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망하게 하는 확실한 법칙-혼군 #16-2: 전한(前漢) 원제 유석(BC75-BC49-BC33) <E>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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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군(昏君)의 사전적 정의는 ‘사리(事理)에 어둡고 어리석은 군주’다. 암주(暗主) 혹은 암군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정의하고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혼군의 숫자는 너무 많아져 오히려 혼군이라는 용어의 의미 자체를 흐려버릴 가능성이 높다. 역사를 통틀어 사리에 어둡지 않은 군주가 몇이나 될 것이며 어리석지 않은 군주가 몇 이나 되겠는가. 특히 집권세력들에 의해 어린 나이에 정략적으로 세워진 꼭두각시 군주의 경우에는 혼주가 아닌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의 혼군 시리즈에서는, 첫째로 성년에 가까운 나이 (17세) 이상에 군주가 된 사람으로서 군주의 역할이나 올바른 정치를 펴지 못한 군주로써,둘째로 결국 외부 세력에 의해 쫓겨나거나 혹은 제거되거나 혹은 국가의 존립기반을 크게 망쳐 놓은 군주를 혼군이라고 정의하였다. |
<20> 위상(魏相)과 병길(丙吉)(BC64)
위상은 평소 한나라 과거 역사를 즐겨 공부했으므로 수시로 황제에게 글을 써서 보고하고 깨우쳐주었다. 한나라 건국 이후의 국가가 취한 여러 조치들과 가의(贾谊)、조조(晁错)、동중서(董仲舒)와 같은 훌륭한 신하들의 말과 주청을 올려 시행된 여러 조치들을 조목조목으로 만들어 황제에게 올렸다. 위상은 또한 칙서를 받고 군국으로 부임하는 사람들과 휴직자들의 이동 사항을 낱낱이 황제에게 보고했으며 반란이 일어나거나 자연재해 변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부로 보고하지 않는 경우 위상이 몸소 황제에게 보고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어사대부 병길과 함께 위상은 황제를 충성스럽게 보필했고 황제 또한 이 두 사람을 몹시 믿고 소중하게 생각했다.
병길이라는 사람은 매우 신중하고 후덕하여서 자신의 올바름이나 능력을 자랑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황제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입은 은혜를 입 밖으로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정 누구도 그가 어느 정도로 황제의 신임을 받고 있는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 때 액정의 관비 측이라는 사람이 사람을 시켜서 상서를 올렸다. 자기가 예전에 아보의 공, 즉 황제를 어렸을 때 키운 공이 있었는데 지금은 어떤 범죄로 말미암아 고문을 당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관노 측은 사람을 시켜서 병길에게도 그 사실을 알게 하였다. 액정(궁궐) 책임자가 어사대부 병길에게 그 건에 대해 보고하였는데 병길은 이미 그 사실의 내막을 알고 있었으므로 관비 측에게 말했다.
” 너는 전에 황손(선제)을 성실하지 못하게 양육하지 않았느냐.
감독에게 매를 내려야 할 것인데 어찌 공이 있다고 말하느냐.
오직 위성사람 호조와 준양사람 곽정경이라는 사람이
황손을 기른 은혜를 받아야 할 것이다.“
병길은 황손 양육의 공을 표창하기로 결정하고 황제에게 그렇게 주청을 올렸다. 황제는 호조와 곽정경을 찾았으나 이미 죽은 뒤라서 그 자녀들에게 후하게 상을 내렸다. 관비 측은 면죄하고 관비에게 서인으로 신분을 바꾸어 주면서 십만 냥의 은전을 내려주었다. 황제가 직접 그 사실을 듣고 보았으나 병길이 황제 양육의 공이 있었음을 끝내 말하지 않았으므로 대단히 훌륭한 사람이라고 여겼다.
<21> 소망지(萧望之)를 시험하는 선제(BC64)
황제는 소망지가 경서에 밝은 것을 중히 여겨 중요한 사안을 의논할 때 자문하였을 뿐 아니라 재상으로 임명하였다. 앞으로 더 깊이 정사를 맡길 생각으로 조정에서 내보내 좌풍익으로 전보시켰다. 소망지는 황제가 태자의 스승 소부로 잇을 때부터 황제와 가까이 지냈는데 이번 조치로 지방으로 전출되자 황제의 뜻이 바뀐 것으로 생각하고 병을 칭하고 사직했다.
