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돈의 역사해석] 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 #13 : 여광 일인국가 후량(A)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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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
(1) 후량(後涼, AD386-AD403)과 여파루(呂婆樓)의 왕맹 추천(AD357)
후량은 저족(氐族) 지도자 여광(AD338-AD400)이 세운 5호 16국의 하나이다. 저족은 티베트와 투르쿠 피가 섞인 혼혈민족으로써 오래 전부터 사천성, 청해성, 신강성 및 섬서성 등 중국의 서쪽과 서남쪽 변경에 웅거하던 민족이다. 저족이 세운 5호16국가로는 후량 이전에 이웅의 성한(본 시리즈 #6)과 부견의 전진(본 시리즈 #9)이 있다.
후량을 세운 여광은 아버지 여파루가 전진 부견의 할아버지 포(부)홍의 측근 부장일 때인 AD337년 태어났다. AD351년 포(부)홍의 아들 부건이 전진을 세웠을 때 열 네 살 여광은 산기상시가 되었는데 원래 약양(감숙성 천수부근)의 저족 두목이라고 기록되어있다. 부건의 동생 부홍이 죽고(AD354) 그 아들 부견이 아버지 부홍의 동해왕 자리를 계승했는데 이 때 여파루는 동해왕 부견의 측근으로 있었다. 부건이 다음 해 AD355년 죽고 포악한 그 아들 부생이 대통을 이어받았는데 부생은 난폭하고 잔인하여 아버지 부건 당시의 고명대신과 중신을 거의 다 처단하였으므로 민심이 매우 흉흉하였다.
어느 날 부생은 큰 물고기가 창포 풀을 뜯는 꿈을 꾸었다. 원래 부씨는 창포 포씨였으므로 ‘큰 물고기가 창포를 뜯는 꿈’은 길조라고 볼 수 없었다. 항간에는 이상한 요언마저 돌았다.
“ 동해 큰 물고기가 용이 되었는데
남자는 왕(王)이 되고
여자는 공(公)이 되었다.“
부생은 이 꿈과 요언은 분명히 어(魚)씨 성을 가진 사람과 연관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부생은 태사이자 녹상서사이며 고명대신인 어준과 일곱 아들 및 열 명의 그 손자들을 몰살시켰다.(AD357) 이로써 고명대신 8인은 모두 제거되었다. 부생은 술을 마시면 밤낮이 없었고 한 달 내내 나오지를 않기도 했다. 국정을 외면하기를 밥 먹듯 했고 그 사이 간신들이 상벌을 농단했다. 부생 자신이 애꾸눈이었으므로 다음과 같은 암시적인 단어를 쓰다가 죽은 사람이 수를 셀 수 없었다.
“残(나머지)、缺(모자람)、偏(삐뚬)、只(한짝)、少(적음)、无(없슴)、不具(갖추지 못함)”
부생은 동물을 잔인하게 죽이는 것을 즐겼고 칭찬하면 아부한다고 신하를 죽였으며 정치가 혼란스럽다고 비판하면 비방한다고 사람을 죽였다. 부왕 때 공훈을 세운 공신들의 가족은 거의 몰살되었고 살아남은 사람들도 하루를 보내기를 마치 십년 보내는 것과 같이 어렵고 힘들었다고 했다. 그런 암울한 분위기에서 항간에 떠도는 요언에 나오는 동해 큰 물고기는 동해왕 부견을 암시하는 말이었다. 당시 세상 사람들에게 칭찬을 한 몸으로 받았던 부견에게는 설찬과 권익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과거 후진 요양의 참모였던 사람이었다. 설찬과 권익은 비밀리에 부견에게 유세하였다.
“ 지금 주상께서는 포학하시기가 유례가 없을 정도입니다.
사직이 위태로우니 전하가 아니시면
누가 전진의 제사를 주관하겠습니까?
서둘러 계책을 세우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성을 가진 사람이 나라를 찬탈할 것입니다.“
부견이 측근인 상서 여파루와 그 문제를 의논했다. 여파루는 이렇게 말했다.
“ 나는 그저 칼자루 고리(刀環)에 불과합니다.
큰일을 감당할 그릇이 아닙니다.
