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정치리더십-외천본민(畏天本民) <74> 진정으로 행복한 나라 III. 노인을 공경하고 봉양하라.<上>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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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1 양로 복지 확충
[큰 가뭄과 자신의 실책 발견]
처음에는 노인예우나 양로 문제에 대해서 세종이 그리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었다. 즉위교서 어디에도 양로 혹은 경로라는 단어는 찾아볼 수 없다. 환과고독이나 피륭잔질과에 대한 관심이나 혜양로질(惠養老疾), 즉 “늙거나 병든 자를 구호해야 한다.”는 법령의 내용처럼 병든 자와 함께 국가가 뒤를 돌봐야 할 대상 그 이상의 중요성은 없었다. 그리고 그 법령은 잘 지켜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별 다른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이런 세종의 생각에 결정적인 변화가 나타났다. 세종 7년 사경을 헤맨 큰 경험을 한 이후 세종은 양로문제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보이게 된다.
‘혜양로질’의 법이 전혀 지켜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서울이나 지방의 관리들의 무관심과 소홀함으로 노질, 특히 노인들과 병든 사람들이 내팽개쳐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즉위교서에서 강조한 시인발정이 무엇인가. 어진 정치를 펴는 것 아닌가. 어진 정치가 무엇인가. 늙거나 병든 사람을 돌보는 것 아닌가. 여태껏 이 중요한 것을 외면해왔으니 하늘이 온갖 재난으로 경고해왔던 것 아닌가. 사실 그동안 별 가뭄은 없었는데 유독 작년(세종 7년, 1425)에 큰 가뭄을 당한 세종으로써 노인을 여태껏 도외시했던 것은 큰 실책이었다고 생각했다. 세종은 본인이 직접 챙기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늙거나 병든 사람을 보살피고 보호해야한다는 분명한 법이 있는데도
안팎의 관리들이 태만하여 거행하지 않는구나. 의정부와 각 조가 같이
상의하여 양로의 조건들을 보고하도록 하라. (惠養老疾 己有著令 中外
官吏 漫不擧行 其養老條件 與政府諸曹同議以啓 : 세종 8년 7월 18일)”
불호령이 떨어지자 신하들은 법석을 떨며 노인양로 규정을 서둘러 마련했다(세종 8년 7월 18일) ;
(i) 70세 이상으로 자식도 없고 친척도 없이 남의 집에 붙어사는 자를
각 고을에서 상세히 이름을 조사기록한 뒤 상부에 보고하면,
(ii) 국가는 쌀과 소금과 장을 반 년 치 지급하고,
(iii) 국가는 옷을 만들기 위한 베를 일 년에 두 필 제공하며,
(iv) 지방 수령은 토산물을 적당히 지급한다.
일단 이 건의안을 승인하긴 했지만 이것으로는 부족하다고 느낀 세종은 규정을 더 보완하도록 지시했다(세종 10년 9월 12일).
(v) 90세가 넘는 자로 친척이나 벗이나 남의 집에 기식하는 자에게는
매 철마다 옷감을 보내고 더하여 매달 초 월급(삭료)를 지급하라.
그리고 이어 병든 노인의 경우에는 위(i)의 자격요건을 대폭 완화하였다.
(i-1) 70세를 넘은 병들어 몸을 못 움직이는 노인은 친척 유무를
묻지 않고 구휼하도록 하라.
의정부는 자녀와 친척이 없고 남의 집에 기숙하는 90세 이상의 노인에게 매 철 지급되는 옷감이 두 필밖에 되지 않으므로 이를 네 필로 올리고 특히 겨울철에는 한 필을 더 주자고 해 승인을 얻었다(세종 21년 1월 2일).
III.2 양로에 대한 발상전환 : 인수의 경지를 같이 밟자(共躋仁壽之域)
양로 복지 조건을 점차 확대해 나가는 과정에서 세종은 양로에 대한 의식구조를 전환해 나갔다. 그동안의 생각이 ‘소극적인 노인 구휼 혹은 구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면 이제는 보다 적극적으로 ‘노인을 존경하고 우대하는 예절의 하나’로 승화시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병자와 동격인 노인’으로부터 ‘제왕의 존경을 받는 원로’로의 노인 인식으로 전환한 것이다.
“경로의 예절은 훌륭한 것이다. 옛 제왕도 직접 연회에 참여하여 기쁨의
뜻을 보였고 혹 자녀의 부역을 면제해 주어 대접하기도하였다. 내가 백
성의 위에 있어 노인들을 모두 돌보면서 전국적으로 향연을 베풀도록
명을 내리고 자손의 부역을 면제한 것은 오직 선왕의 제도를 따라 한
일 뿐이다. 그러나 혜택과 보살핌의 명령만 있을 뿐 우대하고 존숭하
는 실체는 잘 드러나지 않는구나. (敬老之禮 尙矣 古昔帝王或親臨宴衎
以示尊敬之意 或復子若孫 以遂供億之事 予在民上 眷竝耆老 己令中外擧
行饗禮 又復子孫庶追先王之制 然徒有惠養之命 未著優崇之實
: 세종 17년 6월 21일)”
아무도 돌보아 줄 사람이 없는 독거노인에게 음식이나 옷가지를 제공하는 것에 그치던 양로 사업에서 그들을 위한 양로연을 베풀고 나아가 관직을 제수함으로써 보다 적극적인 존숭 대상으로 승격시켜 새로운 인수의 정치를 꿈꾸었던 것이다.
