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려있는 정책플랫폼 |
국가미래연구원은 폭 넓은 주제를 깊은 통찰력으로 다룹니다

※ 여기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국가미래연구원(IFS)의 공식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나라를 망하게 하는 확실한 법칙 혼군 #17 : 용렬한 후연 2대 황제 모용보(H)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2년04월22일 16시50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0

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 

  

(35) 부견의 동진정벌 계획을 부추긴 모용수(AD382)

 

부견에게 동진은 사랑니 같은 존재다. 환온이 살아 있을 때에는 수시로 국경을 넘보면서 국가에 통증을 주곤 했지만 지금은 내부 문제로 골머리 썩다보니 마치 매복된 사랑니 같은 존재가 되었다. 있어도 없어도 별 문제는 없지만 그래도 천하를 통일한다는 관점에서는 아무래도 뽑아야 할 나라였다.

 

자신의 아버지 부법이 억울하게 죽었다고 생각하고 반란을 일으킨 아들 동해공 부양의 반란(AD382)이 마무리되자 부견은 부융을 정남대장군으로 내세워 다시 남정준비에 착수했다. 일단 파서(사천성 낭중)와 재동(사천성 금양)에 있는 태수들에게 수군을 양성하여 장강을 따라 내려 올 준비를 하도록 명령했다. 부견이 이렇게 말했다.

 

“ 내 30여 년 왕업을 이어받고도 아직

  저 동남쪽 귀퉁이(동진을 폄하하며 지칭)를 교화하지 못하였다.

  대략 계산해보니 전국에서 약 97만을 동원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저 귀퉁이를 토벌할까하는데

  경들의 생각은 어떠시오?“

 

비서감 주융이 손뼉치며 호응했다. 

 

“ 만약 동진 주군(효무제 사마요)이 

  손을 뒤로 묶고 옥을 입에 물고 항복해오지 않는다면  

  저들은 모두들 수장되어 물고기 밥이 되고 말 것입니다.“

 

부견이 흡족해 하며 말했다.

“ 그것이 바로 내가 바라는 바이다.”

 

상서좌복야 권익이 강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 은나라 주왕이 비록 포학했으나 

  세 사람의 인자한 사람(三仁 : 微子, 箕子, 比干)이 있었으므로

  주나라 무왕이 군사를 돌렸습니다.

  지금 동진은 비록 작고 약하지만 크게 나쁜 일을 한 적이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사안과 환충은 강도의 영웅호걸로써

  군주와 신하가 위아래로 화목하고 단합되어 있으니

  아직은 도모하기 쉽지 않습니다.“ 

 

부견은 모든 신들에게 의견을 분명하게 말하라고 명령했다. 석월은 아직 정벌할 때가 아니라고 말했다. 부견은 이렇게 말했다.

 

“ 시경에 이렇게 씌여 있다 :

  ‘집을 지을 때 길가는 사람에게 물어보면 집을 지을 수가 없네’

  내가 마음속으로 결정하면 되는 것이다.“

 

다른 신하들이 모두 물러가고 부융만 남았다. 부융은 전쟁이 불가한 이유로 세 가지를 들었다. 

 

  첫째, 하늘의 도에 순응하지 못하는 것,(정당성이 없다는 것)

  둘째, 동진에 아무런 틈새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

  셋째, 그동안 전쟁이 너무 잦았고 병사들이 적을 두려워 한다는 것.

 

부견의 얼굴빛이 달라졌다. 

 

“ 내게 강군 100만이 있다.

  그리고 전쟁물자가 하늘처럼 비축되고 쌓여있다.

  또 내가 비록 선량한 군주는 아닐지라도 사리에 어둡거나 약하지는 않다.

  승기를 이어 망해가는 나라를 치고자 하는데 

  어찌 이기지 못한다고 하는지 모르겠다.

  도적을 밑에 두고 나라 근심을 언제까지 끌고 가야 한단 말인가?“

 

부융이 단호하게 말했다.

 

“ 동진을 멸망시킬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지친 병사를 끌고 이길 수는 없습니다.

  폐하 주변에는 흉노, 선비, 갈, 저, 강 등

  우리의 태생적 적들이 가득한데

  만약 우리가 동쪽으로 내려 간 틈을 타고 뒤를 공격해 온다면

  비록 태자가 지킨다고 하더라도 

  마치 변란이 배, 가슴, 팔꿈치, 겨드랑이에 생기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승상 왕맹이 죽으면서 한 말을 왜 상기하지 못하십니까?“

 

부견은 반대 의견에 귀를 닫아버렸다. 부융의 강력한 반대에 힘을 얻은 신하들은 더욱 강하게 전쟁불가를 외쳤다. 한번 군사를 일으키기만 하면 가을 낙엽 떨어지는 듯하다고 여기는 부견으로서는 신하들의 반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태자 부굉도 동진이 죄가 없으므로 명분도 없는데다가 만에 하나 밀리기라도 한다면 북중국 최강국 전진의 위신이 도저히 서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부견은 이렇게 쏘아붙였다.

 

“ 진나라 시황제가 6국을 통일할 때에도

  모든 군주가 포학해서 

  전쟁 명분을 얻었기 때문에 이겼냐?“ 

 

찬반 의논이 끝이 없이 길어졌다. 모용수가 부견에게 다가가서 이렇게 말했다.

 

“ 성스러운 마음으로 폐하께서 결정하시면 그것으로 끝나는 일입니다.

  널리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진무제(사마염)가 오나라를 멸망시킬 때 

  오직 장화와 두예 두 사람만 찬성했었습니다.

  여러 사람의 의견을 좇았다면 어느 틈에 출병할 수 있었겠습니까?“ 

 

부견이 크게 기분이 좋아졌다.