황제가 그 소식을 듣고 시중 김안상을 직접 소망지에게 보냈다.
“ 내가 사람을 쓰는 것은
모두 백성을 다스리는 그 공에 따르고자 함이오.
그대는 전에 평원태수로 있었지만
그 재임기간이 짧아서
이번에 다시 삼보지역을 맡겨 보자는 것이니
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니요.“
소망지는 곧바로 일어나 사무를 보았다.
처음 액정령 강하는 여러 번 그 동생 거기장군 장안세에게 황증손의 뛰어난 재능과 기이한 징조들을 언급한 적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런 말을 하지 못하도록 막았는데 그 이유는 나이 어린 소제가 재위하고 있는 상황에 증손자를 언급하는 것이 위태로운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BC74년 창읍왕 유하가 졸지에 쫓겨나고 선제 유순이 즉위하게 되자 황제가 장안세에게 말했다.
“ 액정령 장하가 평생 나를 칭찬할 떄마다
장군은 그것을 말렸소,
참으로 잘한 일이오.“
황제는 장하에게 추모의 고마움을 표하면서 은덕후의 작위를 내리고 무덤을 지키도록 이백호를 주었다. 장하의 아들이 일찍 죽었으므로 장안세의 작은 아들 장팽조를 양자로 입양하게 하였다. 팽조 역시 어렸으므로 황제는 좌석으로 불러서 같이 앉아서 책을 읽으면서 장차 봉읍지를 내릴 생각이었다. 장안세는 지극한 감사의 마음을 표하였지만 무덤을 지키는 가읍의 숫자가 너무 많다고 여겨 이백호에서 삼십호로 줄여 줄 것을 요청했다.
황제가 말했다.
“ 나는 액정령을 위해 그렇게 한 것이지
장군을 생각해서 그런 것이 아니오.“
장안세는 더 이상 말을 꺼내지 못했다.
<22> 창읍왕을 두려워 하는 선제
선제는 창읍왕보다 나이는 한 살 어렸지만 항렬로는 조카뻘이었다. 따라서 선제는 쫓겨난 황제 창읍왕의 존재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산양태수 장창에게 황제의 친서를 내려서 반란에 대비하도록 하고 내왕객들을 사찰하면서 유하와의 소통을 끊었다. 장창은 수시로 유하의 거동을 사찰하면서 유하의 망해가는 징조를 다음과 같이 보고해 올렸다.
“ 창읍왕이라는 존재는 얼굴색이 검푸른 색이며
눈은 작고 코끝은 뾰족하게 튀어나왔지만 작으며
눈썹은 거의 없고
몸은 거대하지만 절름거리면서 잘 걷지도 못합니다.
신 창이 전에 속뜻을 알아보기 위해
말을 건넨 적이 있는데 올빼미를 두려워하는 마음을 지적하면서
‘창읍에는 너무 올빼미가 많아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창읍왕이 말하기를
‘그렇지요. 전에 제가 서쪽으로 장안에 갔을 때에는 올빼미가 없었는데
다시 동쪽으로 돌아올 때에는
제양에서 부터 올빼미 우는 소리를 많이 들었습니다.
창읍왕의 의복이나 언어나 앉고 일어서는 것을 보면
거의 정신병자와 같으며 총명하지 못합니다.
신 창이 그에게 말씀드렸습니다.
‘ 애왕(창읍왕의 아버지)의 가무하는 측근 장수 등 열 명은 아들이 없고
애왕의 묘지를 돌보고 있을 뿐입니다.
