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돈의 역사해석] 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 #13 : 여광 일인국가 후량(E)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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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
(20) 여광의 왕위 등극(AD389년 2월)
여광이 스스로를 삼하왕이라고 일컬으며 왕위에 오름과 동시에 대사면령을 내렸고 조정에 백관을 두었다. 아내 석씨와 아들 여소, 동생 여덕세를 구지(감숙성 서화현)로부터 고장(감숙성 무위)으로 불러들여 왕비와 세자로 세웠다.
삼하왕 여광은 동생 우장군 여보를 보내 금성(난주)왕 걸복건귀를 공격했다(AD392). AD385년 난주(감숙성 난주)에서 서진을 세운 선비족인 걸복국인을 부등은 금성왕으로 책봉하여 번국으로 삼았는데 전진에게 배반한 여광에게는 부등이나 걸복국인 모두 적인 셈이었다. 그러나 여보의 군사는 걸복건귀에게 대패하여 죽은 군사만 1만여 명이었다. 여광의 아들 여찬을 보내 강족 팽해념을 공격했지만 그 또한 패하였다. 여광이 직접 대군을 이끌고 반격에 나서 부한(감숙성 임하)을 공격하여 이기자 팽해념은 감송(감숙성 질부)으로 도망갔다.
(21) 현명한 독발오고(AD394)
독발사복건이 죽고 큰 아들 독발오고가 자리를 이어받았다. 독발오고는 인물이 웅대한 꿈을 지녔고 총명했으며 영웅적인 기질이 많았다고 기록된 인물이다. 그는 이리저리 어수선한 후량의 양주(감숙성 무위)를 뺏을 생각을 했다. 분타가 이렇게 충고했다.
“ 의당 먼저 농업을 일으키고 군사를 훈련시킨 다음
현명한 인재를 예의로 등용하고
정치와 형벌을 똑바로 갖춘 다음에야 가능한 일입니다.“
독발오고가 분타의 충언을 마음 깊이 새겼다. 3년 뒤인 AD397 불의의 취중 낙마사고로 사망하게되자 나이가 든 사람에게 자리를 잇게 하라는 유명을 내리고 죽었는데 그 자리를 이어받은 동생 독발녹단이 남량을 건국하게 된다.
삼하왕 여광은 사신을 독발오고에게 보내 관군대장군 하서선비대도통이라는 벼슬을 수여했다. 독발오고는 신하들과 그 문제를 상의하며 물었다.
“ 받아도 되겠는가? ”
모두들 이렇게 말했다.
“ 우리는 병사와 말이 많은데
어찌 남의 밑에 소속되겠습니까?”
석진약류라는 사람만은 대답이 없었다. 독발오고가 물었다.
“ 경은 여광이 두려운가?”
석진약류가 이렇게 답했다.
“ 우리의 근본은 아직 단단치 않습니다.
작고 크기로 보아 적수가 되지 못합니다.
만약 여광이 우리에게 죽음을 내리려고 한다면
우리가 무엇으로 막을 수 있을 것입니까?
일단 제안을 받아들이고서 그들이 교만하여 틈이 생길 때까지
때를 기다림만 못할 것입니다.“
독발오고가 그의 말에 감명을 받고 여광이 내린 직책을 받았다.
(22) 여광의 걸복건귀 공격과 어설픈 항복(AD395년)
여광은 가장 어린 아들 여복에게 도독옥문이서제군사 및 서역대도호라는 직책을 주어 고창(투르판 동쪽)에 진수시켰다.(AD394) 그리고 대신들의 자제에게 동행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다음해인 AD395년 7월 삼하왕 여광은 10만 대군으로 난주를 거점으로 하는 서진의 걸복건귀를 공격했다. 당시 서진은 수도를 감숙성 난주에서 동북쪽으로 약 100KM 떨어진 서성(감숙성 정원)으로 옮긴 직후였다. 후량의 바로 서쪽에 독발오고의 남량이 있었지만 자신이 내린 직책을 흔쾌히 받았으므로 후미를 습격할 적국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후량에게 가장 가까운 적은 이제 걸복건귀의 서진이었다. 서진 조정의 좌보 밀귀주와 막자고저가 주상 걸복건귀에게 속히 항복하고 칭번하기를 간청했다. 여광의 군사가 매우 강하고 버티기 힘들므로 서둘러 항복하는 게 나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걸복건귀도 그 말을 듣고 아들 걸복치반을 인질로 보내 화의를 요청했다. 여광은 즉시 군사를 물리고 걸복건귀의 항복을 받아들였다. 걸복건귀는 속았다고 후회했다. 뺏기지 않았을 아들만 뺏겼을 뿐이라고 생각한 걸복건귀는 밀귀주와 막자고저를 죽여버렸다.
(23) 남량의 독발오고를 포섭하려는 여광(AD395-396)
서녕에 본거지를 둔 독발오고는 을불과 절굴 등 여러 부를 차례로 공격하여 복속시켰다. 그리고는 도읍지를 염천보(청해성 민화현)롤 옮겼다. 그곳에 살던 광무사람 조진이 뛰어난 재주와 기발한 계략 지녔는데 독발오고가 오자 가족을 버리고 그를 따랐다. 독발오고도 그를 얻고서 기쁜 나머지 다음과같이 말했다.
“ 내가 조생을 얻었으니 큰일은 저절로 해결될 것이다.”
