제 사마덕종을 데리고 자신의 원래 근거지였던 강릉으로 돌아간 다음 엄격한 정치를 통해 국가기장을 다시 세우려고 획책했다. 은중문이 보다 너그러운 정치를 할 것을 간언했으나 환현은 그럴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유유의 군대가 장강을 거슬러 구강까지 올라오자 환현은 형주지역의 군사 2만 명을 징발했다. 유유의 선봉장 유의가 이끄는 1만 명의 군사와 환현의 2만 군사가 쟁영주(지금의 악주부근)에서 마주쳤다. 유의는 환현의 군사가 너무 많아서 되돌리려고 했는데 부장 유도규가 이렇게 외쳤다.
“ 승리는 용감한 병사를 거느린 자들에게 있지
숫자에 있지 않습니다.“
유도규의 외침에 힘을 얻은 유의는 강력하게 환현의 군사에게 들이닥쳤다. 환현은 제대로 싸울 생각도 없이 한중으로 도망갈 궁리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모수지라는 자가 한중보다는 익주가 더 나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환현은 촉으로 도주방향을 바꾸었다.
익주자사 모거의 아우가 죽어 그 영구를 고향 강릉으로 이송하던 중 호송책임자 익주독호 풍천이 도망오던 환현의 무리를 만나게 되었다. 풍천이 칼을 들어서 환현을 베려고 하자 환현이 이렇게 외쳤다.
“너는 도대체 어떤 놈이기에 천자인 나를 베려고 하느냐?”
풍천이 이렇게 대꾸했다.
“ 천자를 단 칼에 베는 도적놈일 뿐이다.”
이렇게 환현의 목은 날아갔고 건강의 저자거리에 내 걸렸다. 36세 였다.
[27] 이고의 천도(AD405)와 아들에게 내린 일곱 가지 훈계
무력한 황제를 갈아치우고 국정을 농단하던 환현의 무리가 유유 세력에 의해 제거되면서 형주 지역이 동진의 세력권으로 다시 안정되자 남량의 주군 독발녹단은 동진을 두려워 연호를 버리고 복속의 뜻을 내비쳤다.(AD404) 서량의 이고 또한 사신을 동진으로 보내 경의의 뜻을 표시했다.(AD405) 그러나 익주에서는 초홍이라는 자가 모거에게 반기를 들고 반란을 일으켜 모거를 죽이고 서촉이라는 나라를 세웠다.(AD405)
동진에게 충성을 표시한 이고는 북량의 저거몽손을 압박하기 위해 수도를 돈황에서 주천으로 옮긴 다음 아들에게 일곱 가지 훈계를 손수 내렸다.
“ 첫째로, 정치에 종사하는 사람은 마땅히 상벌을 신중하고 조심하여 내려야 한다.
둘째로, 사물을 처리할 때 좋아하거나 미워함으로 처리하면 안 된다.
셋째로, 충성스럽고 올바른 사람을 항상 가까이하고 아첨하는 사람을 멀리해야 한다.
넷째로, 주변 사람들이 권한을 남용하여 상벌을 오남용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다섯째로, 비방이나 칭찬이 올라오더라도 마땅히 진실인지 아닌지 깊이
밝혀 들어야 한다.
여섯째로, 송사나 옥사를 처리할 때에는 반드시 온화한 얼굴로 이치에 따라
처결해야 한다.
일곱째로, 힘써서 자문하고 묻되 절대로 혼자서 오로지 결정하지 마라.
내가 통치한 지 5년이 되어 비록 백성을 편안하게 하지는 못 하였으나 허물있어 숨어 사는 사람들을 포용하여 아침에는 원수도둑이었으나 저녁에는 가장 신임하는 신하가 되 어 일을 맡겼고 누구에게든 빚을지는 일이 없었으며 항상 공평하게 일을 처리하니 흠이 없었지만 처음에는 거부반발도 있었고 불평도 없지않았다. 가까이보면 부족하고 손해인 것 같으나 멀리 보면 마침내 여유가 있게 되었으니 역시 선조들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 음을 알겠다. “
[28] 독발녹단의 수도 고장 이전과 서진 걸복건귀의 장안 입조(AD406)
남량의 독발녹단은 수도를 청해성 낙도에서 북쪽 고장(감숙성 무위)로 옮겼다. 후량이 후진에게 AD403년 멸망한 다음 고장(무위)지역에 대한 후진의 장악력이 크게 떨어진 때문으로 생각된다. 서진의 걸복건귀는 후량대신 남량 독발오고의 압력을 받게 되었으므로 더욱 더 후진 조정에 의존하게 되었다. 걸복건귀는 그 해 겨울 장안으로 직접 들어가서 충성을 표시하였다. 후진 요흥은 언제 배반할지 모르는 걸복건귀를 장안에 억류하고 그의 세자 걸복치반을 행서이교위로 삼아서 아버지 대신 부족민들을 통치하게 하였다.
