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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은 한국의 산업화와 고속성장을 이끌어 온 주체다. 상당수 재벌기업들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이들의 성공으로 한국은 TV, 반도체, 휴대폰, 자동차, 조선 등의 제조업 부문에서 글로벌 강자로 부상했다. 재벌의 성공과 기여는 재벌이라는 한국식 기업집단 조직의 전반적 효율성을 반영한다.
그런데 작금의 경제여건과 시장상황은 과거 고속성장기와는 크게 다르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재벌은 효율적인 기업조직인가?
기업집단과 내부거래
기업 활동을 하려면 자산·자금·인력은 물론 다양한 상품과 용역(부품, 물류, 광고, MRO, 작업복, 건물관리 등)이 필요하다. 기업은 이 필요 자원들을 자체 생산·조달할지, 계열사를 설립해서 조달할지(기업집단 내부거래), 아니면 외부에서 구매할지(시장거래) 결정해야 한다. 이 선택은 기업의 경쟁력을 좌우하며, 시장의 작동방식과 효율성에 영향을 미친다.
기업집단은 내부거래를 통해 필요 자원을 동원·활용할 수 있는 기업조직이다. 재벌 기업들은 총수의 그룹 지배 하에 자산·자금·인력·상품·용역의 내부거래를 광범위하게 해왔다. 사실, 계열사들 간의 거래가 없다면, 계열관계란 단순 출자관계일 뿐이며, 재벌 내지 기업집단 특유의 경제적 기능은 별로 없다. 재벌 고유의 경제적 기능과 성과는,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대부분 내부거래를 통해서 발현된다. 내부거래의 기능과 효과가 재벌의 경제적 성과를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부거래의 두 얼굴
기업은 시장에서 필요 자원을 원활히 조달할 수 없을 때 내부거래를 하게 된다. 예컨대, 외부 물류업체가 없거나, 외부 업체들의 물류서비스가 저질이거나, 가격이 독점적이면, 기업은 계열사를 설립해서 물류서비스를 공급하게 할 수 있다. 시장이 제 기능을 못할 때, 내부거래가 사업을 효율적으로 조직・수행하는 방법이 된다.
이 내부거래의 효율성은 시장이 미발달한 저개발 경제에서 긴요하다. 저개발국에서는 시장이 제대로 형성되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기업은 계열사를 설립하고 내부거래를 하게 된다. Leff(1978) 등이 지적하듯, 기업집단은 개도국에서 흔히 형성되는 기업조직이다.
한편, 내부거래는 부당한 목적에 쓰일 수 있다. 기업집단은 내부거래를 통해 부실 계열사를 지원하거나(propping), 계열사를 경쟁자들보다 유리하게 만들어 경쟁을 저해할 수 있다. 또한, 지배주주 일가는 ‘일감 몰아주기’ 등 내부거래를 통해 회사의 부를 사익으로 빼돌릴 수 있다(tunneling). 이런 내부거래는 기업의 효율성을 파괴하면서 시장의 기능과 경쟁을 봉쇄한다.
경제여건과 시장상황의 변화
우리나라는 시장이 제 기능을 못하던 저개발국이었다. 재벌 창업자들은 스스로 많은 것을 해결해야 했다. 이들은 계열사를 늘려 나갔고, 내부거래를 통해 신사업 등에 필요한 자원을 동원·활용했다. 이런 식으로 재벌은 저개발 경제의 난관들을 헤쳐 나갔고, ‘오너 경영자’의 신속・과감한 투자로 ‘추격형’(catch-up) 경제성장을 주도했다.
지금의 상황과 여건은 어떠한가? 우리는 개도국 단계를 벗어났고, 추격형 성장은 한계에 다다랐다. 자원 동원이 아니라 창의와 혁신이 긴요한 상황이다. 더 근본적으로, 우리는 글로벌 경제에서 살고 있다. 자본·상품 등의 국제적 흐름에 대한 장벽은 거의 다 사라졌고, 기업 전략과 활동은 세계화되었다. 적어도 대기업들에게 과거의 시장 미발달에 따른 사업 장애들은 해소되었다. 이에 따라 재벌의 내부거래의 필요성과 효율성은 과거에 비해 많이 축소되었다.