저의 마을에 왕맹(王猛)이란 자가 있는데
꾀와 전략을 세우는 것에서는 세상에 겨룰 자가 없을 것입니다.
당연히 몸소 부르셔서 자문을 구하십시오.“
여파루의 말을 듣고 부견은 왕맹(AD325-AD375)을 불렀다. 왕맹을 한 번 보는 순간 마치 옛 친구를 보는 듯 친숙했다. 의견을 나누는 동안 부견은 유비가 제갈량을 만난 것과 같았다고 했다. 이 왕맹은 3년 전 동진 정서대장군 환온에게 갔던 그 사람이다. 그러나 환온이 북벌에 실패하고 돌아가면서 왕맹은 환온을 따라가지 않고 고향 산동성 창락현에 남아있었던 것 같다. 5호16국을 통틀어 가장 훌륭한 지략가 경세가로 알려진 왕맹을 부견이 얻은 것은 이미 천하의 반을 얻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AD357년5월)
(2) 부법-부견의 쿠테타와 부견의 왕위 등극(AD357)
천문담당 태사령 강권이 부생에게 불길한 말을 했다.
“ 어제 밤 세 개의 달(아마도 달과 화성과 목성이었을 것)이 함께 나타났으며
패성이 태미 자리에 들어가 동정에 이르렀고
음침한 비구름에도 비는 오지 않았습니다.
장차 시역의 징조가 보입니다.“
부생은 별 움직임 나부랭이와 허무맹랑하고 듣기 싫은 소리를 가장 증오했다. 그 자리에서 태사령 강권을 박살했다. 소문은 즉시 밖으로 퍼져 나갔다. 이렇게 계속되다가는 살아남는 자가 없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영어사중승 양평로 및 몇 몇 무리들이 급히 부견을 찾아가 부생을 제거해 줄 것을 재촉했다. 부견도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은 했지만 부생은 힘도 세고 또 혈기가 왕성한 자라 감히 움직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부생 또한 사촌 형제지간인 부법과 부견의 총명함을 질시하였으므로 내심 경계하고 있었다. 늦은 밤 부생은 시녀에게 이렇게 중얼거렸다.
“ 아법(부법, 부견의 친형)은 비록 사촌 형제지만 믿을 수가 없으니
내일 아침에 제거해야 할 것이다.“
그 시녀는 황급히 사람을 청하왕 부법과 동해왕 부견에게 보내 부생의 살해의사를 알렸다. 부법은 양평로와 강왕 및 수백 명의 무사를 이끌고 즉시 낙양궁 운용문으로 쳐들어갔고 부견과 여파루는 무사 삼백을 데리고 뒤를 따랐다. 부생의 숙위 장수와 군사들은 모두 무기를 버리고 투항해 왔다. 술에 취해 누워있던 부생은 부법과 부견의 군사들이 다가오자 주변에게 어떤 놈들이냐고 물었다. 시종들은 도적떼들이라고 대답했다. 부생이 태연하게 들이닥친 ‘도적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 왜 황제인 나에게 인사를 하지 않느냐?”
부견의 군사들은 모두 웃었다. 아직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부생은 누운 채로 자신에게 절을 하지 않으면 목을 벨 것이라고 호통을 쳤다. 부견의 군사들은 술 취한 부생을 묶어 별실에 가두었다가 월왕으로 폐위시킨 후 곧 죽였다. 부견은 형 부법에게 왕위를 양보했다. 부법은 사양했다.
“ 네가 적자이고
또한 나보다 훨씬 똑똑하니
사직은 네가 맡아야 할 것이다.“
부견이 다시 양보하며 말했다.
“ 형님이 저보다 연장이십니다.
응당 즉위 하셔야 합니다.“
부견의 생모 구(苟)씨가 울면서 여러 신하들에게 요청했다.