[29] 하 유발발의 후진 공격(AD407)
통만에서 대하를 건국한 유발발은 근방의 선비족 설천 등 3개 부락 함락하여 포로 약 만 여명을 흡수한 뒤 곧바로 후진의 북쪽 북경인 삼성을 침범해 들어갔다. 그 전투에서 후진 장군 양비와 요석생을 사로잡고 참수했다. 유발발의 여러 장수들이 말했다.
“ 폐하께서 관중을 장악하시려면 의당 먼저 근본을 단단하게 한 다음
사람들의 신임을 얻으셔야 합니다.
고평(영하성 고원)은 땅이 넓고 산천이 함하며 견고하고 또 비옥하므로
도읍으로 정할 만합니다. “
유발발이 말했다.
“ 경등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고 있소.
나의 대업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어서 병사가 많지 않고
또 요흥이 한 시대 영웅으로 굳게 버티고 있으니
아직은 관중을 예기할 때가 아니오.
내가 지금 한 성만을 지킨다면
그는 반드시 대군을 몰아서 공략해 올 것인데
그것은 수적으로 불리한 우리가 앉아서 멸망하는 길일뿐이요.
용맹스런 기병을 날려서 그들이 예기치 않은 곳으로 나아가서
앞으로 오면 뒤를 공격하고
뒤로 오면 앞을 공격하여
그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한다면
적이 몇 백만 대군이라도 감당할 수가 있소.
10년이 되지 않아 영북(섬서성 예천 이북)과 하동(산서성 서남부)은
모두 우리 소유가 될 것이요.
요흥이 죽기를 기다리면
못 난 그 아들(요홍)은 어리석고 나약하니
장안은 힘들이지 않고 내가 차지할 수가 있는 것이요.“
유발발은 영북지역을 지속적으로 공략했다. 요흥이 탄식하며 말했다.
“ 내가 황아(요옹)의 말을 듣지 않다가 이 지경이 되었구나!”
유발발은 남량의 독발녹단에게 혼인을 요청했다. 독발녹단이 거절하자 유발발은 기병 2만 군사를 이끌고 지양(감숙성 난주시 북서쪽 영등)을 공격하여 1만여 명을 사상하고 3만여 가축을 약탈하고 돌아왔다. 독발녹단은 유발발을 반격할 계획을 세웠다. 부하 장수 초랑이 반대하고 나섰다.
“ 유발발의 군대가 엄격하고 정돈이 잘 되어 있읍니다.
결코 아직 가볍게 볼 수 없습니다.“
다른 장수 하련이 반발했다.
“ 유발발 잔당은 유위진 패잔병의 무리일 뿐입니다.
어찌 그들을 피하여 약함을 드러냅니까?“
독발녹단은 하련의 말을 좇아 공격에 나섰다. 유발발은 독발녹단 군사의 움직을 정확하게 예측하고 있었다. 양무(감숙성 정원현) 골짜기에 병사 매복시켜 놓고 얼음 깨고 수레를 묻어 독발녹단 군사의 길을 막았다. 추격해 오는 독발녹단의 군사가 막힌 강 앞에서 허둥대는 틈을 타고 습격하여 크게 대패시켰다. 독발녹단의 장수 10 중 6-7명이 전사했고 독발녹단 홀로 도주했을 뿐 근위병은 거의 모두 체포되거나 잡혀 죽었다. 유발발은 죽은 시체를 쌓아 올려 촉루대라고 이름 붙였다. 유발발은 또 독발녹단을 지원해 온 후진 장군 장불생도 격파하고 군사 5천을 참수해버렸다. 독발녹단은 남은 주민을 몰아서 고장(감숙성 무위)으로 도망가 버렸다.(AD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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