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쿠바 수교 이후 대 쿠바전략을 생각한다 <2> 수교의 ‘숨은 일등 공신들’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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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부 발표와 언론 보도 등을 종합하면 한-쿠바 수교를 향한 정부 간 공식적 교류 협력은 ‘1999년 10월 김대중 정부 시절 제54차 유엔총회에서 <쿠바에 대한 미국의 금수 조치 해제촉구결의안>에 종전 입장(기권)을 변경, 찬성표를 던지고 다음 해 처음으로 쿠바에 수교를 제안한 것을 계기로 쿠바의 우리나라에 대한 태도 변화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7)
쿠바 정부는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5년 9월 아바나에 ‘KOTRA 무역관’ 개설을 허용했다. 이명박 정부도 쿠바에 영사 관계 수립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리고 2016년 6월 5일 박근혜 정부의 윤병세 외교부 장관이 쿠바를 공식 방문하여 한-쿠바 최초의 외교당국자 간 대화가 시작되었다. 이후 2018년 5월 10일 문재인 정부의 강경화 장관이 쿠바를 방문 외교장관 회담을 했다. 그리고 마침내 2023년 5월 11일 윤석열 정부의 박진 장관에 의한 한-쿠바 수교 협상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이러한 공식적인 외교당국자 간 접촉보다 훨씬 먼저부터 알게 모르게 이루어져 온 민간 차원의 교류 협력이 축적되고 있었기에 그와 같은 외교당국자 간 전격적인 대화도 가능할 수 있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민간 교류 협력으로 깔린 레일을 타고 외교당국 간 수교 협상 열차가 순조롭게 달릴 수 있게 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1959년 쿠바혁명으로 외교 관계가 단절된 이후 막혀버린 한국과 쿠바 간 교류 협력의 물꼬가 터지는 역사적 사건이 1995년에 일어났다. 당시 김영삼 정부는 광복 50주년을 기념하는 ‘세계한민족축전’을 개최했다. 이때 정부는 쿠바 한인 대표로 쿠바 한인 2세인 ‘헤로니모 임(Jeronimo Lim Kim)’을 초청했다. 그는 ‘1905년 멕시코 에네켄(가시돋친 용설란) 농장으로 돈 벌기 위해 바다를 건너온 1,031명의 동포 가운데 1921년 쿠바로 건너간 274명의 쿠바 한인 1세대인 독립운동가인 임천택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그는 아바나 법대 동기생인 카스트로와 같이 쿠바혁명을 주도했으며, 혁명 후에는 카스트로 정부에서 체 게바라 산업부 장관과 같이 차관을 지낸 쿠바 사회에서도 영향력 있는 거물급 ‘한국계 쿠바인 (꼬레아노 쿠바노스, Coreano Cubanos)’ 지도자였다. 김영삼 정부는 1997년에는 그의 선친 임천택에 대해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기도 했다.8)1995년 쿠바 한인 후손들 가운데 처음으로 고국 땅을 밟은 것을 계기로 헤로니모 임은 잊어버린 쿠바 한인의 정체성을 되찾고 멀어진 쿠바 한인과 고국의 거리를 다시 좁히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9)