파하여 각자 집으로 돌아가도록 하십시오.‘
창읍왕이 그 말을 듣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중인들이 묘지를 지키고 있지만 병이 나도 치료하지 않고
살상을 저질러도 법으로 다스리지 않아서
빨리 죽도록 하면 되는 것인데
태수께서는 왜 번거롭게 돌려보내라고 요청하시는 겁니까?“
그 사람 자질이 못나서 망한 것을 즐겁게 생각하고 있으니
끝내 어짐과 의로움을 그에게서 찾아 볼 수가 없는 것이 위와 같았습니다.“
황제는 더 이상 유하가 두려운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23> 근신주밀(谨慎周密)한 장안세 (BC63)
거기장군 장안세는 부자가 모두 후작으로 책봉되어 지위가 크게 높아졌지만 번번히 녹읍지를 사양했다. 그리고 장씨를 위한 수백만전 모아 두었다. 장안세는 매우 근신하고 두루 치밀하였으며 큰 국사가 결정될 때 마다 병을 핑계로 자리를 옮겨달라고 요청했다. 황제의 조령이 내려졌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그 내막을 전혀 모르는 척 하면서 관리를 승상부에 보내어 내용을 물어보도록 했다. 조정대신들은 그 누구도 황제의 조령이 누구와 함께 결정되었는지를 알 수 없었다. 예전에 추천했던 자가 감사의 뜻을 표하려하자 장안세가 말했다.
“ 현명하고 유능한 사람을 뽑아 쓴 것인데
사적으로 감사의 뜻을 표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
끝까지 다시 만나지 않았다. 공이 많았지만 뽑혀 승진하지 못한 관리가 장안세에게 그 사실을 불평하며 말했다. 장안세가 대답했다.
“ 군에게 높은 공이 있음은
밝은 황제께서 알고 계실 거요.
신하가 사무를 보면서
어찌 공이 높거나 낮은 것을 가지고 스스로 말한단 말이오?“
장안세는 그 관리의 말을 끊고 응대하지 않았다. 그 관리는 과연 공을 따라 승진되었다.
장안세는 부자가 모두 조정안에서 지위가 높아지면서 스스로 불안해졌다. 마침내 아들 장연수를 내보내 북지태수로 전출시켰다. 몇 해 뒤에 황제는 장안세 나이가 많은 것을 염려해 장안수를 좌조 및 태복으로 임명하여 불러 들였다.
<24> 스스로 물러나는 태자태부 소광(疏广)과 태자소부 소수(疏受)(BC63)
이 해 4월 황자 유흠을 준양왕으로 세웠다. 나이는 열 두 살이었지만 논어와 효경을 모두 공부했다. 태부(太傅) 소광이 소부(少傅) 소수에게 말했다.
“ 내가 듣기에
만족할 줄 알면 굴욕을 당하지 않고(知足不辱)
그칠 곳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知止不殆)’고 했다.
지금 우리 녹봉이 이천석이고 관직이 뚜렷하고 이름이 높아졌으니
이럴 때 떠나지 않으면 후회가 생길까 두렵구나.“
그날로 소광 소수 부자는 병을 핑계로 사직을 요청했다. 황제는 모두 허용하면서 황금 이십근을 주었고 황태자도 오십근을 내렸다. 소광 부자가 떠나는 날 공경들과 예 친구들이 환송식을 차려주었는데 길 가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칭송해 마지 않았다.
“ 정말로 훌륭한 두 현자십니다.”
소광과 소수가 고향에 돌아온 뒤 그날로 금을 팔아서 친족 빈객 친구들을 불러 모아 잔치를 벌였다. 어떤 사람들이 하사받은 금으로 땅을 사서 후손들을 위한 산업기반으로 삼는 것이 어떻겠냐고 권하자 소광이 말했다.
“ 내가 늙어서 어찌 후손들을 생각하지 않았겠소.
내게 전부터 갖고 있던 작은 땅이 있었으니
후손들이 열심히 경작하면 의식주 걱정은 없을 것이오.
지금 다시 땅을 사 덧붙인다면 자손들에게 나태태만하게 할 뿐이오.
현명하면서 재산이 많으면 그 뜻을 훼손하게 될 것이고
어리석으면서 재산이 많으면 잘못만 많아질 것이오.
또 부자는 대중들이 원한을 갖기 쉽소.
내 이미 재산 없는 것을 자손들에게 가르쳤는데
재산을 불려서 잘못을 일으키고 원한을 만들게 하고 싶지 않소.
또 이 금은 황제께서 늙은 신하를 위해 내리신 것이오.
따라서 여러 고향 친척, 친구들과 나누면서
남은여생을 보내는 것이 좋지 않겠소?“
이것 때문에 친척, 친지들을 모두 기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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