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온호황’ 구조에서 탈출하는 일본 경제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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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진일퇴’를 보여준 2023년
일본 내각부가 2월 15일 발표한 2023년 4분기(10~12월) 실질 GDP가 전기 대비 –.1%를 기록해 2분기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인바운드 수요를 포함한 실질 수출은 전기 대비 2.6% 성장했지만, 실질 개인소비가 –.2%하락했고, 실질 설비투자는 예상과 달리 역성장(-0.1%)하면서 3분기 연속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반면, 지난 분기에 부진했던 실질 재고투자의 성장기여도는 0.0%를 기록해 예상보다 반등이 크지 않았고, 오히려 실질 수입은 1.7%로 크게 증가하여 전체 성장률을 끌어내렸다. 4분기만 따로 떼서 보면일본 경제는 인바운드 수요와 대미 수출 호조에 의해 간신히 지탱되고 있는 취약한 상태로 보인다. 그래도 2023년 한 해를 통틀어보면 일본의 실질 GDP는 전년 대비 1.9%, 명목 GDP는 무려 5.7%나 상승했다. 상고하저(上高下低)의 뚜렷한 특징이 보였는데, 특히 2분기 실질 GDP가 연율 환산 6.0%라는 깜짝 성장을 달성하면서, 1998년 이후 25년 만에 일본이 한국의 경제성장률을 웃돌 것이라는 전망이 제시되었다. 결과적으로 한국은행이 1월에 발표한 한국의 실질 GDP 성장률은 일본보다 낮은 1.4%였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일한(日韓) 역전’보다 ‘일독(日獨) 역전’ 뉴스가 더 크게 보도되었다. 1달러당 152엔 수준까지 떨어진 이른바 ‘슈퍼 엔저’ 현상으로 인해, 달러화로 환산한 명목 GDP에서 일본(4조 2,106달러)은 독일(4조 2,561억 달러)에 추월 당해 세계 4위로 밀려났다. 일본 입장에서는 낭보(朗報)와 비보(悲報)가 뒤섞인 2023년이었다.
다만 중국에 세계 2위 자리를 내주었던 지난 2010년 때와는 달리, ‘일독 역전’을 받아들이는 일본의 반응은 비교적 차분한 편이다. 2026년에는 인도의 GDP가 일본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일본에서는 총 GDP의 순위에 더 이상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인식이 자리잡기 시작했다.이보다 더 큰 관심은, 과연 디플레이션 마인드가 불식되었는지? 이번에도 기업들만 호황을 누리다 끝나는 것은 아닌지? 등이다. 그도 그럴 것이 시시각각 발표되는 경제 지표들이 매우 모순적이기 때문이다. 주가는 34년 전 거품 경제 때의 최고기록(3만 8,915엔)을 뛰어넘었고, 도요타를 비롯한 대기업의 영업이익은 과거 최고 수준이다. 그러나, 실질임금은 2022년 4월 이후 현재까지 계속 감소하고 있고, 이 때문에 소비는 부진하고 내수는 제로 성장에 그치고 있다.
‘저온호황’구조의 균열
‘잃어버린 30년’이라는 어감이 주는 이미지와 달리 지난 30년간 일본 경제가 침체만을 겪어 온 것은 아니다. 놀랍게도 전후 일본이 경험한 가장 긴 호황인 이자나미 경기(2002년 1월~2008년 2월, 73개월)와 두 번째로 긴 아베노믹스 경기(2012년 11월~2018년 10월, 71개월)가 ‘잃어버린 30년’이라는 기간 속에 포함되어 있다. 좀 더 엄밀히 말하면 버블 붕괴 이후 지금까지 일본 경제는 총 5번의 호황과 불황을 겪어왔다(제12 순환부터 제16 순환까지). 즉 잃어버린 30년이라는 시간 속에서 엄연히 다섯 번의 비즈니스 사이클이 발생했고, 그 중에서 두 번은 70개월이 넘는 장기 호황이었던 셈이다.