 

“ 나와 더불어 세상을 도모할 사람은 오직 경뿐인 것 같소.“

 

부융이 나서서 말렸다.

 

“ 만족할 줄 알면 욕을 입는 일이 없고

  그칠 줄을 알면 위태로움이 없다고 했습니다.

  동진은 작지만 우리 융적과는 다른 

  중화의 정통성을 지니고 있는 나라입니다.

  하늘이 그들의 대통을 절대로 끊어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36) 부견의 총애하는 승려 도안(AD382)

 

부견은 평소 존경하는 승려 도안을 찾아갔다. 도안은 허베이 성(河北省)의 유교 가문에서 태어나 12세에 출가하여 서역에서 온 불도징(佛圖澄: AD233-AD348)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불도징 사후에는 전란을 피하여 이리저리 여러 곳을 전전하면서 유랑하였다. 혜원(慧遠) 등 400명의 문하생과 함께 후베이 성(湖北省) 양양에 단계사(檀溪寺)를 짓고 엄숙한 구도와 수련을 중시하는 교단을 조직하여 국왕과 귀족으로부터 두터운 존경과 신임을 받았다. AD379년에 부견의 초빙을 받아 장안으로 가서 국가고문에 추대된 사람이다.

 

부견이 동진 정벌에 대해 묻자 도안은 이렇게 대답했다.

 

“ 동남쪽은 축축하여 찬 기운이 쉽게 생깁니다.

  그래서 우순(순임금)께서도 여행에서 돌아오지 못하셨고

  대우(하나라 우왕)께서도 갔다가 돌아오지 못하셨습니다.

  어찌 대왕은 대가를 움직이는 수고를 자청하시는 것입니까?“

 

부견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 수고를 마다한다면

  옛 제왕들은 아무도 정벌을 나가지 않았을 것 아닙니까?“

 

도안이 말했다.

 

“ 꼭 정벌하셔야 한다면 이렇게 하십시오.

  먼저 한 장짜리 편지를 앞세워서 받들게 하고,

  뒤에는 제장들이 6군을 거느리고 따라가면

  동진은 반드시 머리를 조아리며 복종해 들어 올 것입니다..

  친히 장강을 건너실 필요는 없습니다.“

 

 

(37) 부견의 총희 장부인의 반대(AD382)

 

부견이 사랑하는 총비 장부인이 나서서 말했다.

 

“ 자연 이치에 따른다면 이루어지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서경에 말하기를 

  하늘이 총명한 것은 나의 백성들이 총명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군사를 내보낼 때에는 반드시 위로 하늘의 뜻을 살피고

  아래로 백성들의 마음을 읽어야 하는 법입니다.

  지금 사람들의 마음이 반대하고 있으니

  그것은 하늘의 뜻이라고 봐야 합니다.

  속담에 이르기를; 

       닭이 밤에 울면 군사행동이 불리하고 

       개가 짖으면 궁궐이 텅 빌 것이며

       병사가 움직일 때 말이 놀라면 군대가 패하여 돌아오지 못할 징조라고 했습니다.

  지금 닭이 밤에 울고,

   개가 슬프게 짖으며, 

   말들이 놀랐고 무기고 병사들이 스스로 움직이며 소리를 냈으니

   이보다 더 불길한 징조가 어디 있겠습니까?“

 

부견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이렇게 쏘아 붙였다.

 

“ 군사 문제에 아낙네가 끼는 것이 아니요.”       

  

어린 아들 부선마저 나서서 이렇게 말했다.

 

“ 나라의 흥망은 현자를 쓰고 버리는 것에 있다고 했습니다.

  양평공(부융)의 말씀을 멀리 하시면서

  사안과 환충의 동진을 공격하신다니

  신은 가만히 의심스럽게 생각이 듭니다.“

  

부견이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 어린아이가 어찌 큰일을 알겠느냐?”

 

거의 모든 신료들이 반대했지만 부견은 동진정벌의 꿈을 놓지 않았다.

 


(38) 비수(肥水)대전의 참패(AD383)

 

AD383년 정월 전진의 효기장군 여광(3년 뒤 후량을 세움)이 동진정벌을 준비하기 위하여 장안을 출발해 황하를 끼고 동쪽으로 내려왔다. 지난 해 서역을 정벌할 때 항복받은 선선왕 휴밀타와 미전도 향도로 자원 동참했다. 5월 동진의 거기장군이자 군사 실권자인 환충은 10만 군사를 이끌고 호북성 송자에서 북으로 올라왔다. 4년 전(AD379년, 위(62) 참조) 빼앗긴 양양지역을 수복하자는 생각이었다. 유파는 정북진 하여 양양으로 나아갔고 곽전은 양양의 배후 단강구를 습격했다. 양량은 장강을 거슬러 서쪽 방면으로 부성(사천성 면양)을 향했는데 촉지역 전진 군사를 묶어두기 위한 전략이었다. 

 

부견은 즉각 정남장군 부예와 관군장군 모용수에게 보기병 5만을 주어 환충의 양양방면 군사를 막게 하고 사천성 방면에는 요장과 장자를 보내 막았다. 환충의 군대는 면수(한수) 남쪽으로 퇴각했다. 오래 전부터 동진정벌을 꿈꾸며 공격개시 시점을 저울질하던 부견으로서는 환충의 양양 역습이 결정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즉각적으로 전국에 동원령을 발표하였다. 전국 동네마다 장정 10명에 1명을 강제로 차출하였다. 그 중에 20세 이하로 재능과 용맹을 갖춘 자는 황실호위 우림랑으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AD383년7월)

 

eabfb014ece0a019a36049c928a54a90_1648781

 

0
  • 기사입력 2022년04월22일 16시50분
  • 검색어 태그 1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