그는 쿠바 전역을 다니며 처음으로 쿠바 한인 후손 실태를 파악하고, 10) 쿠바 한인 이민사를 정리한 <쿠바의 한인들>이란 책자 발간을 지원하고, <쿠바한인후손회>를 재건하고, 쿠바 한인과 후손들에게 한국 역사와 문화, 그리고 한글을 가르치는 학교를 설립 운영하여 쿠바 아바나에 <쿠바한인후손문화원> 설립의 기초를 마련했다.11) 그는 북한의 영향력이 큰 쿠바 정치 현실에서 한국계 쿠바인으로서 정체성을 되찾고 쿠바 사회에 한국과 한국인의 존재와 뿌리를 알리는 한국 역사문화 거점으로서 선구자적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쿠바를 한국으로 이끄는 한-쿠바 수교의 쿠바 쪽 레일을 까는 역사적 출발점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헤로니모 임은 한-쿠바 수교의 첫 번째 숨은 일등 공신이었다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두 번째의 숨은 일등 공신은 2003년 5월 21일부터 6월 1일까지 쿠바 아바나에서 열린 ‘세계유기농대회’에 참석하고 쿠바 유기농 실태를 시찰하고 돌아온 이태근 회장이 이끄는 ‘환경농업단체연합회(환농연) 1차 쿠바 유기농 연수단 (15명)의 쿠바 단체 방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1차 연수단에는 김성훈 중앙대 교수(전 농림부장관)가 자문으로 참여했다. 귀국 후 발표한 이 회장과 김 교수의 쿠바 유기농을 소개하는 글들은12)국내 유기농업계에 때아닌 쿠바 유기농 연수 바람을 불러왔다. 특히 <오마이뉴스(2003.12)>는 김 교수와의 대담기사에서 “김 교수가 ‘쿠바에서 한국농업의 대안은 물론 인류 미래의 희망을 보았다’고 말한 바 있다”고 전하고 “‘쿠바는 영아 사망률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낮은 데다 43%에 불과하던 식량자급률은 100%에 육박한다’고 설명했다.”고 전했다. <신동아(2004.10)>에 기고한 글에서도 김 교수는 “식량자급도 이루고 환경생태계를 획기적으로 개선한 쿠바 유기농업혁명으로 쿠바는 세계 친환경, 지속가능 농업의 메카로 확실하게 자리 잡았다며 쿠바 유기농업을 남북한이 벤치마킹하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후 인터넷에는 ‘유기농업을 통한 식량자급 달성,’ ‘전 국토의 유기 농업화,’ ‘세계적인 유기농업의 메카,’ ‘인류역사상 최대의 실험,’ ‘쿠바 유기농업은 인류 미래의 희망’ 등등 쿠바 유기농업에 대한 찬사 일색의 글들이 떠돌기 시작했다.
2006년 3월 주 아르헨티나 대사직을 마치고 귀국 후 ‘농업통상대사(대외직명대사)’를 수행하고 있던 나는 대사 시절 들었던 쿠바의 경제적 현실과 다른 이야기들이 난무하고 있는 우리 현실을 접하면서 김 교수를 비롯한 언론들이 우후준순처럼 전하는 쿠바 유기농 이야기들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사실인가? 의문이 들어 쿠바 유기농업의 실체적 진실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던 차 2006년 11월 환농연이 주관하는 2차 쿠바 유기농 연수단 22명과 함께 자문으로 쿠바를 방문하게 되었다. 13)
당시 현지에서 만난 쿠바인 관광 가이드는 유기농 때문에 밀려드는 한국인 단체 방문객들로 쿠바가 때아닌 관광특수를 맞고 있다고 했다. 우리말을 유창하게 하는 그는 은퇴한 전직 외교공무원 출신으로 주 북한 쿠바 대사관 근무 중 김일성 대학에서 한글을 배웠다고 했다. 갑자기 쿠바를 찾는 한국인이 증가하면서 통역 가이드 일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쿠바 유기농 이야기에 대한 진위 여부를 떠나 2003년 5월의 환농연 1차 유기농 연수단의 쿠바 방문으로 시작된 한국인 ‘쿠바 단체 관광러시’는 한-쿠바 간 민간 교류의 물꼬를 트는 또 다른 역사적 순간이었다는 점에서 한-쿠바 수교의 숨은 일등 공신이 아닌가 생각한다.