“ 사직의 일은 중대하고
어린 아이는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잘 선택하지 않으면 훗날 후회할 것이니
여러 분들이 잘 결정하셔야 합니다.“
중신들은 망설이지 않고 부견을 선택했다. 부견의 나이 스무 살이다. 부생은 자신을 황제라고 칭했지만 부견은 스스로 대진천왕이라고 격을 낮추었다. 친형 청하왕 부법도 격을 낮추어 동해공이라고 불렀지만 승상 및 도독중외제군사라는 직을 내렸는데 이는 모든 정권 및 군권을 그에게 내려 준 것이다. 연호는 영흥(永興)이라고 정했고 부생에게 붙었던 간신배 중서감 동영과 좌복야 조소 등 20여 명을 즉시 주살했다. 친동생 양평공 부융은 형 부견만큼이나 영명하고 무예와 기억력이 뛰었으므로 항상 부견이 곁에 두고 의논을 하며 국사를 처리해 나갔다. 부생 때문에 꺼져 가던 전진의 국운이 다시 살아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사실 부견이 왕위에 오르기까지에는 숨은 조력자가 있었다. 두 살 위 사촌 형인 부생이 부견을 죽이려고 군사를 움직일 때마다 부견의 친어머니 구태후의 고모 아들 위왕 이위가 군대 안으로 부견을 끌어들여 보호해 주었었다. 구태후는 그런 도움을 준 고종사촌 이위가 한 없이 고마웠고 부견은 이위를 아버지처럼 따랐다. 이위는 좌복야가 되었다. 이위는 왕맹의 총명함에 감탄한 나머지 기회 있을 때마다 부견에게 왕맹을 칭찬했다. 부견이 왕맹에게 말했다.
“ 이공(이위)이 그대를 아는 것이 마치 포숙아가 관중을 아는 것과도 같소.“
중서시랑 왕맹은 이위를 형님으로 섬겼다. 쿠테타를 권한 설찬도 중서시랑이 되었고 권익은 급사황문시랑이 되었다.
(3) 부견의 부법 제거(AD357)과 정권 장악(AD357년 11월)
왕위에는 부견이 올랐지만 정치(승상)와 군권(도독중외제군사)은 형 부법이 가지고 있었다. 당연히 사람들은 부법에게로 쏠렸다. 어느 날 부견의 생모 구태후가 선명대를 유람하다가 부법의 집에 사람들과 가마가 구름같이 몰려 있는 것을 보았다. 깜짝 놀란 구태후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와 이위를 불렀다. 부법을 그대로 두었다가는 사직에 큰 혼란이 올 것이 분명했다. 구태후와 이위는 부법을 제거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결론지었다. 구태후는 군사를 매복시킨 다음 부법을 집으로 불렀다. 아무런 의심을 않고 부름에 응했던 부법은 그렇게 피살되었다. 형의 제거 작전을 전혀 몰랐던 스무 살 부견은 형님 부법을 영결하는 날에 피를 토하며 울었다. 부법의 아들 부양에게 동해공이라는 작위를 잇게 해주었으며 그의 동생 부부는 청하공으로 삼았다.(,AD357년 11월)
부견은 이위를 좌복야로 삼고 왕맹은 중서시랑, 강왕은 영군장군, 그리고 여파루는 사예교위로 임명했다. 이 네 명은 부견의 4인방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서로 친밀히 부견의 천하통일 대업을 도왔다.
(4) 부견의 장평토벌과 여광(呂光)의 수훈(AD358)
장평은 원래 석륵의 후조의 병주자사였으나 후조가 멸망하고(AD351) 나서는 상황에 따라 전연에 붙었다가 전진에 붙기를 여러 번 반복하다가 마침내 동진에게 복속한다는 사신을 보내어 병주자사라는 직책을 내려 받은 인물이다.
장평은 병주(산서성 태원)을 중심으로 신흥(산서성 흔현), 안문(산서성 대현), 서하(산서성 이석현) 상당(산서성 장치),상군(섬서성 유림) 일대를 장악하면서 300여 곳에 성벽을 쌓고 이족과 하족 10여만 호를 들여서 전연과 전진에 대항하고 있었다. 부견은 이런 장평을 토벌하기 위해 AD358년 등광을 전봉독호로 삼고 직접 전투에 나섰다. 장평은 소를 맨 손으로도 잡을 수 있는 괴력을 가진 양자 장자를 내 보냈다. 등강과 장자가 대치하기를 10여 일이 지났지만 승부를 가리지 못하고 있었다. 장자가 강력하게 저항하는 것을 본 부견이 산 채로 장자를 잡아오라고 명령을 내렸는데 응양장군 여광이 장자를 찔러 맞추었고 마침내 등강이 그를 사로잡아 들였다. 장평의 군대는 무너졌고 마침내 장평은 부견에게 항복했다. 부견은 장평에게 우장군을 내렸고 장자는 호본중랑장으로 삼으면서 항상 장자를 곁에 두고 다녔는데 사람들은 등강과 장자는 만 명을 대적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칭찬했다.
