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쿠바 수교 이후 대 쿠바전략을 생각한다 *<1> 다시 소환된 내 기억들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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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미래, 현실이 된 한-쿠바 수교
2024년 2월 14일 한밤중 쿠바 공화국(Repubic of Cuba)과 대사급 외교 관계가 수립되었다는 깜작 뉴스가 전해졌다. 전혀 예상조차 하지 못한 놀랍고 반가운 소식이었다. 조선일보에 따르면 ‘설 연휴를 앞둔 지난 2월 8일(현지 시각) 주 뉴욕 유엔 한국대표부 대사는 전날 유엔 쿠바 대사로부터 만나자는 전화를 받고 극비리에 만났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쿠바 대사는 놀랍게도 수교하자고 말했다고 한다. 심지어 쿠바 대사는 신속하게 수교 협상을 마무리 짓자며 양국 간 사랑과 우정을 상징하여 오는 2월 14일 밸런타인데이에 수교를 맺자는 깜짝 제안까지 했다고 한다.’2) 한-쿠바 수교는 마치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그렇게 전광석화같이 한 주 만에 쥐도 새도 모르게 극적으로 이루어졌다.
1949년 쿠바는 건국 1년 신생 대한민국을 승인하고 외교 관계를 처음 수립했다. 그러나 10년 후 1959년 쿠바 공산혁명으로 정권을 장악한 카스트로는 급진적 반미 친소의 길을 걸으며 1960년 한국과 국교를 단절하고 북한과 수교했다. 이번 수교는 1959년 이후 65년 만에 단절된 국교를 회복하는 것으로 윤석열 정부의 또 하나의 외교적 쾌거가 아닐 수 없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2023년 5월 11일 박진 외교부 장관과 쿠바 외교 차관의 만남 이후 양국 간 국교 정상화를 위한 은밀한 외교적 대화가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민관 중남미 외교라인을 풀 가동 마침내 그 결실을 보게 되었다. 3)
돌이켜 보면 한-쿠바 수교 문제는 2000년대로 들어서면서 유기농업, 경제, 문화, 체육, 관광 그리고 한류 등 다방 면에서 민간 차원 교류 협력의 물꼬가 터지면서 사실상 시간문제로 남아 있었다. 보기에 따라서는 우리보다도 쿠바가 더 절실하게 외교 관계 복원을 바라 왔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동안 쿠바 외교당국은 피델 카스트로(1926-2016)와 김일성 간 ‘특별한 형제적 우의로 포장된 정치의 벽’을 넘지 못해왔었다. 그럼에도 양국은 ‘서두르지 않되 멈추지도 말자’는 자세로 상호 신뢰 관계를 쌓아가면서 ‘카스트로 사후 적절한 시기’만을 기다려왔다. 4)
이번 한-쿠바 수교는 우리나라 중남미 외교의 ‘마지막 고리(missing link)’가 채워졌다는 점에서도 그 의미가 작지 않다. 무엇보다도 중남미 국가 내에서 쿠바가 차지하고 있는 정치적 위상과 영향력 등을 감안 하면 이번 수교로 마침내 한국의 대 중남미·카리브 지역(멕시코와 중미 7개국, 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 페루, 우루과이, 볼리비아, 베네수엘라 등 남미 12개국, 쿠바 등 카리브 13개국 등 총 33개국) 외교가 드디어 완전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하여 이번 수교는 북한에는 참으로 ‘뼈 때리는 아픔’을 안겨 주었다고 생각된다. 소련과 중국, 베트남 등에 뒤이은 북한의 마지막 남은 (시리아가 남아있긴 하지만) 형제국 쿠바의 ‘외교적 배신’으로 중남미에서 북한의 국가적 위상은 그만큼 축소되고 북한의 외교적 고립은 더욱 심화 될 것으로 전망되기 때문이다.