최근 일본 경제가 호황을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첫 번째 이유는 일본 경제가 2020년 5월부터 제17 순환의 경기 확장국면에 있기 때문이다.즉 일본 경제가 비즈니스 사이클상으로 정말로호황기에 있다는 뜻이다. 두 번째 이유는 코로나19 회복이 더딘 탓에 발생한 착시효과이다. 코로나19의 팬데믹으로 주요 선진국 경제는 2020년에역성장을 기록한 이후 2021~22년에 걸쳐 반등에성공했다. 그러나, 일본은 2023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명목, 실질 GDP 모두 2019년 수준을 회복할수 있었다. 다른 나라보다 1~2년 뒤처진 셈이다.그런데 이 두 가지 이유만으로 현재 일본 경제의회복을 전부 설명할 수는 없다.이
두 가지 설명에 더해서 좀 더 구조적인 측면에서 반등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기업의 환경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엔고와 자본수익률의 감소를 피해 많은 일본 기업들은 해외에 생산거점을 만들기 시작했다. 현재 일본은 2만 5천 개 이상의 기업이 해외에 진출해 있으며, 이 중 비제조업이57%, 제조업은 43%인데, 일본 전체 제조업 생산의 1/4 이상은 해외에서 생산되고 있다. 그런데 아베노믹스가 본격화하면서 엔저가 시작되자 해외에 진출한 기업들은 별다른 노력 없이도 손쉽게 환차익을 얻을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영업이익이 개선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투자수익률과 노동생산성이 낮은 국내에서는 설비투자나 임금상승의 유인이 크지 않은 탓에, 기업들은 벌어 들인 수익을 해외에 재투자하거나 현금(달러)으로 쌓아 두게 되었다. 결국 엔저로 인해 기업(정확하게는 수출기업과 해외에 진출한 기업)은 호황이지만, 국내의 설비투자는 늘지 않고, 임금상승의 모멘텀이 약한 탓에 민간 소비도 맥을 못 추는 ‘저온호황’이 발생하게 되었다.71개월에 걸친 아베노믹스 경기가 실감할 수 없는 호황으로 끝난 것도 바로 이러한 구조적인 문제 문이었다.
그런데 최근 이러한 ‘저온호황’ 구조에 조금씩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우선 기업환경의 변화로 국내 설비투자가 눈에 띄게 늘었다. 2023년 명목 설비투자 금액은 100조 엔을 넘겼는데,명목 설비투자 금액이 100조 엔을 넘어선 것은 1991년 이후 32년 만이다. 미중 전략경쟁이 심화하는 가운데 일본이 일정부분 반사이익을 누리면서 이러한 변화가 촉발되었고 볼 수 있다. TSMC를 비롯해 마이크론, 삼성전자 등 글로벌 반도체기업이 앞다투어 일본에 공장과 연구소를 신설하고, 일본 기업들이 생산시설을 국내로 이전하는 리쇼어링도 눈에 띄게 늘었다.
기업들은 임금인상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2023년 춘투의 임금인상률은 3.6%로 30년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했고, 올해도 4%전후의 임금인상이 예상된다. 기업은 호황이지만 가계는 불황인 ‘저온호황’이 드디어 막을 내릴 기미가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다만 1인당 현금 급여총액은 1%대 상승에 그치는 바람에 물가수준을 감안한 실질임금은 계속 감소하고 있다. 사실 일본 노동자의 70%는 중소기업에 다니고 있고, 중소기업은 춘투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의 임금인상률과 전체 근로자의 임금인상률 사이에는 갭이 존재한다. 또 37%에 이르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낮은 임금수준이 임금상승의 발목을 잡는 측면도 있다. 결국, 지금보다물가상승률이 낮아질 올 하반기는 되어야 실질임금이 플러스로 돌아설 예정이다.
정부 주도의 제도개선
외부충격이라는 측면에서 기업환경의 변화는 정부 주도의 제도개선을 통해서도 촉발되었다. 전통적인 일본의 기업지배구조는 의문투성이였다. 기업의 주인인 주주는 ‘불만 없는 착한 주주(ものを言わぬ株主)’로 불릴 정도로 권리가 약했다. 주주총회는유명무실했고, 종업원 중에 내부 승진한 경영진이 강한 경영권을 행사했다. 법인 주주들은 상호주식보유로 경영권을 방어하는 데에만 급급했고, 채권자이자 대주주인 은행이 기업 경영에 간섭을 하기도 했다. 경영진은 임기 동안 기업의 덩치를 키우는데만 관심이 있을 뿐 주가의 상승에는 딱히 관심이 없었고, 법인 주주들도 경영권 방어 이외에 주가의 상승은 큰 관심 사항이 아니었다. 전통적인 일본의기업지배구조하에서 주가 상승은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일본의 독특한 기업지배구조는 1940년대에 만들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에 돌입하면서 일본 정부는 국가 역량을 총동원하는 과정에서 주식회사의 이윤 동기를 부정하고 전쟁 승리라는 국가 목표를 우선시했다. 그 결과 주주총회는 유명무실화 되고, 주주들의 배당은 축소되었다. 기업의 자금조달은 주식이 아닌 은행차입에 의존하게 되었고, 정부는 금융시스템을 이용해 기업 전체를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전쟁 이후에도 대장성을 중심으로 한 경제관료들은 전시기에 만들어진 통제적인 금융시스템을 더욱 강화하였고, 이는 일본경제에 압축적인 성장이라는 과실을 안겨주었다.이러한 시스템이 붕괴하기 시작한 것은 50년 뒤인 1997년 은행위기 때였다. 일본 정부는 금융 부문의 규제 완화와 함께, 통제적 금융시스템의 상징이었던 대장성을 재무성과 금융청으로 분할했다. 부실채권을 정리하고 은행 시스템을 정상화하는데 꼬박 10년이 걸렸고, 2007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금융기관의 부실채권 비율이 1.5%까지 감소했다.