재벌 소유구조의 변화
흔히 재벌 총수(일가)는 ‘오너’라 불리며, ‘한국식 오너 경영’이 재벌의 강점으로 거론된다. 오너가 경영하므로 신속한 의사결정과 과감한 투자를 할 수 있고, 이것이 재벌의 성공을 이끌었다는 것이다. 작년에 나온 ‘비리 기업인 가석방론‘도 이런 인식에 근거한 것이다.
물론, 진정한 오너 경영자라면 회사가 ‘자기 것’이므로 회사 이익을 위해 일한다. 소유・경영의 분리로 인한 ‘대리인 문제’(agency problem), 즉 경영자의 회사 이익에 반하는 사익추구 문제는 없다.
재벌 1세는 창업자이자 오너다. 오늘날의 총수(일가)도 오너인가? 1983년에 17.2%이던 30대 재벌의 총수일가 지분율이 2000년부터 5% 밑으로 떨어졌다. 2014년 40개 재벌의 총수일가 지분율은 4.2%(최저 0.5%~최고 42%)다. 상위 재벌가의 지분율은 더 낮다. 10대 재벌의 총수일가 지분율은 2001년 이후 3%대에 있다가 2011년에 2.9%, 2014년에 2.8%로 낮아졌다. 총수 지분율은 1991~2000년 중에 5%에서 1.1%로 낮아졌고, 2012년에 0.9%로 줄었다. 2014년 SK와 삼성의 총수 지분율은 각각 0.04%와 0.7%에 불과하다.
평균적으로 총수일가는 계열사 네 곳 중 한 곳에만 지분을 갖고 있다. 2014년 40개 재벌의 1,420개 계열사 중 총수일가 지분이 없는 곳이 1,040개사(73.2%)에 이른다.
이런 상황에서 총수일가는 계열사간 출자를 통해 그룹 지배・경영권을 유지하고 있다. 10대 재벌의 경우, 1998년까지 30%대에 머물던 계열사 지분율이 1999~2010년에 40%대로, 2011년 이후에는 50% 수준으로 증가했다.
Berle & Means(1968)는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지분율이 20% 미만인 기업을 경영자 지배기업으로 보았고, Herman(1981)은 5% 미만의 사적 소유를 경영자 지배기업의 기준으로 삼았다. 분명, 오늘날 대다수 총수일가는 오너가 아니라 대리인(전문 경영자)이다.
이런 변화로 인해 재벌의 오너 경영의 장점은 소멸되고, 총수일가의 내부거래를 통한 사익편취 등 대리인 문제가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다. 이 대리인 비용은 총수일가의 경영권 유지・강화·승계 목적 등에 의해 증폭되고 있다.
여전히 재벌은 효율적인 기업조직인가
재벌은 우리 경제의 고속성장을 주도한 기업조직이지만, 지금은 재벌 시스템이 야기하는 문제와 비용이 상당하다. 시장 왜곡을 극복하는 효율적 내부거래의 범위는 축소된 반면, 부당 내부거래 등 총수일가의 대리인 문제는 악화되고 있다.
재벌의 결함은 1997년 외환위기와 대규모 기업실패에서 드러난 바 있다. 이를 계기로 기업지배구조 개선, 순환출자 억제, 부당 내부거래 차단 등을 위한 여러 조치들이 도입되었다. 하지만 재벌의 내재적 문제들은 여전하다. 지금도 기업지배구조는 후진적이며, 공정거래법 등 관련 법제도는 부당 내부거래 등 총수일가의 대리인 문제를 제대로 규율하지 못하고 있다.
기업지배구조의 주 역할은 기업이 창출한 가치를 경영자가 빼돌리지 못하게 감시하는 것인데, 재벌의 기존 지배구조에서 이 역할은 기대할 수 없다. The Economist(2012.2.13.)는 ‘The Korea discount, Minority report’라는 기사에서 한국 기업들의 가치 저평가를 지적하면서 “재벌의 기업지배구조가 가장 큰 문제”라고 분석했다.
일부 재벌의 성공을 배경으로 재벌의 기존 경영방식과 행태가 옹호되곤 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글로벌 경제, 지식기반경제에서 살고 있다. 재벌은 과거 방식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 재벌의 여러 관행들은 우리 경제에 상당한 비용을 지우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재벌 3·4세로의 경영권 승계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이들은 창업자의 후손일 뿐, 오너가 아니며 자질과 능력이 검증된 기업가도 아니다. 재벌은 뛰어난 기업가가 있을 때 장점이 발휘될 수 있는 기업조직이다. 우리 경제의 장래가 걱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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