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돈의 역사해석] 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 #12 : 정통의 길을 걸어간 전량(i)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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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
(43) 동진의 전연공격 실패(AD369)
동진의 환온은 온통 북벌생각에 젖어 있었다. 뛰어난 전연의 지도자 모용각이 죽고 형편없는 모용위와 모용평이 실권을 잡았으니 전연 점령은 훨씬 더 쉬울 것으로 생각했다. 환온은 5만 군사를 몰아 고숙(당도. 남경 60KM 아래)를 출발하여 운하 수로를 거슬러 연주(兗州, 산동성 남서부 및 하남성 동북부)방면으로 북진을 개시했다.(AD369년5월) 6월 금향(산동성 가상)부근에서 황하를 건넜고 남서쪽으로 내려와 방두(하남성 준현)에 진을 쳤다. 동진 환온 군대의 침입으로 전연은 두려움에 휩싸였다. 황제 모용위와 태부 모용평은 북쪽으로 도망갈 생각만 하고 있었다. 모용수와 모용덕이 5만 군사를 모아 가까스로 동진군대를 막았다. 모용위는 급히 사신을 부견에게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부견은 전연에 대한 파병지원 문제를 의논했다. 모두들 반대했다. 15년 전인 AD354년 환온이 전진을 공략해 왔을 때(남전 전투 : 위(19) 참조) 전연이 도와주지도 않았고 또 전진에게 칭번해 오지도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왕맹의 생각은 달랐다.
“ 현재 전연의 실권자 모용평은 전혀 환온의 적수가 되지 못합니다.
환온이 이길 것은 자명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낙양을 잡아먹고
유주(하북성 북경 주변)와 기주(하북성 중부)와
병주(산서성 태원 부근)와 예주(하남성 동부와 산동성 남부)의 온 병사를 긁어모아
우리 전진의 동쪽 국경을 넘볼 텐데
그렇게 되면 폐하의 사업은 끝장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전연과 힘을 합쳐서 환온을 물리치신 다음에
허약해진 전연을 흡수하면 우리가 대세를 잡는 것 아니겠습니까?
기가 막힌 묘책이 아닐 수가 없었다. 부견은 구지와 등광에게 2만 군사를 붙여서 동쪽으로 낙양을 거쳐 영천(하남성 우현)에 진을 치게 하는 한편 산기시랑 강무를 전연에 보내 구원군이 동쪽으로 이미 진군했다고 알려주었다.
황하를 건너 온 환온의 군대는 여러 가지 악재에 시달렸다. 선봉 군대가 결사적으로 항전하는 전연군에게 연이어 패배하는가 하면 너무 깊이 들어 온 까닭에 배후 보급로가 차단되기 일쑤였다. 게다가 전진의 대군이 동쪽으로 진격해 오고 있다는 소식에 동진 군대는 크게 술렁거렸다. 그리고 건강의 동진 조정안에서는 환온에 대한 반감이 싹트고 있었다.
환온은 황급히 철군을 결정했다. 전연의 방위군 선봉장인 오왕 모용수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환온의 뒤를 쫓았다. 참모들은 퇴각하는 환온 군대를 급습할 것을 종용했지만 모용수는 침착했다. 후퇴를 결정한 환온 군은 추격해 오는 전연군에 대비하여 최정예군을 후방에 배치하면서 퇴각하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한참 동안 전연군이 쫓아오지 않는 것을 본 환온군은 방심하면서 퇴각 속도를 높였다. 이때를 틈타 모용수는 전격 습격 작전을 폈다. 순식간에 환온은 5만 정벌군사의 6할인 3만을 잃었다. 환온은 패잔병을 모아 산양(강소성 회안)으로 물러나 주둔했다. 그리고 패전의 책임을 전부 군량보급의 책임자인 원진에게로 돌렸다. 원진은 모든 잘못을 자신에게 덮어씌운 환온에게 격분하여 수춘(안휘성 수현)에 웅거하면서 전연에 항복하고 말았다.
(44) 전연 조정의 분열과 모용수 전진 투항(AD369)
환온이 퇴각하자 모용수는 양읍(하남성 수현)을 거쳐 전연의 수도 업(하남성 임장현)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전연 조정에 승전 포상 문제를 상주했다. 태부 모용평은 날로 위엄과 명성이 떨치는 조카 모용수를 그냥 둘 수가 없었다. 태후 가족혼(황제 모용위의 죽은 아버지 모용준의 처)씨 또한 시동생 모용수를 싫어했다. 당연히 모용평과 가족혼태후는 모용수를 살해할 음모를 진행시켰다.