“아! 위를 존경하고 나이 많은 어른을 높이는 효제의 기풍이 두텁게
자리 잡아 일마다 즐겁고 삶은 안정되어 다같이 인수(仁壽)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너희 예조는 내 이 뜻을 몸소 깨닫고
널리 알리도록 하라. (於戱 尊高尙齒 式敦孝悌之風 樂業安生 共躋仁壽
之域 惟爾禮曹 體予之懷 曉諭中外 : 세종 17년 6월 21일)”
이 글에는 세종이 지향하는 정치의 궁극적인 목표가 잘 나타나 있다 : “다같이 인수의 지역을 밟자.(공제인수지역,共躋仁壽之域)”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하여 어른을 높이 모시는 것(존고상치,尊高尙齒)은 필수적이라고 세종은 확신했다. 양로연을 열어야겠다고 생각했다.
III.3 양로예절을 승화시키자.
[송복의 양로 건의문]
세종이 노인들을 모시고 연회를 베풀 생각을 언제부터 했는지는 확실하게 나타나 있지 않지만 임금에게 양로연을 하자고 제안했던 최초의 기록은 세종실록 2년 11월 기록에 실려 있다. 현직 지방 수령으로부터 접수한 건의문 중에 전라도 창평현감 송복이 양로하는 방법에 대해 상세히 보고해 올렸다. 그는 예로부터 양로에는 다음과 같이 네 가지 방법이 있다고 했다.
(i) 삼로오경(三老五更)을 모시고 우대하는 제도,
(ii) 국가일로 죽은 자의 부조(父祖)를 양육하는 제도,
(iii) 은퇴한 원로 관리를 양육하는 제도, 그리고
(iv) 나이 많은 평범한 노인을 양육하는 제도라고 했다.
그는 또 양로행사에 우(虞)나라는 연회(宴禮)를 베풀었고 하(夏)나라는 향례(享禮,제사)로 했으며 은(殷)나라는 식례(食禮)를 했는데 주나라는 이들을 혼합하여 일 년에 일곱 차례나 양로행사를 치렀다고 말했다. 왕도정치에서 이런 양로행사는 없을 수 없으므로 이런 제도를 갖추기를 세종께 간곡히 요청했던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석전제(음력 2월 과 8월 성인에게 드리는 제사)를 마치고나서 서울과 지방에서 70,80세 노인들을 귀천을 가리지 말고 모시고 향연을 베풀고 그들로부터 좋은 말을 들어(걸선언,乞善言) 정치에 자문하라고 건의했다. 그리하면 인륜이 후박해지고 풍속이 바르게 될 것이며 하늘의 뜻이 순조로워져 음양의 기가 화합할 것(人倫厚 而風俗正 天道順而陰陽和)이라 단언했다(세종 2년 11월 5일).
[세종의 양로연 지시]
십이 년 뒤인 세종 14년(1432)에 이와 거의 똑같은 말을 세종이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면 송복의 제안을 오랫동안 머릿속에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세종은 예조에 명하여 양로연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세부사항(양로연의,養老宴儀)을 보고해 올리라고 지시했다. 며칠 뒤 예조가 올린 양로연의에는 연회의 날짜와 장소, 연회의 진행 방법과 순서, 참석자의 자격과 좌석배치 등이 상세하게 기록되어있다. 이 연회는 지방에서도 거의 같은 방식으로 진행하였다. 양로연 준비를 지켜보는 세종은 매우 흡족하고 약간은 기대에 부풀었다.
“이번 양로연이 비록 옛날의 삼로오경에는 미치지 못해도 여러
노인들이 들어올 때 내가 아래 자리에서 서서 기다리면 어떨까.
(今養老宴 雖未逮古者養三老五更之法 然於君老出入 予欲下座立待
: 세종 14년 8월 1일)”
그런데 양로연 실시에 작은 문제가 생겼다. 원래 참석 자격자는 사대부 노인들에 국한되어 있었다. 여성 노인들은 참여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또 서민들도 참석이 배제되는 것이다. 세종은 이것이 옳지 않다고 지적했다.
“양로연은 사대부 노인들이 참여하는데 그렇다면 사대부 부인 연로자들은 참여하지
못하는 것이니 실로 옳지 못하다. 그리고 말이 양로연이라면 서민남녀노인들도 당연히
모두 참여해야 하는 것이다. 책임자와 의논해서 보고하라. (養老宴 士大夫年老者得與焉 命婦年老者 未得與焉 實爲
未便 且謂之養老宴 則庶人男女 當盡得與 其議于提調以啓
: 세종 14년 8월 14일)”
황희는 연로한 부녀자는 거동이 불편하여 대궐출입이 어려울 것이므로 음식만 집으로 보내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세종은 당치도 않다는 듯 말했다.
