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청 시인의 문학산책 <65> 시인은 언제 진짜 시를 만나는가?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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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내가 서 있었다. 겨우 겨우 서서, 무너진
다리를 생각하고 있었다.
삐걱이다 무너진 날들을,
툭, 툭, 끊어져 교각만 남은 날들을,
거기 뒹구는 못과 망치, 뻰치와 톱,
그리고 녹슨 자(尺) 하나,
툭, 툭 끊어져 교각만 남은 거기,
사내는 서 있었다.
끊어진 다리들이 희미한 교각을 드러낸 채
잊혀 진 거기, 사내가 서 있었다.
못과 망치, 뻰치와 톱,
그리고 녹슨 자 하나, 희미한 거기.
한 사내가 서 있었다.
이 건 청 -「일각수가 있는 풍경」
일각수(一角獸)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일각수를 희망이 끊긴 자리에서 만난다. 세상 잡사를 벗어나 자유인으로 서려고 노력할 때 홀연히 나타난 그를 본다. 희망의 자리로 가는 다리가 끊긴 위태로운 단애를 조심스레 응시하고 있을 때에만 그 일각수의 윤곽이 보인다. 욕망을 따라 모여들었던 세상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져 가고 난 세상에 밤이 오고, 달도 별도 뜨지 않는 10시, 11시 아니면 12시나 1시쯤, 어둠이 치밀해진 낙망의 자리에 그 짐승은 조심스레 모습을 나타낸다. 일각수는 세상사에 대한 집념, 세속적 명망을 기리는 사람들과는 관계가 없다.
"무시무시한 고독 속에서 죽었구나! 29세가 되도록 시도 발표해 본 적이 없이". 이것은 정지용이 윤동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서문에 얹은 글의 일부이다. 윤동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1945년 2월 16일 시인이 일제의 후쿠오까 감옥에서 옥사한 후 1948년 1월 30일에 간행되었다. 그러니까 운동주의 시편들은 윤동주가 작고한 1945년 2월 이전에 쓴 것들이다. 그는 그가 쓴 시가 독자에게 읽힐 것을 염두에 두지 않고 시를 쓴 것이다.
윤동주는 발표를 염두에 두지 않고 그냥 시를 썼다. 그러니까 그에게는 시인이라는 명칭에 연연하거나 세속적 명예 앞에서 얼쩡거리는 속됨이 없다. 그냥 시를 쓴 것이고 절실해서 쓴 것이었다. 지용이 "무시무시한 고독" 이라고 지적한 것은 그래서 적절한 말이다. 시인이 말을 획득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그가 표현에 대한 강한 욕구를 지니고 있을 때이다. 참을 수 없는 자아의 자기 구현 욕구를 수렴해 담을 수 있는 최선의 말을 선택하고 선택된 말들을 배열함으로써 한편의 시를 이루어가는 과정이라는 것은 거의가 순간적 직관에 의한 것이 될 경우가 대부분이다. 시인은 순간적 직관 속에 생명적 필연을 담아내는 사람이다.
운동주는 언제 빛을 볼지도 모르는 시를 최선의 공을 들여 썼다. 그의 시는 그의 살아 있음의 증표였던 것이다. 시인이 공들여 말을 선택 배열하고 공고한 구조를 만들어 가는 것은 숙명적으로 누군가에게 읽혀질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언어로 표현된다는 그 자체는 언어의 발신행위인 셈이며 이 발신은 어딘가에 있을 수신자를 향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발신행위 즉, 작품의 발표가 불가능한 상황(윤동주의 경우가 그랬다) 속에서 시에 정진한다는 것은 참으로 고독한 일이며 "무시무시한 고독"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무시무시한 고독" 속으로 걸어 들어가 시와 만나고 싶다. 진짜 시와 만나고 싶은 것이다. 끊어지고 무너진 것들의 잔해만 앙상히 서 있는 자리, 이젠 돌아갈 길조차도 찾을 수 없는 자리에 서 있다고 인식될 때만 자기 실존을 바라볼 수 있다. 그리고. 위태로운 자기 실존에 발 딛고 선 사람만 구원의 사다리를 찾을 수 있다. 존재의 끝에 겨우 버티고 선 교각처럼, 언젠가 다시 놓여질지도 모를 상판(上板)을 기다리게 될 것이다.
‘못과 망치, 뻰치와 톱, 그리고 녹슨 자 하나’ 이것이 존재자인 내가 발견할 수 있는 나 자신에 한계이며 실존 인식이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한다? 암담하지만 이 물음에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다. 나의 시 「일각수가 있는 풍경」은 대답의 시가 아니다. 물음의 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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