지난해에 관군대장군과 하서선비대도통이라는 직책을 주었던 삼하왕 여광은 독발오고에게 광무군공에 올려 책봉했다. 여광은 AD396년 천왕에 즉위하고 국호를 대량이라고 불렀으며 백관을 설치하고 여소를 세자로 책봉하면서 여러 아들과 아우 20여명에게 공후작에 책봉하였다. 왕서를 상서좌복야, 단업 등 5명에게 상서직을 내렸다. 그리고 사자를 보내 독발오고에게는 정남대장군, 익주목 및 좌현왕으로 한 계단 올려 책봉했다. 독발오고가 여광의 사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 여왕의 여러 아들들이 탐욕스럽고 음란하며
세 명의 조카들은 먼 곳과 가까운 곳에서 근심하고 원망하는데
어찌 백성의 뜻을 거스르면서까지 의롭지 않은 관작을 받겠는가?
나는 마땅히 제왕의 바른 길을 갈 것이다.“
그냥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사신을 돌려보냈다. 사실상 독발오고의 여광과의 이별이고 독립을 선언한 셈이다.
(24) 여광의 서진 걸복건귀 토벌(AD397)
여광은 자주 배반하고 반란을 일으킨 남쪽 난주를 근거지로 하는 서진의 걸복건귀를 토벌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여광이 장최(감숙성 영등현 부근)에 진을 친 뒤 후량의 장수 여연은 서진 영토인 임조(감숙성 민현), 무시(감숙성 임조현) 및 하관(감숙성 적석산)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여찬은 마침내 난주도 함락시켰다. 쫓기던 걸복건귀는 사람을 여연에게 보내 거짓으로 말하게 했다.
“ 걸복건귀는 이미 궤멸되어 성기(감숙성 진안현) 쪽으로 도망갔습니다.”
여연이 무리를 이끌고 그를 추격하려하자 측근 사마 경치가 간하였다.
“ 걸복건귀는 용맹과 지략이 보통 뛰어난 게 아닙니다.
어찌 하찮은 사람의 보고만 믿고 경망히 군사를 움직이려 드십니까?
전에도 걸복건귀는 여러 번 유혹전술을 쓴 적이 있습니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
여연은 듣지 않고 서둘러 진군하다가 매복한 걸복건귀에게 죽임을 당했다. 비록 걸복건귀를 잡지는 못했지만 후량이 서진의 대부분 영토를 확실하게 장악한 것은 사실이다.
(25) 저거몽손과 단업의 북량 건국과 독발오고의 남량 건국 (AD397)
저거라구는 흉노 저거왕의 후손으로 대대로 장액(감숙성 장액시)을 장악했던 부족장이었다. 여광이 저거라구를 상서로 등용하자 그를 도와 걸복씨의 서진을 정벌하는데 앞장서기도 했다. 여연이 걸복건귀에게 패사하자 동생 저거국죽이 형 저거라구에게 말했다.
“ 주상(여광)께서 어둡고 늙어서 참소를 쉽게 믿으시니
군사들은 패하고 장수도 죽어 모두들 우리를 헐뜯고 시기하는 분위기입니다.
차라리 군사를 이끌고 서평(청해성 서녕시)로 가서
세력을 과시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저거라구가 말했다.
“ 진실로 네 말이 맞다.
그러나 지금 우리 가문은 대대로 충성과 효도로
서역에서 이름을 높여 왔는데
다른 사람이 반란을 일으키는 것은 몰라도
내가 스스로 이름을 더럽힐 수는 없다.“
여광은 주변에서 참소하는 말을 듣고 저거라구 형제를 죽였다. 저거라구의 조카 저거몽손은 삼촌의 장례를 후히 치렀다. 저거몽손은 책략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많은 역사책을 읽어 통달한 사람이었다. 장례에 모인 친척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 여왕은 어둡고 거칠며 법도가 없어
허물없는 많은 사람을 죽였습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호랑이 같은 눈빛으로 하서지역을 돌보아 왔는데
지금 두 분의 아버지의 치욕을 씻고
선조들의 위업을 다시 찾아야 하겠는데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무리들은 저거몽손에게 만세를 불러 화답했다. 맹약을 맺은 뒤 바로 군사를 일으켜 후량의 임송군(감숙성 장액)을 장악하고 점령했다. 후량의 장수였던 저거몽손의 사촌 형 저거남성도 저거몽손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고 주천에서 군사를 모아 일어났다. 그리고 건강(감숙성 주천 부근)태수 단업에게 동참을 요청했다. 처음에는 거부했으나 부하 장수들이 권고하는 바람에 망설이던 단업은 동참하기로 결정했다. 저거남성은 단업을 대도독, 양주목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보국장군이 되었다. 저거몽손이 군사를 이끌고 단업에게 귀속하자 단업은 저거몽손을 진서장군으로 임명하고 연호를 신새(神璽)로 정했는데 사실상 북량이라는 새 나라를 세운 셈이다. 여광이 여찬에게 군대를 보내 단업을 토벌하게 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독발오고는 스스로 대도독, 대선우, 서평왕이라고 일컬으며 대사면을 내리고 연호를 태초라고 불렀다. 군사들을 일으켜 후량의 금성(감수성 난주)를 공략하고 여광이 보낸 지원군 두구를 가정(감숙성 장가천현)에서 물리쳤다.
[그림] 후량(AD386-AD403) 왕조 계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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