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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돈의 역사해석] 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 #14 : 고비의 흉노 바람, 북량(A)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9년02월28일 17시00분
  • 최종수정 2019년02월27일 19시26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15

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1) 저거몽손(沮渠蒙遜, AD368–AD433)의 반란 

 

저거(沮渠)라는 성은 원래 몽고 흉노족 부족장의 성으로써 당시 저거라구라는 사람이 대대로 장액(감숙성 장액시)을 장악하고 있었다. 후량의 여광이 저거라구를 상서로 등용하자 저거라구는 여광을 도와 걸복씨의 서진을 정벌하는데 앞장서기도 했다. 후량과 서진의 전쟁 와중 여광의 동생 여연이 걸복건귀에게 패사하자 동생 저거국죽이 형 저거라구에게 말했다.

 

 “ 주상(여광)께서 어둡고 늙어서 참소를 쉽게 믿으시니

   군사들은 패하고 장수도 죽어 모두들 우리를 헐뜯고 시기하는 분위기입니다. 

   차라리 군사를 이끌고 서평(청해성 서녕시)로 가서

   세력을 과시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저거라구가 말했다.

 

  “ 진실로 네 말이 맞다.

    그러나 지금 우리 가문은 대대로 충성과 효도로 

    서역에서 이름을 높여 왔는데

    다른 사람이 반란을 일으키는 것은 몰라도 

    내가 스스로 이름을 더럽힐 수는 없다.“ 

 

그러나 여광은 주변에서 참소하는 말을 듣고 충성스런 저거라구 형제를 죽였다. 저거라구의 조카 저거몽손은 삼촌의 장례를 후히 치렀다. 저거몽손은 책략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많은 역사책을 읽어 통달한 사람이었다. 장례에 모인 친척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 여왕은 어둡고 거칠며 법도가 없어 

    허물없는 많은 사람을 죽였습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호랑이 같은 눈빛으로 하서지역을 돌보아 왔는데

    지금 두 분의 아버지의 치욕을 씻고 

    선조들의 위업을 다시 찾아야 하겠는데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무리들은 저거몽손에게 만세를 불러 화답했다. 맹약을 맺은 뒤 바로 군사를 일으켜 후량의 임송군(감숙성 장액)을 장악하고 점령했다. 후량의 장수였던 저거몽손의 사촌 형 저거남성도 저거몽손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고 주천에서 군사를 모아 일어났다. 그리고 건강(감숙성 주천 부근)태수 단업에게 동참을 요청했다. 처음에는 단업이 거부했으나 부하 장수들이 권고하는 바람에 망설이던 단업은 동참하기로 결정했다. 저거남성은 단업을 대도독, 양주목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보국장군이 되었다. 저거몽손이 군사를 이끌고 단업에게 귀속하자 단업은 저거몽손을 진서장군으로 임명하고 연호를 신새(神璽)로 정했는데 사실상 북량이라는 새 나라를 세운 셈이다. 여광이 아들 여찬에게 군대를 보내 단업을 토벌하게 했으나 이기지 못했다.(AD397) 

 

독발오고 또한 스스로 대도독, 대선우, 서평왕이라고 일컬으며 대사면을 내리고 연호를 태초라고 불렀다. 군사들을 일으켜 후량의 금성(감수성 난주)를 공략하고 여광이 보낸 지원군 두구를 가정(감숙성 장가천현)에서 물리쳤다. 독발오고는 결국 저거몽손이 북량을 세운 같은 해에 남량이라는 나라를 세우게 되는 셈이다. 

 

 (2) 곽논과 왕상의 반란(AD397)

 

후량 산기상시인 곽논은 서평(청해성 서녕)사람이었는데 천문지식이 매우 뛰어나 많은 사람들이 존경하고 따랐다. 그 때 곽논이 이상한 별자리 움직임을 보게 되자 복야 왕상을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 나라 안에 장차 큰 전쟁이 일어날 것 같습니다.