‘한-쿠바 수교’가 소환한 쿠바에 관한 기억들
한-쿠바 수교는 냉전 시대 정치적 긴장과 갈등 속에서 차츰 우리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었고 나의 기억에서조차 사라져간 쿠바에 대한 아련한 추억들을 다시 소환해 냈다. 60여 년 전 대학생 시절, 젊은 청춘에게 쿠바는 매력적인 이미지의 나라였고 무엇인가 새 희망을 주는 비전과 도전의 나라였다. 스페인 식민의 억압과 착취의 고리를 끊고 독립을 쟁취했으나 쿠바는 또다시 미국 자본이 지배하는 미국의 뒷 마당 놀이터로 전락했다. 바티스타 독재정권과 미국 자본에 저항하며 일어난 1959년의 쿠바혁명이 전하는 ‘들어라, 양키들아!! (Listen, Yankee: The Revolution in Cuba)’의 외침은5) 젊은 피를 끓게 하는 충격이었고 영혼의 울림이었다.
그러던 2003년 7월 어느 날, 6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된 나는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주 아르헨티나 대한민국 특명전권대사’ 임명을 받아 2년 8개월 동안 남미 생활을 하게 되었다. 대사 생활 중 아르헨티나를 중심으로 그동안 미영 등 서구 학자와 언론들이 전해주는, 브라질, 칠레, 페루, 멕시코, 쿠바 등 잊고 살았던 중남미와 카리브지역 역사를 현장에서 그들이 전해주는 그들의 이야기를 새롭게 듣고 보고 알게 되었다. 아르헨티나 코르도바주 방문길에서 만난 체 게바라 생가 박물관에서 마주한 젊은 의학도 체 게바라가 중남미 사회에 만연한 불평등 구조를 혁파하기 위해 혁명 전사가 되고 그의 영원한 혁명동지인 카스트로를 만나 쿠바혁명을 성공으로 이끈 이야기를 접하면서 쿠바가 다시 살아났다.
그리고 페루의 쿠스코와 마추픽추를 방문하고 스페인 잔혹사의 현장을 보면서 중남미·카리브인들의 분노와 고뇌 서린, 어딘지 모르게 우리와도 맞닿아 있는 듯한, 그들의 피맺힌 한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500년 가까이 그들을 지배해온 식민의 억압과 착취와 구조적 불평등에 대해 분노하고 저항하며 독립투쟁을 해온 반미, 친소, 친중(공) 성향의 좌파 정부의 영향력이 큰 중남미와 카리브 정치 환경 속에서6) 카스트로는 정치적 ‘큰 형님’으로 중남미카리브인의 자존심과 자부심이며 ‘정신적 지주’라는 사실도 새삼 깨닫게 되었다.
1492년 콜럼버스의 신대륙발견으로 번지기 시작한 각종 질병으로 콜럼버스에 의해 인디오라고 잘못 불리게 된 원주민들이 거의 절멸하다시피 했다. 1512년 스페인 식민지로 편입된 쿠바는 스페인 자본과 그들에 의해 끌려온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에 의해 담배와 사탕수수 중심의 대규모 수출 기업농업인 식민지형 플랜테이션으로 개발되었다. 쿠바는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섞이면서 태어난 새로운 ‘쿠바인(백인, 아프리카 흑인과 원주민들 간 다중 혼혈인 등)’에 의한 새로운 ‘라틴문화’ 창조의 용광로가 되었다. 특히 쿠바에서 시작된 정열의 살사, 맘보, 차차차 등 다양한 댄스음악들은 중남미 국가를 넘어 이제는 세계의 리듬이 되었다. 식민의 압제와 독립을 향한 열정을 담은 쿠바음악의 선율은 친근하고 다정하게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1898년 미-스페인 전쟁에서 스페인이 패배하여 1902년 쿠바는 근 400년에 이르는 스페인 식민통치에서 벗어나 독립을 되찾았으나 곧바로 미국의 종속경제로 편입되었다가 1959년 1월 혁명 후에는 또다시 소련 종속 체제로 재편입되었다. 소연방의 위성 경제의 하나가 된 쿠바는 소연방을 위한 설탕과 레몬을 공급하는 역할을 담당하면서 쿠바의 식민지형 단일농업은 그대로 지속되었다. 이 때문에 쿠바는 혁명과 상관없이 스페인 식민지 시절의 종속경제를 청산하지 못하고 주 생산물인 설탕을 제공하고 밀, 쌀 등 자체 생산이 어려운 기초 식량과 에너지를 종주국인 스페인과 미국, 그리고 혁명 이후에는 소련, 중국, 베트남 등을 통해 조달해 왔다. 최근에는 중국과 베네주엘라가 그 역할을 해왔다.