세 번째는 숨은 일등 공신으로는 2005년 9월의 KOTRA 아바나무역관 개설과 ‘HD현대중공업’의 쿠바 발전설비공사 수주가 떠오른다. 2006년 11월 아바나에서 만난 조영수 초대 아바나 무역관장은 연수단을 찾아와 개설 이후 지난 1년 반 동안 온몸으로 체험한 쿠바살이의 고달픈 실상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강의 중에도 쿠바 보안요원의 감시를 의식 목소리를 낮추며 도청 등에 무척 신경을 썼다. 쌀 등 식량은 가끔 멕시코 출장길에 구입해 온다고 했다. 특강 말미에 가장 큰 애로사항이 한국 음식을 먹지 못하는 것이란 말에 연수 단원들이 가방을 털어 김치며 라면, 고추장, 과자류 등 가지고 있던 한국 음식들을 모아 선물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무역관 개설 이후 한-쿠바 간 경제교류가 조용하게 확대되어 왔다. 한-쿠바 간에는 외교 관계가 없었음에도 2013년에는 KOTRA와 쿠바상공회의소가 협력양해각서를 체결하였으며, 2016년에는 쿠바상공회의소와 대한상공회의소 및 전경련이 교류 협력을 위한 MOU 체결로 경제계 간 민간경제협력위원회가 구성되어 양국 기업 간 교류 협력이 확대되었다. 아바나 KOTRA 무역관 초대 관장은 한-쿠바 경제교류의 물꼬를 튼 또 하나의 숨은 일등공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2006년 쿠바 방문길에서 만난 쿠바인 가이드는 한국 기업이 쿠바 전력난 해결에 큰 도움을 주었다고 말했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무슨 이야기인가 알아보니 2005년 쿠바는 만성적 전력난 해소를 위한 발전설비혁신사업에 대한 국제 입찰을 실시했다. 그런데 미수교국인 한국의 HD현대중공업이 쿠바 환경에 알맞은 원거리 송전선이 필요 없고, 컨테이너 박스 안에 발전설비 장착이 가능한 소규모 분산형 ‘이동식 발전설비’(PPS, Packaged Power Station)‘라는 매우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내로라하는 글로벌 기업을 제치고 2005년 9월 1차로 총 244기 발전설비 총 3억 3,000만 달러 사업을 수주했다. 이후 2차, 3차 입찰도 모두 수주 총 544기, 7억 2,000만 달러 규모의 사업을 수주했다고 한다. 이는 쿠바 전체 전력 수요의 30%가 넘는 발전량이었다고 한다.
HD 현대중공업은 2007년 12월까지 쿠바 전 지역에 전력을 공급하는 공사를 신속하게 추진하였다. 당시 카스트로는 공사 현장을 직접 찾아 HD현대중공업이 쉬지 않고 공사를 추진하는 것을 보고 HD현대중공업이 쿠바 ‘에너지 혁명’을 가능하게 했다며 찬사와 함께 “쿠바도 한국을 배워햐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심지어 쿠바 중앙은행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 2007년 1월 10페소 화폐에 HD현대중공업이 개발 설치한 ‘이동식 발전설비시설’ 도안을 그려 넣기도 했다. HD현대중공업의 성공적인 발전설비 공사는 쿠바 사회에 한국의 선진화된 기술력을 알리는 중요한 전기가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KOTRA와 HD현대중공업은 한-쿠바 경제 협력의 물꼬를 튼 숨은 일등 공신이었다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는 한-쿠바 수교의 숨은 일등 공신은 누가 무어라 해도 쿠바 사회의 한인 후손 4, 5세대로 구성된 한국계 쿠바인과 쿠바 젊은이들을 강타한 대형 허리케인 ‘한류의 힘’이 아닌가 생각한다. 2012년 7월 싸이의 ‘강남스타일’ 이후 BTS, 블랙핑크 등으로 이어지는 K-팝의 광풍은 K-드리마, K-컬쳐 등 다방면으로 확장되어나가며 쿠바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2015년 5월 ‘아르코(ArtCor)’라는 한국문화동호회까지 탄생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쿠바 사회의 한류 열풍의 뒤에는 2014년 8월 중미 민주평화통일자문위원회와 재외동포재단의 후원으로 문을 연 ‘호세 마르티 한국-쿠바 문화클럽 (한인후손문화원)’의 숨은 노력이 있었다. 이는 1995년 쿠바 한국인 후손으로 고국을 처음 방문했던 ‘헤로니모 임’의 쿠바 한인 후손들의 잃어버린 뿌리를 되찾기 위한 선구자적인 노력으로 시작되었다. 한인후손문화원은 쿠바 사회에 한국문화를 체계적으로 알리고 한글을 전파하는 등 쿠바 사회 내 한류전파의 거점 역할을 수행했다. 심지어 쿠바 아바나 국립대학은 한인후손문화원과 협력, 2012년 10월부터 한국어 강좌를 개설 운영하기도 했다. 그렇게 시작된 한-쿠바 문화 교류는 오페라, 발레, 영화, 미술, 도서, 체육 등으로 확장되면서 가랑비에 옷 젖듯 쿠바 사회에 조용히 스며들었다.