   주군(여광)께서 연로(당시 60세)하시고 또 병까지 들어계시고

   태자(여소)는 어리석고 나약하며   

   태원공 여찬(여광의 장자)은 흉악하고 사나우니

   어느 날(주상이 죽는 날을 의미) 꺼리는 일이 없게 되면

   재앙과 난리가 반드시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 두 사람은 오랫동안 요직에 있었으니

   태상이 반드시 우리를 죽이려 할 것입니다.   

   왕걸기라는 사람이 강한 군대를 가지고 있으니

   거사를 일으켜 그를 추대하여 주군으로 삼은 뒤

   정권을 장악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왕상도 그러자고 동의했다. 곽논이 수하 무리를 데리고 먼저 궁궐 문을 불사르고 들어가면 안에서 왕상이 호응하여 여광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웠는데 들키는 바람에 왕상이 먼저 죽었다. 왕궁을 장악하려는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지만 곽논은 거사계획을 돌이킬 수 없었다. 고장의 동원성(東苑城)을 장악 했는데 성 안에서는 이런 소문이 크게 퍼졌다.

 

 “ 성인이 군사를 일으켰으므로 실패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곽논을 따르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으므로 병상에 있던 여광은 급히 아들 여찬을 불러 곽논을 진압하도록 명령했다. 단업의 반란군을 진압하느라 바깥에 나가있던 여찬이 즉시 장액에서 수도 고장으로 돌아가려고 하자 수하 장수들이 붙잡고 말렸다.

 

 “ 장군께서 고장으로 군사를 돌리시면 

   반드시 단업이 후미를 공격하지 않겠습니까?

   의당 몸을 숨기셨다가 야밤에 움직이는 것이 좋습니다.“

 

여찬이 말했다.

 

 “ 단업은 영웅재질이 없는 하찮은 졸장부에 불과하오.

   내가 겁을 먹고 군사를 숨겨두고 야밤을 탄다고 하면

   그의 기세만 높여 줄 뿐이요.“

 

그리고는 즉시 사람을 단업에게 보내 이렇게 제안했다. 

 

 “ 곽논이 반란을 일으켜 내가 지금 도읍으로 돌아가야 하오.

   경이 결정해 줘야 할 것은 

   즉시 나와서 나와 전투를 하는 것이요.“

 

 (3) 양통의 반란과 양궤의 반란(AD397)

 

여찬이 전쟁을 서두르자고 모르자 북량의 단업은 겁에 질려 더욱 성문을 닫고 움직이지 않았다. 여찬의 사마 양통은 그의 사촌형 양환에게 이렇게 말했다.

 

 “ 곽논이 군사를 일으킨 것은 절대로 무모한 것이 아닙니다.

   이 참에 제가 여찬을 죽일 테니 형님께서 주군이 되셔서

   서쪽으로 같이 가서 여홍(여찬의 동생)을 습격한 뒤 장액을 점령하면 

   여러 지역을 한꺼번에 차지하는 일로써

   천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기회입니다.“ 

 

양환이 버럭 화를 내며 꾸짖었다.

 

 “ 나는 여씨의 신하가 되어서 

   여태껏 그가 준 녹봉으로 온 가족이 편안함을 누리며 살면서 

 

[그림] AD398년경의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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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 번 그에게 위기가 닥쳐와도 구원하지 못했는데    

   어찌 그에게 어려움을 끼칠 수가 있겠느냐?

   만약 그가 죽는 다면 나는 차라리 홍연이 되고 말겠다.“

 

홍연은 춘추시대 위(衛)나라 대부였다. BC660년 북적이 위국 주군 의공을 살해하였는데 주군의 시체는 사지가 다 없어지고 단지 간장만 남아 있었다. 홍연은 자신의 신체에서 배를 갈라내고 주군 의공의 남은 간장을 집어넣고 순국한 사람이다. 양환이 동조하지 않자 양통은 혼자 반란을 일으킨 뒤 곽논에게로 갔다. 여찬은 서쪽에서 돌아와 석원량과 함께 곽논의 반란군을 격파했다. 