특히 쿠바의 기후 환경적 특성과는 상관없이 식민체제 아래 형성된 육류, 곡물 중심의 식생활 때문에 쿠바는 식량 대부분을 해외에 의존하면서 식량 자급은 처음부터 구조적으로 불가능했다. 그 때문에 밀과 옥수수는 우리와 같이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고 있고, 쌀은 50-60% 를, 콩도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 쿠바의 현실이다.
아르헨티나에서 만난 한 경제전문가는 비교적 쿠바 경제가 안정적이었고 여유가 있었던 소련 위성 경제 시절 카스트로는 국민교육과 의료 부분 등에서는 지금도 세계 어디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의 훌륭한 제도를 도입하고, 쿠바를 교육·의료 선진국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그러나 국민의 기초생활을 안정 발전시키는 식주의, 전기, 도로, 교통, 통신, 상하수도 등의 사회적 기반시설 구축을 소홀히 해왔다고 했다. 카스트로는 에너지를 포함 외부로부터 들어온 지원의 상당 부분을 쿠바의 식민지형 종속경제를 개혁 하는데 쓰기보다는 오히려 앙골라, 에티오피아, 모잠비크, 콩고 등 제3세계 공산혁명을 지원하는데 사용하는 잘못을 저질렀다고 하면서 카스트로는 쿠바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큰 그릇의 정치인이었다며 카스트로는 쿠바보다는 더 자원이 풍부한 큰 나라의 지도자로 태어났어야 했다고 말했다.
1991년 소연방체제 붕괴로 소련 경제와 단절되면서 ‘탯줄 잘린 신생아’ 신세가 된 쿠바에는 쿠바식 ‘고난의 행군시대’가 찾아왔다. 쿠바는 혁명 후 처음으로 식민지적 종속경제를 벗어나고, 자립 자급경제 건설을 위한 개혁을 시작했으나 이미 무너진 경제를 재건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때 등장한 것이 ‘쿠바식 유기농업’이었다. 아바나 시내의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롭게 보이는 조락한 건물들 사이로 난 거리를 누비고 다니는 1940-50년대식 ‘골동품 자동차들’의 전시장 같은 진기한, 그러면서도 안쓰럽기조차 한, 진풍경들이 역설적으로 그러한 쿠바인들의 고달픈 현실을 증언하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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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이 글은 필자의 “쿠바 유기농업의 진실과 교훈: 이제는 쿠바식 유기농업의 실체적 진실에 접근할 때,”(‘ 쿠바유기농업: 삶과 농업이 조화를 이루는 곳,’06 쿠바유기농업연수보고서, 환경농업단체연합회 06쿠바 유기농업연수단, 2007.3:31-38)의 글을 재편집하고 수정 보완하여 재작성 한것임.
2) 조선일보, 윤주헌 뉴욕 특파원, [단독] “밸런타인 데이에 사랑과 우정 위해” 쿠바가 14일 수교 제안했다 (chosun.com) 2024. 2.16
3)조선일보, 임민혁, 박진 전 외교장관이 말하는 한국·쿠바 수교 막전막후,“느려도 멈추진 말자”… 쿠바 재즈 틀어놓고 고위급 만났다 (chosun.com), 2024.2.16
4)피델 카스트로 사망(2016.11.26.) 이후 그의 친동생 라울 카스트로가 권력을 승계했다.
5) C. 라이트 밀스 (신일철 역), 들어라 양키들아, 쿠바의 소리, 정향사, 1961
6) 최양부,“이제는 우리의 남미를 보는 관점이 바뀌어야 한다 - - 페론이즘도 포퓰리즘도 아닌 자원부국 > News Insight | (사)국가미래연구원 (ifs.or.kr), 2015: ”남미대륙에 부는 우경화의 새 바람, 지나가는 바람인가? 변혁의 새 물결인가? -복지포퓰리즘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 > News Insight | (사)국가미래연구원 (ifs.or.kr),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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