지난 10 수년간 한국인 후손 6세대의 한국계 쿠바인을 비롯한 한국문화에 열광하는 쿠바 젊은이들이 늘어가면서 이들은 북한과 형제국인 쿠바와 한국 간 수교를 막아온 ‘정치 장벽’마저 무너뜨리고 한국과의 수교를 열망하고 촉구하는 사회적 힘으로까지 성장한 것이다.14)
이러한 열망은 2021년 쿠바 한인 이민 100주년을 맞이하면서 더욱 고조되어갔다. 한-쿠바 수교의 숨은 일등 공신은 한국계 쿠바인과 쿠바 젊은이들을 열광하게 한 한류의 힘과 그들의 분출하는 한류를 향한 에너지를 쿠바 당국이 마침내 수용하면서 이번 한-쿠바 수교가 전격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한국계 쿠바인과 쿠바 젊은이들의 한류를 갈망하는 자유의지가 한-쿠바 수교를 더는 지체할 수 없는 시대정신으로 만들었다는 생각도 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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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FEALAC, 한국과 쿠바관계에 대한 모든 것 !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2020.9.10., 대한민국-쿠바 관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8) “‘헤로니모 임(Jeronimo Lim Kim, 한국명 : 임은조, 1926 ~ 2006)’은 1946년 아바나대 법대에 진학한 뒤 5년제 법대 졸업을 1년 앞둔 49년 학업을 접고 카스트로와 함께 진보정당 ‘오르토독소(Ortodoxo)’에 입당함으로써 바티스타 독재 정권에게 본격적으로 저항하는 직업혁명가가 됐다. 이후 10년 동안 그는 출생지인 마탄사스 일대에서 같은 과 동기생인 피델 카스트로 국가평의회 의장과 도시게릴라 활동을 펼치는 등 사회주의 직업혁명가로 활동했다. 1959년 혁명 후 경찰공무원으로 입문해 산업부 차관을 지냈고 88년 퇴직 후에는 아바나 인근의 소도시 키테라스시장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기도 했다. 혁명정부 경찰청에서 인사·법무담당관을 지내다가 1963년 산업부 인사담당관으로 옮겨 쿠바의 혁명영웅인 체 게바라가 산업부장관을 지낼 당시 차관으로 4년 동안 함께 일하는 등 쿠바의 대표적인 국가원로였다.” 헤로니모 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9)‘ 연합뉴스 고미혜특파원, [쿠바 이민 100년] ③ '쿠바인이자 한국인'으로 사는 1천여명 후손들 | 연합뉴스 (yna.co.kr), 2012.12.13
10)2021년 현재 1,300여명의 쿠바 후손들이 있다고 한다. 연합뉴스 고미혜특파원, 앞의 기사
11) 헤로니모 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12) 이태근, 쿠바유기농업연수기, 흙살림 정보 제4호, 흙살림연구소, 2003.6.23.;; 김성훈 대담, "쿠바 유기농이 대안이다" 오마이뉴스 (ohmynews.com), 2003.12.30., 김성훈 전 농림부 장관의 제언, 식량난 북한·환경난 남한, 쿠바 유기농업 벤치마킹 하라|신동아 (donga.com) 2004.10.27
13)나의 쿠바 방문 소감과 쿠바유기농의 실체적 진실에 대해서는 이 글의 (2)에서 자세히 설명한다.
14)연합뉴스 고미혜 특파원, [쿠바 이민 100년] ⑤ 한류로 좁혀진 거리…미래 100년의 다리 잇는 이들 | 연합뉴스 (yna.co.kr), 2021.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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