 

후량에게 복속했던 융족과 하족 무리 3천명도 장첩과 송생의 주도 아래 휴도성(감숙성 무위시)에서 후량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저족 출신 후량 장수 양궤를 맹주로 삼고서 곽곤과 연대하였다. 양궤의 참모 정조가 이렇게 간하였다.

 

 “ 경은 용의 머리를 버리고 

   뱀의 꼬리를 따라가고 있으니 참으로 잘못된 선택입니다.“

 

양궤는 정조의 말을 듣지 않고 반란에 합류했다. 여찬의 군대가 곽곤의 잔당 왕비를 깨뜨리면서 쫓아오자 다급한 곽곤은 급히 사람을 남쪽의 남량으로 보내 독발오고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독발오고는 동생 독발이록고와 기병 5천을 고장(무위)지역으로 파송했다.   

 

(4) 여광의 반란 수습 실패와 북량의 세력 확장(AD398)

 

태원공 여찬이 직접 양궤를 공격했으나 주변에서 지원하는 군대들이 몰려와 여찬이 크게 실패했다. 여찬은 도읍(무위)로 돌아왔다. 장액에 있던 북량 주군 단업은 저거몽손에게 권하여 서군(감숙성 영창형)을 공격하도록 지시했다. 저거몽손은 서군을 지키던 태수 여순(여광 동생의 아들)을 포획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진창(감숙성 안서현)태수 왕덕과 돈황(감숙성 돈황)태수 맹민이 모두 북량의 주군 단업에게 항복해 들어왔다. 

 

여찬의 공격을 방어하는 데 성공한 양궤는 이참에 무위로 쳐들어가 여광을 뿌리 뽑으려 들었다. 그러나 참모 곽논이 아직 때가 이를 뿐더러 후량의 세력이 만만치 않음을 들어서 말렸다. 후량의 장수 여홍은 장액 부근에서 지키고 있었는데 북량의 단업이 저거남성과 왕덕을 시켜서 여홍을 공격하도록 했다. 여홍이 갑자기 북량의 공격을 받게 되자 후량 주군 여광은 동생 여찬을 급파하여 돕도록 했다. 양궤가 걱정하며 말했다.

 

 “ 여홍의 군대와 여찬의 구원군이 합쳐지면 

   후량의 군사력은 너무 강해져서 뺏을 수가 없게 된다.

   서둘러 여홍-여찬의 세력을 깨뜨려야 한다.“

 

양궤가 남량의 독발이록고와 연대하여 지원 오는 여찬군을 도중에서 맞서 싸웠으나 양궤가 크게 패하자 양궤는 왕걸기에게 도망갔다. 양궤가 홀로 왕걸기에게로 도망가자 그의 참모 곽논은 무리를 이끌고 걸복건귀의 서진에 항복했다. 지원오던 여찬의 군대가 도중에 양궤-독발이록고에게 공격을 당하여 못 오게 되자 여홍은 지키던 장액성을 버리고 급히 동쪽으로 도망갔다. 단업이 여홍을 쫒아가려 했으나 저거몽손이 말렸다.

 

 “ 돌아가는 군대는 막는 것이 아니며,    

   궁지에 몰린 도적은 뒤 쫒지 않는 것이 

   병가의 경계하는 바입니다.“

 

단업은 듣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쫓아갔다가 대패했는데 저거몽손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건졌다. 단업은 돌아와 서안(감숙성 산단현)에 큰 성을 쌓고 장막해를 태수로 삼아 지키게 했다. 저거몽손은 장막해의 인물됨이 모자람을 들어서 태수로 자격이 없음을 지적했지만 듣지 않았다. 서안성은 얼마 있지 않아서 후량 여찬에게 처참하게 유린되고 말았다.(AD398)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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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9년02월28일 17시00분
  • 최종수정 2019년02월27일 19시2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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