죽은 모용각의 아들 모용해와 모용수의 장인 난건이 몰래 모용수에게 알려 주었다.
“ 먼저 일어나야 이긴다.
모용평과 모용장(황제 모용위의 형)만 처리하면
나머지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모용수는 거절했다.
“ 피붙이 간의 다툼이야말로 나라의 혼란입니다.
내가 조용히 죽을지언정
차마 형제를 죽이면서까지 정권을 찬탈할 수는 없습니다.“
모용해와 난건이 거듭 재촉하자 모용수는 이렇게 말했다.
“차라리 제가 피하겠습니다.”
모용수는 근심에 싸여 아들 모용령에게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물었다. 모용령은 일단 전연 모용씨의 근거지인 용성(요녕성 조양)으로 돌아간 뒤 조정의 적개심을 피하는 것이 상책이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주변을 흡수하여 스스로 힘을 기르는 것이 다음의 계책이라고 말했다. 모용수는 그것이 훌륭한 생각이라고 판단하여 몰래 빠져나가 북으로 달아났다. 모용수가 출발한 지 하루도 안 되었을 무렵 모용수의 다른 아들 모용린은 평소 아버지로부터 홀대받은 것에 대한 앙갚음으로 그 계획을 조정 밀고해 버렸다. 모용수의 측근들도 모두 모용수에게 등을 돌리고 말았다. 계획이 틀어지자 모용령이 아버지에게 마지막 수단은 전진에 투항하는 것이라고 건의했다. 모용수도 동의했다. 모용수와 모용령 부자는 그 길로 말머리를 돌려 서쪽으로 장안을 향해 달려갔다. 전진의 부견은 모용수 부자를 크게 환영했다. 모용수에게 관군장군, 모용해에게 적노장군의 직을 주었다. 모용수는 전진이 전연을 AD370년 멸망시키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다. 그리고 14년 뒤인 AD384년 비수대전의 패배(AD383년)로 뿌리째 흔들리는 전진으로부터 독립하여 후연이라는 나라를 세운다.
(45) 모용수를 제거하려는 왕맹(AD369)
부견이 모용수 부자를 크게 후대하는 것을 왕맹은 경계했다.
“ 모용수 부자는 용과 호랑이 같은 부자이니
지금 제거하셔야 합니다.“
부견의 생각은 달랐다.
“ 영웅호걸을 거둬들여 사해를 깨끗이 평정하는 것은
군자의 소망인데 내 어찌 그들을 죽이겠소.
또 서로 이미 정성스럽고 충성스런 말을 나누었는데
필부도 허툰 말을 하지 않을 터인 바에
만승인 내가 어찌 약속한 말을 거두어 그를 죽이겠소.“
당시 전진과 전연의 외교관계는 우호적이었다. 서로 신하들의 교류가 활발했다. 전진에 들어 갔던 양침은 돌아와서 전진의 전쟁준비와 민심수습 등을 보고하면서 장차 있을 변란에 철저히 대비해야 할 것이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황제 모용위와 태부 모용평은 부견이 모용수를 받아들이는 것을 보면 먼저 우호관계를 깰 생각이 없는 것이 분명하다고 판단했다. 부견이 전쟁을 생각하고 있었으면 분명히 적개심 때문에 오왕 모용수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라는 단순논리였다.
(46) 전연 조정의 분토 같은 붕괴(AD369)
전연의 태위 황보진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 오원의 화(伍員之禍)를 대비하셔야 합니다.
낙양과 태원과 호관(산서성 장치)에 병력을 증강시켜
장차 전진의 침입에 준비를 하셔야 합니다.“
오원의 화란 BC 6세기경 춘추시대 초나라 오원(오자서)의 아버지 오사가 간신 비무기에게 모함을 받아 죽자 오원이 피란을 거듭하다가 결국 오왕 합려에게 등용되어 아버지 원수 초나라를 멸망시킨 고사를 말한다. 태부 모용평이 황제 모용위에게 말했다.
“ 전진은 힘이 적고 약하기 때문에 우리를 도왔던 것입니다.
