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한 금융완화’의 부작용과 일본경제의 과제 · 전망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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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한’ 일본의 금융정책
일본 금융정책의 사령탑으로 10년간 있었던 구로다 하루히코(黒田東彦) 일본(중앙)은행 총재가 2023년 4월 8일 물러났고 우에다 카즈오(植田和夫) 총재가 취임했다. 한국에서도 우에다 신임 총재에 대하여는 많이 보도되었으니만큼 그에 대한 소개는 생략하기로 한다. 여기서는 아베노믹스로 촉발된 ‘대담한 금융완화’라는 ‘특이한’ 일본의 금융정책에 대한 평가와 함께 일본경제의 과제와 전망에 관하여 다루어 보기로 한다.
대담한 금융완화는 2012년 12월 26일 제2차 아베 신조(安倍晋三) 내각의 출범(제1차 아베 내각은 2006년 9월 26일~2007년 9월 26일까지의 1년간)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당시는 ‘물가하락→기업수익 저하→임금수준 감소→구매력 약화→물가하락’이라는 ‘디플레이션의 악순환(deflation spiral)’이 일본경제 침체의 주요인으로 지적되고 있었다. 위에서 ‘특이한’ 이란 말을 사용한 것은 대부분 국가들의 중앙은행 역할이 물가상승이라는 인플레이션 ‘억제’를 내걸고 있는데 비해, 일본은행은 이와는 반대인 인플레이션 ‘유발’을 정책 목표로 내세웠다는 점을 부각하기 위함이다.
아베노믹스를 내놓을 당시에는 디플레이션의 악순환으로부터 벗어나려면 통화량을 늘려 인위적으로 인플레이션이 유발되도록 하여 경기를 회복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대세였다. 구로다 총재 이전의 시라카와 마사아키(白川方明) 총재 체제에서는 인위적으로 인플레이션을 일으키도록 하는 정책은 부작용이 많을 것이라며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정책 기조였다. 그러한 기조에 당시 아베 정권은 정책 전환을 하도록 압력을 가했고 결국 일본은행도 시가카와 총재가 물러나기 직전에 정권의 의도에 따르는 쪽으로 입장을 선회했다.
아베 정권은 자신들의 정책노선에 적극적으로 동조 입장을 취하는 구로다 총재를 임명했고, 구로다는 재임 10년 동안 일본은행의 독립성 유지보다는 아베 정권의 정책 의도에 부합하는 대담한 금융완화를 충실히 수행해 왔다. 언론이나 학계에서 구로다 체제의 금융정책 부작용에 대한 지적이 제기되었으나, 구로다는 물러나기 직전까지 “부작용보다는 긍정적 효과가 훨씬 더 크다”는 주장으로 일관했다. 과연 그의 말대로 대담한 금융완화 정책은 긍정적 효과가 부작용보다 훨씬 컸다고 할 수 있을까?
일본인 심리를 능란히 이용한 아베노믹스
대담한 금융완화 정책 또는 아베노믹스의 치적으로 내세우는 것이 주가가 상승하였고, 구인배율이 높아졌다는 점이다. 실제로 닛케이(日經)평균 주가는 아베노믹스 실시 직전인 2012년말 10,395에서 10년이 지난 2022년 12월 말 26,163으로 2.5배 상승했다. 또 유효 구인배율(=구인수÷구직자수)은 같은 10년 기간에 0.83명에서 1.35명으로 높아졌다. 겉으로 나타난 이들 수치만을 보면 그처럼 개선된 것으로 보일 수 있으나 그 속 내용을 들여다 보면 본연의 실태와는 거리가 많이 떨어져 있다.
주식가격의 상승에는 일본은행이 주식상품인 ETF(상장투자신탁)을 사들여 주가를 떠받치는 ‘관제주가(官製株価)’의 성격이 배어 있다. 일본은행의 ETF 보유는 2012년 1조엔에서 2022년 37조엔으로 대담한 금융완화 실시 후 37배나 늘어났다. 주식시장에 일본은행의 입김이 크게 작용하면 실물경제의 실태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폐해를 가져온다. 일본은행의 주식시장 개입이 실제의 기업가치와 주가 사이에 괴리를 가져왔다.
또한 유효 구인배율의 상승에는 그 이면에 비정규직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비정규직 고용자수는 2012년 1,816만명에서 2022년 2,101만명(전체 고용자의 36.9%)으로 늘어나고 있다(총무성「노동력조사」). 비정규직은 정규직 임금의 3분의 2정도 수준이며, 일본기업은 비정규직을 늘리고 임금 비용을 줄이면서 고용을 유지하는 정책을 취해왔다. 그 결과 일본의 실질 임금수준은 2020년을 100으로 하였을 때 대담한 금융완화 직전인 2012년 평균 105.9로부터 2021년 평균 100.6로 5%나 줄어들고 있다.
