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청 시인의 문학산책 (43) 진짜 사물들과의 만남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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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래 전 경기도 이천에 집을 짓고 이사를 하였다. 50여 년에 걸치는 서울 아파트 생활을 떨치고 서울을 벗어나기로 한 것이었다. 6.25 사변 후 내가 출생지인 이천을 떠난 지 반세기의 시간을 훌쩍 지내고 다시 그곳으로 돌아온 것이다. 내 유년의 사금파리들이 버려진 곳, 전쟁의 파편들이 흩어진 곳, 하릴없이 들판을 쏘다니던 열 살쯤의 아이가 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눈물 글썽이던 거기로 돌아온 것이다.
막상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시골로 떠나려 하니 여러 가지 어려움이 닥치기도 하였다. 마련해둔 집터가 면 소재지여서 서울까지의 교통편이 막막하였다. 문명에 길들여진 생활 습관 하나하나가 모두 낯설고 불편한 것들이었다. 이웃들과의 낯 익히기도 그러하였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들을 감내하면서 내가 시골 생활을 선택한 것은 원초적인 것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다.
나는 이곳, 양촌리 내 흙에 깃을 드리고 살면서 참 많은 이웃들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이웃들의 마음속까지를 헤아리는 푸근한 인정의 문턱에 이르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해 보기도 한다. 이곳, 내 이웃들을 조금만 소개하면 이렇다. 우선 새들- 소쩍새, 꾀꼬리, 오색딱따구리, 직박구리, 박새, 딱새, 파랑새, 노랑턱멧새, 굴뚝새…, 다음으로 곤충들- 사슴벌레, 투구풍뎅이, 여치, 베짱이, 땅강아지…, 또 족제비, 다람쥐, 청설모, 들쥐, 살모사… 하늘말나리, 원추리, 비비추, 더덕, 취, 곰취, 왕꼬들배기, 부용, 배롱나무, 매화, 산수유, 산초, 엄나무, 밤나무, 잣나무, 상수리나무, 목련, 족두리꽃, 마아가렛……, 그 외에도 수도 없는 이웃들과 친교를 나누며 산다.
나는 무엇보다도 이들과 나누는 무언의 대화가 즐겁다. 나무와 풀과 곤충들, 새와 짐승들을 이웃으로 하면서 그들과 나의 시적 자아의 경계를 허물어가는 연습에 몰두하고 있다. 이런 것들과 나누는 대화는 유별나다. 꼼수가 없다. 그냥 진정성에 기초하고 있다. 신뢰가 전부이다. 우리 집 감나무에 금년 들어 푸른 감이 다닥다닥 열렸다. 나는 이 감나무에 열린 푸른 감이 너무 기특하다. 원래 이 감나무는 6년 전 집을 짓고 났을 때, 심은 것이었다. 그런데, 피들 피들 잎이 시들면서 성장이 신통하질 못했다. 그리고, 그해 겨울을 지내고 나니 줄기가 말라 버리고 싹이 나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감나무가 죽어 버린 것으로 알았다. 그렇게 2, 3년이 지나면서 죽어버린 감나무 뿌리에서 다시 여린 가지가 솟아나고, 몇 년이 지난 금년 봄엔 그렇게 자라 오른 감나무 가지가 제법 둥치를 이루고 푸른 감을 잔뜩 매달고 서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사지에서 살아 돌아온 소년병 같은 그 녀석이 너무나 대견해서 수시로 녀석에게 다가가 본다. 외출했다가 돌아올 때도 채마밭 둔덕의 녀석에게 가 본다. 뿌리 쪽에 두둑이 거름도 주고 둥치를 쓰다듬어 보기도 하는 것이다.
나무들과 나누는 대화는 티 없이 맑고 청명한 것이어서 눈도 밝게, 귀도 맑게 틔워준다. 딱새 한 마리, 땅강아지 한 마리, 배롱나무 한 그루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 그것들과 소통하는 것-그것이 시의 원초적인 모습이라는데 이견이 있을 수 없다. 나는 이제 ‘자연’편에 서서 그것들을 대변할 수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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