또 부견은 항상 정도만 따라 가는 사람이므로
반란을 일으킨 오왕 모용수의 말을 듣고
우리를 공격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가볍게 놀라서 경계심을 일으키는 것이
오히려 그들에게 침략의 빌미를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설득하면서 한편으로 전진에서 온 사신에게 얼마나 전연이 풍요롭고 잘 사는 지를 보여 주었다. 고태와 하간과 같은 강직한 전연 신하들은 오히려 강한 병기와 조직된 군사들의 힘을 보여줘야 할 것이라고 간청했지만 무력긴장을 원하지 않는 모용평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었다. 정권은 문란한 가족혼태후가 쥐고 있었고 모용평은 옹졸하고 편협하며 질투와 탐욕에 가득 찬 사람이었다. 뇌물로 자리를 사는 것이 유행이 되어 유능한 관리는 능력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47) 왕맹의 낙양함락과 모용수 제거 모략(AD370)
승리에 도취된 전연은 전진에게 참전 대가로 약속한 호뢰관(하남성 형양 서북쪽 사수진) 서쪽 땅을 주지 않았다. 사신이 말을 잘못한 것일 뿐 애당초 호뢰관을 할양할 생각이 아니었다고 둘러댔다. 화가 난 부견은 왕맹과 양성과 등강에게 3만 군사를 주어 전연을 토벌하기로 하고 낙양을 공격했다.(AD369년 12월) 낙양을 지키던 전연의 형주자사 모용축은 부견의 항복권유 편지를 읽자마자 창과 칼 을 내려놓고 투항해 왔다.
왕맹은 낙양을 향해 출병하기 직전 모용수의 아들 모용령을 향도로 삼음과 동시에 모용수를 찾아가 기념할 만한 물건을 주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모용수는 의심하지 않고 몸에 지니던 작은 패도 하나를 건네주었다. 낙양을 함락시키자 왕맹은 모용수와 가까운 금희라는 사람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 모용령을 찾아가서 이 패도를 보여 주면서 아버지가 이렇게 말 했다고 전하시오.
‘지금 왕맹이 나(모용수)를 심하게 견제하고 있고
부견 또한 나를 진정으로 신뢰하는지 알 수가 없다.
나 아버지 무용수는 막 동진으로 망명길을 떠나면서
이 칼을 금희에게 주어 미리 알리는 것이니
너 또한 곧장 동진으로 출발하라.‘ “
모용령은 아버지가 동진으로 망명했다는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하루 종일 결심을 못하다가 사냥 간다는 핑계로 사촌지간인 전연의 낙안왕 모용장에게로 피신했다. 왕맹은 즉각 모용령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표문을 장안으로 올렸다. 그 소식을 들은 모용수는 황급히 도망가다가 남전에서 사로잡혔다. 부견은 대범하게 이렇게 말했다.
“ 경의 아들이 고향이 그리워 돌아 간 것을 가지고 흉허물 잡을 수는 없을 것 같소.
장차 전연은 망하고 말 것이니
모용령도 거기서 살아 남지는 못할 것이오.
제발로 호랑이 굴로 돌아 간 것이 애석할 따름이요.
부자간이나 형제간에는 연좌되지 않으니
경께서 어찌 지나치게 두려워하며 일을 낭패할 수가 있겠소?“
부견은 마치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모용수를 대했다. 모용수는 부견의 대범하고 사려 깊음에 뼛속깊이 감탄했다. 전연에서는 돌아 온 모용령을 의심하여 조양 북쪽 600여리로 귀양보냈다. 귀양지에서 모용령은 그 다음해에 모반을 일으키려다 발각되어 죽었다.
(48) 사마광의 부견과 왕맹 평가(AD370)
부견과 왕맹이 없이 전진을 설명할 수 없다. 이 두 사람은 전진의 알파와 오메가와 같다. 사마광은 부견과 왕맹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 주(周) 무왕은 은나라 주(紂)왕의 형 계미자를 얻어서 주나라를 개척했고,
진(秦)은 유여를 얻고서 서융의 패자가 되었으며
오나라는 초나라 오원(오자서) 얻어서 강한 초를 이겼고
한나라는 진평을 얻어서 항적의 목을 베었으며
위나라는 허유를 얻은 다음에야 원소를 깨뜨릴 수 있었으니
적국의 재주 있는 인재를 들여 활용하는 것으로 큰 밑천을 삼은 것이다.
왕맹이 아직은 순수한 마음의 모용수를 시기하여 죽이려 했으니
이는 전연의 폭정을 피하여 도망 오는 인재를 막는 옳지 못한 행동이었다.
반면에 전진왕 부견은 모용수를 예로 대함으로써
전연 사람의 희망을 거두어들이고 그를 가까이 함으로써
전연 백성들의 호응을 얻어내게 되었으니 그는 허물을 범하지 않은 것이다.
왕맹이 모용수 죽이는 것에 급급하여 마치 죽파는 장사꾼처럼 행동하고
그의 총애를 시기 질투하여 참소하는 행동을 보였으니
어찌 훌륭한 덕군자의 행동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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