그럼에도 왜 일본에서는 대담한 금융완화 정책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 않는 것일까? 거기에는 일본인 특유의 국민성이 자리한다. 대개의 일본인은 급여가 많지 않다고 하더라도 오랫동안 안정적으로 일하기를 원한다. 한 회사에서 10년 이상 일한 사람의 비율을 보면 일본은 45.8%로 한국의 21.5%에 비해 두 배 이상 높게 나타난다(노동정책연구·연수기구 자료. 2019년 값). 요컨대 아베노믹스 또는 대담한 금융완화 정책은 이러한 일본인들의 심리 속성을 능란하게 이용한 정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대담한 금융완화 정책의 부작용
일본인들의 심리 정서를 감안하여 일본 정책당국이 대담한 금융완화를 실시하는데 대해 부외자(한국인)가 왈가왈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역사적 배경이나 국민 정서가 다른 한국으로서 일본의 대담한 금융완화와 같은 정책을 실시한다 하더라도 받아들여지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저 참견하기보다는 대담한 금융완화 정책에 대한 보다 객관적인 평가가 중요하다. 객관적인 데이터에 입각할 때 대담한 금융완화 정책의 실적이 성공적이라고 할 수 없는 면면들이 다방면에서 나타나고 있다.
우선, 대담한 금융완화의 가장 큰 부작용은 일본경제의 위상을 크게 하락시켰다는 점이다. 달러 표시 소득수준(일인당 국내총생산)은 2012년 49,175달러였으나 2022년에는 34,358달러로 대담한 금융완화 실시 10년 사이에 무려 1만 4,817달러나 줄어들었다(IMF통계). 국제비교 관점에서 일본경제의 위상이 그만큼 크게 낮아졌음을 의미한다. 일본의 달러 표시 소득수준 저하는 대담한 금융완화에 따른 엔화 약세 요인에 기인하고 있다. 1달러당 엔화 가치는 2012년 86엔에서 2022년 131엔으로 대폭 하락하고 있다.
다음으로, 대담한 금융완화 정책은 산업구조 개혁 추진에 그리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하는 점이다. 일본은 전통적으로 제조업에서 강점을 보여왔으나 최근 들어 제조업 생산성조차도 크게 하락했다. 일본 노동생산성본부에 따르면 제조업 생산성(취업자 일인당 부가가치액) 순위는 1990년 주요 37개국 중 일본이 1위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2018년에는 16위까지 낮아졌다(참고로 아베노믹스 실시 직전인 2012년에는 9위). 1955년 자민당이 창당되고 나서 일본은 대부분의 기간을 자민당이 집권하여 왔다. 자민당은 농어촌 지역을 주요 지지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농어촌 지역의 주민이나 생산성이 높지 않은 기업에 대한 재정지원도 인색하지 않은 편이다. 아베노믹스에서 그 재정지원의 상당부분은 국채 발행을 통해 이루어졌고 일본은행이 실질적으로 발행 국채의 많은 부분을 인수해 온 형국이다. 요컨대, 대담한 금융완화(또는 일본은행의 실질적인 국채 인수)는 생산성이 높은 쪽으로 산업구조를 바꾸어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데 일조했다.
세 번째는, 금융정책에 있어 중요한 변수의 하나인 이자율이 정책 변수로서 기능하지 못하도록 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는 점이다. 낮은 금리 유지는 국채 발행 용이성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일본은행은 낮은 이자율을 유지하기 위해 장기 이자율의 기준 역할을 하는 10년물 국채 금리를 낮게 책정해 놓고 그 금리(이자율) 수준이 유지되도록 하기 위해 10년물 국채를 무제한 매입하는 YCC(Yield Curve Control)라는 비정상적인 정책을 취했다. YCC 정책은 이자율이 자금 거래의 가격 변수로서 작동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자금시장의 왜곡을 초래한다는 부작용이 있다.
마지막으로, 대담한 금융완화에 따른 국가채무의 천문학적 증대를 용인하는 방향으로 유도했다는 점이다. 대담한 금융완화라는 엄청난 통화량 증대는 이자율을 낮추는 쪽으로 작용했다. 이자율이 낮다는 것은 국채 발행을 늘려도 그 이자비용이 별반 늘어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국채 발행에 대한 거부감을 낮추게 한다. 아래 그림은 일본의 보통국채잔액, 금리, 이자지불비용 추이를 보이고 있다.
<그림>에서 보듯이 2012년 이후인 아베노믹스 기간 중에도 국채잔액은 크게 늘어났지만 이자지불비용은 늘어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늘어난 국채의 상환은 장래세대의 몫이 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대담한 금융완화는 기성세대가 장래세대의 빚을 늘리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일본경제의 과제와 전망
이상의 대담한 금융완화의 부작용으로부터 일본 경제의 과제가 부상된다.
우선, 경제 위상 제고의 필요성이다. 엔화 가치의 하락(환률 상승)은 일시적으로 일본 수출기업의 이익 증대를 가져올 수 있겠지만 한편으로 달러 표시 소득수준을 저하시켜 자국의 경제위상을 낮추게 된다. 즉 일본으로서는 향후 어떻게 자국의 경제위상을 높여갈 것인가 하는 과제가 가로놓여 있다. 경제위상을 높여가기 위해 엔화 가치가 낮아지지 않도록 하는 정책이 있어야 하겠지만 신임 우에다 총재는 대담한 금융완화가 틀리지 않았다고 보고 있어 당분간 그동안의 정책을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이는 역으로 말하면 달러 표시 일인당 국민소득으로 보았을 때 일본의 경제위상이 상당 기간 올라가지 않을 것임을 뜻한다고 할 것이다.