그러나 일본 경제에 불운이 계속되었다.2008~09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2011년 동일본대지진을 겪으면서 ‘잃어버린 10년’은 ‘잃어버린 20년’으로 연장되었다.‘잃어버린 20년’을 끝낸 것은 아베노믹스였다. 초기 아베노믹스는 양적완화로 인한 엔저 효과만 부각되었지만, 제도개선이라는 측면에서도 중요한변화가 시작되었다. 바로 2014년에 도입된 스튜어드십 코드와 기업 거버넌스 코드였다. 이를 통해 기관투자자들이 적극적으로 기업 경영에 관여하게되고, 기업은 주주 이익의 환원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환경이 마련되었다. 1990년 대말에 시작된 제도기능하던 통제적인 금융제도와 전통적인 기업지배구조를 대신할 새로운 질서가 탄생하게 되었다.
제도개선의 효과는 즉각 나타났다. 최근 10년간(2014~24년) 독립사외이사를 선임하는 기업은 47%에서 100%(프라임 기준)로 늘었다. 적극적인 행동주의 펀드도 같은 기간 7개에서 70개로 10배나 증가했다. 아베노믹스가 본격화된 2013년을 기준으로주가는 4배 이상, 최근 1년 사이에는 무려 50% 가까이 상승했다. 양적완화와 엔저에 따른 외국인 투자자 유입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상승 추세였다.
2023년에는 좀 더 노골적인 형태로 도쿄증권거래소의 하향식 개혁이 실시되었다. 저평가 된 기업을 중심으로 적극적인 자사주 매입과 소각을 요구해 작년 5월까지 4조 엔의 주식이 정리되면서 배당이 늘어나 주가를 끌어올렸다. 이러한 기업지배구조 개선 효과는 외국인 투자자들은 물론 국내 개인투자자들을 주식시장으로 끌어들이는 효과가 있었다.
정책제언
이웃 일본의 성공은 또다시 우리에게 ‘정면교사’가 되었다. 정부는 일본을 참고해 2월 26일에 증시밸류업 프로그램 방안을 발표했다. 한국 증시 저평가 현상인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결을 위해 상장기업들이 주주환원 정책을 내도록 하고, 이를 유도하기 위해 당국이 관련 상품을 개발하고 인센티브를 주기로 하였다.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은 이번 밸류업 프로그램이 성공하기 위해 다음의 네 가지 사항이 실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첫 번째, 기업가치 제고 계획을 별도 보고서로 제출하도록 할 것. 두 번째, 기업 밸류업 주체가 이사회란 점을 분명히 할 것. 세 번째, 금융 당국은 국내외 장기투자자들과 수시로 소통할 것. 네 번째, 최소 3~5년 중장기적으로 추진할 것 등이다.
그런데 이 네 가지 사항에 더해 반드시 고려해야 할 것이 하나 더 있다. 우리의 경우 일본과 달리 주가 상승에 따른 상속세 부담이 커서 기업이 주주환원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는 특징이 있다는 점이다. 지난 1월 윤석열 대통령이 민생토론회에서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법의 하나로 상속세 인하를 거론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일본도 한국만큼 상속세가 높은 편이지만, 사업 승계 시 세제 특례 조치 등을 통해 실제 세 부담은 우리보다 적다. 게다가 대기업의 경우 우리처럼 창업자 가문이 기업 내에서 지배적인 지위를 유지하는 경우도 많지 않다. 시가총액 200위권 대기업의 경우, 내부 승진을 통한 전문경영인이 경영을 담당하는 경우가 80%에 이른다. 이렇듯 우리와 일본의 기업환경이 다르다는 점은 이번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고려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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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세종연구소가 발간한 [정세와 정책 2024년 3월호 (통권 372호)](2024.3.4)에 실린 것으로 연구소의 동의를 얻어 게재합니다.<편집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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