부견(AD337-AD385)과 한 살 차이인 여광(AD338-AD400)은 원래 아버지 여파루의 친구들로부터 높은 점수를 받지 못한 인물이었다. 왜냐하면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는 것을 전혀 좋아하지 않았고 오로지 전투놀이와 승마와 사냥에만 몰두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재능을 유심히 본 뒤 깊이 평가한 사람은 아버지 여파루가 추천해서 중용된 왕맹이었다. 왕맹의 추천으로 여광은 부견의 장수가 되었는데 이 때 장자를 사로잡음으로써 실력을 확실히 인정받게 되었다. 여광은 살아서 아버지 여파루의 총애를 받지는 못했으나 그가 추천한 왕맹의 덕으로 실력을 인정받게 된 셈이다.
(5) 부씨 형제들의 반란과 부견의 설리의 신표(齧梨爲信)(AD367)
AD357년 11월 정권을 장악 이후 부견은 지방 관리들에게 명하여 훌륭한 인재를 천거하도록 독려했다. 특히 효제(효성과 형제간의 우애), 염직(청렴하고 곧은 사람), 문학(학문에 뛰어난 사람, 및 정사(사무에 능한 사람)으로 구분하여 추천하도록 했다. 왕맹이 이들을 최종 심사해서 옳게 추천했으면 후하게 상을 내렸고 엉터리를 추천하였으면 엄벌해 처했다. 그 결과 중앙 조정에는 뛰어난 인재들이 넘쳐났고 범죄가 사라졌다고 기록되어있다. 북쪽의 전연 모용충이 낙양을 두고 남쪽의 동진과 싸움에 여념이 없는 동안 부견은 착실하게 국력을 쌓아나간 셈이었다.
이즈음 부류가 쿠테타 음모를 계획했다(AD365). 부류는 부건의 아들이니 부견에게는 친조카인 셈이었다. 3년 전인 AD364년에도 부생의 친동생 여남공 부등(騰)이 다른 네 명의 동생들과 함께 반란을 꾀하다가 잡혀 죽은 적이 있었다. 왕맹은 예전부터 부생의 자식들을 모두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부견은 주모자 부등만 처리하고 나머지 형제들은 다 살려 주었다. 그 때 살아남은 정북장군 회남공 부유는 다음해인 AD365년 또 다시 반란을 일으켜 군사를 이끌고 장안을 습격했는데 이위가 잘 방어하여 부유를 체포하고 죽였다.(AD365년10월) 이 때 부건의 아끼는 아들 정동대장군 진공 부류(부생의 동생)와 부견의 친형 정서대장군 조공 부쌍도 가담을 했지만 부견은 주모자 부유만 처단하고 나머지 형제들은 다 살려 주었다.
그 때 목숨을 살려 주었던 부류가 부생의 다른 동생 진동장군 위공 부수와 안서장군 연공 부무와 함께 또 다시 반란을 일으킬 것을 모의한 것이다.(AD367년) 진동장군부의 주부 요조가 주군 부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 공께서는 주공과 소공처럼 주군(부견)과 친한 사이인데
국가가 어려울 때 서로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어찌 스스로 난을 일으키려 하십니까?“
부수는 요조의 말을 듣지 않고 반란 군사를 일으켰다. 부견이 그 소식을 듣고 즉각 난을 일으킨 부류 형제를 장안으로 긴급 소환했다. 부류 형제들은 소환령을 거부하고 군사를 몰아 남쪽으로 장안을 향해 진격했다. 부견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군대를 물리고 소환에 응하면 용서하겠다고 약속하면서 그 신표로 배를 깨물어 보이는 「설리의 신표(齧梨爲信,설리위신)」를 보냈다. 그러나 아무도 부견의 호소에 응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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