다음으로, 일본경제의 근본적인 난제로서 생산성이 높은 쪽으로 산업구조 개혁을 이루어갈 수 있을 지가 큰 과제로 남아 있다. 일본은 아날로그성 소재·부품·장비·기계 산업에서 강점을 발휘하는 일면이 있지만 디지털화 추진에서는 다른 주요 국가에 비해 크게 뒤져 있다. 일본에서 아날로그 지향성이 강한 것은 역사 및 문화적 배경과도 관련이 깊기 때문에 디지털화 추진으로 일본 기업이 세계를 리드하는 현상은 그리 대두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일본의 경제성장률이 낮은 것도 글로벌 디지털 기업과 같은 높은 부가가치를 가져오는 성장동력이 부족하다는 점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자민당이 정권을 유지하려는 차원에서 보면 농어촌 지역의 생산성이 낮은 기업들을 도산시키거나 하는 정책은 취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세 번째는, 이자율(금리)이 경제정책 변수로서 기능하게 해야 한다는 과제이다. 구로다 체제에서와 같이 통화량의 조절로 낮은 이자율이 유지되도록 하는 YCC 정책은 자금 거래에서 가격기능을 저해하는 ‘절름발이 금융정책’이 된다. 다른 국가(예, 미국)가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해 금리를 올리는데 일본이 계속 낮은 금리를 유지한다는 것은 엔화 매각이나 달러화 매입을 가져와 엔화 가치를 낮추는 쪽으로 유인한다. 이는 곧 일본경제의 위상 저하를 가져오게 된다. 우에다 신임 총재는 YCC 정책의 수정을 시사하고 있어 어떠한 형태로든 그 수정이 가해질 여지가 있겠다 싶다.
마지막으로, 국가채무를 줄여 재정경직성을 낮추고 장래세대의 부담을 줄여야 한다는 난제를 안고 있다. 국가채무를 줄이기 위해서는 정부가 신규 국채 발행도 줄여야 하겠지만 기존 일본은행이 보유하는 국채도 줄여 나아가야 한다. 2022년 9월말 시점에서 일본은행은 국채잔액 1,066조엔 중 50.3%나 보유하고 있다(일본은행 「자금순환통계」). 경제성장률이 낮아 조세수입이 적고 저출산·고령화로 사회보장 복지 지출이 크게 늘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신규 국채 발행을 줄여가며 기존 발행 국채도 소각해가는 정책 운용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일본은행이 보유하는 기존 발행 국채를 매각하게 되면 국채가격 하락과 이자율 상승 그리고 국채 이자지불비용 증대로 재정경직성의 심화를 가져오게 된다. 방대한 국가채무를 떠안고 있는 상황에서 재정경직성을 해소하기 위해 조세 부담 강화로 세수입을 늘리게 된다면 장래세대는 세부담 증대와 함께 국채 상환비용이 가중되는 이중 부담을 안게 된다. 이는 신임 우에다 총재의 재임 기간 중에 해소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며 일본 정책당국으로서 장기간에 걸쳐 대처해야 하는 과제가 된다.
유의해야 할 점
유의해야 할 것은 일본의 아날로그 성향이 그저 고리타분한 데에 머무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일본은 일본대로 어떻게 경제활성화를 도모할 것인지를 고민하고 있다. 최근 세계 1위 반도체 수탁생산기업인 대만의 TSMC가 구마모토 지역에 공장을 건설하고 있다. 그것을 계기로 TSMC 반도체 생산을 뒷받침하는 소재·부품·장비·기계 부문 및 EV(전기자동차)용 파워반도체 분야의 일본 기업들이 TSMC 공장 주변으로 대거 모여들고 있다. 구마모토 지역 반도체 공업단지 조성은 세계를 선도하는 기업과 일본 기업과의 협업으로 일본이 경제 활력의 진로를 찾고 있다는 것을 상징한다.
나아가 일본은 한국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지역 문화유산, 음식, 마을축제(마츠리)와 같은 각 지역의 유형·무형 고유 자산이 풍부하게 남아 있고 이를 계속 발전시켜 나아간다고 하는 강점을 지니고 있다. 그 자산이 엄청난 관광자원의 역할을 하고 있어 일년에 수천만 명의 관광객을 모여들게 하고 이들 관광객들의 소비 유발로 경제활성화를 이루어가려는 전략도 세우고 있다. 지역의 아날로그 문화는 지속성을 그 특성으로 하기 때문에 대규모 관광수요는 꾸준히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곧 일본이 비록 디지털화는 뒤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생활기반이 쉽게 거꾸러지거나 하지는 않는다는 속성도 동시에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
<ifs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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