“옛날에는 말을 타고도 입궐했다. 좌석까지 바로 교자를 타고 들어
오도록 하고 하녀가 부축해 내리도록 하라. 왕비가 직접 연회에 참여
한다 하더라도 그 뜻에는 전혀 어긋남이 없다. (古有騎馬闕內者 乘轎直
入於坐 使婢扶侍 中宮親臨以宴 無害於義 : 세종 14년 8월 14일)”
그리고 평민 노인의 연회 참석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양로란 나이 많음을 귀하게 여긴다는 뜻이지 존비를 따지자는 것이
아니다. 비록 양민이 아니라 천민이라 할지라도 모두 참여시키라.
다만 장죄로 죄를 받아 자자(刺字)한 자는 참여하지 못하게 하라.
(養老 所以貴其老也 非計其尊卑也 雖至賤人 皆許入參 其犯贓被罪刺字者
勿參 : 세종 14년 8월 17일)”
남녀는 분리하여 양로연을 치르면서도 귀천은 가리지 않고 함께 잔치를 베풀게 한 것을 보면 세종은 귀천을 그다지 본질적인 것으로 인식하지 않았음을 잘 알 수 있다. 세종의 큰 기대 속에 세종 14년 8월 27일 최초로 양로연이 열렸다. 80세 이상의 정2품 이상 6인과 정4품 이상 17명과 5품 이하와 평민, 천민, 노예가 86명, 합해서 총 109명이었다. 세종은 이렇게 기뻐했다.
“오늘 날씨가 맑고 화창하였고 연회도 완벽해 내 마음이 기쁘다.
내일 부인을 위한 연회도 당연히 오늘과 같을 것이다. (今日適淸和 宴事
無謬 予心喜焉 明日宴老婦 亦當如是 : 세종 14년 8월 27일)”
그 다음날 열린 부인 양로연에는 80세 이상으로서 2품 이상 14인, 4품 이상 30인, 9품 이상 66인, 서민천민 부인 118명으로 모두 228명이 참석했다. 세종은 노인들에 대한 진심어린 마음으로 양로연을 베풀었던 것이 틀림없다.
경로는 참으로 ‘나라의 아름다운 일(國家美事)’이라고 했다. 그러나 지방 관리들은 세종의 그런 마음을 제대로 잘 알지 못했다.
지방의 주부군현에서 열린 양로연은 수령의 무성의와 감사의 무관심으로 노인대접이 매우 소홀했다. 세종은 강력한 경고를 보냈다.
“지난 임자년(1432)에 처음으로 양로연을 베풀고 대소 신하들과 같이
모여 직접 식사 대접을 한 것이다. 그런데 각 지방 수령들은 내 뜻을 잘
깨닫지 못하여 대접하더라도 직접 하지 않거나 직접 대접하더라도 음식
이 너무 천박하여 경로의 뜻을 위반한 경우가 있었다. 지금부터는
여전히 마음을 쓰지 않는 수령은 엄중히 죄를 물을 것이요 감사 또한
그 책임을 회피하지 못할 것이다. (故去壬子年 始設養老宴 會大小老臣
親臨饋之 各官守令不體予意 雖聚會饋餉 或不親對 雖親饋 饌具甚薄 有違
敬老之意 自今如前不用心者 守令則當重論 監司亦不得辭其責矣 :
세종 15년 8월 28일)”
양로연은 세종 14년 8월에 시작하여 4년 동안 매년 8월 혹은 9월에 열렸다. 그러나 세종 18년 이후에는 극심한 가뭄으로 양로연을 열지 못하다가 4년 뒤인 세종 22년 다시 재개하였다. 세종은 영구히 양로연을 계속하도록 지시했다.
“대개 법을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고 법을 행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이미 법을 만들었으면 부득이한 사정이 있더라도 폐지하면 안 되는
것이다. 고려의 팔관회는 우리의 강무와 비슷한데 비록 장마가 지거나
심한 가뭄이 들어도 항상 시행하여 폐지하지 않았다. 이번 양로연은
매우 아름다운 제도이므로 영원히 이를 시행해야지 폐지하면 안 된다.
(大抵 立法非難 行法爲難 旣立其法 則雖有不得已之故 不可廢也
昔高麗之八關會 我朝之講武 雖雨旱乾凶歉之歲 常行不廢 今養老宴之法
誠爲美典 亦宜永爲遵行 不可廢也 : 세종 22년 8월 11일)”
이렇게 해서 양로연은 세종 22년부터 다시 재개되었다. 그렇지만 세종 25년 4월부터 7월까지 가뭄이 들자 양로연은 다시 중지되었다. 그 다음해에도 가뭄이 심해서 열리지 않던 양로연은 세종 30년 8월 25일 다시 열렸다. 그러나 이 양로연에 세종은 참여할 수가 없었다. 거동을 할 수 없을 만큼 세종은 편찮았다. 세자 향(珦)이 대신 주재했다. 이 때 세자의 나이는 이미 34세 이었고 삼년 전부터 세종 대신 서무를 맡아 처리하고 있었다.
<ifs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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