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망하게 하는 확실한 법칙 혼군 #17 : 용렬한 후연 2대 황제 모용보(F)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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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
(23) 전연 귀족들의 부패와 충신 열관의 죽음(AD368)
전연의 왕공 귀족들은 직접 백성들을 음호, 즉 국가가 아닌 왕공귀족 개인의 소유 가호로 소유하고 있었으므로 나라의 호구 수가 개인 가호 수보다 적었고 국가의 세수가 왕공귀족의 세수보다 적었다. 국가의 창고는 텅텅 비어가는 동안 왕공귀족의 재산은 폭발적으로 팽창되어갔다. 상서좌복야 열관이 나서서 맹렬히 상황을 비판하고 나섰다.
“ 지금 세 방면(동진, 전진, 전연)이 서로 솥처럼 각축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국가의 정치가 바로 서지 않고
호족과 귀족들이 방자하게 전횡하여 민호가 다 없어질 지경까지 되었습니다.
국가 세수가 없고 관리들 줄 봉록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전투 병사들이 먹을 식량도 떨어지고
관리들이 먹을 음식과 옷을 스스로 장만할 지경입니다.
이웃하는 적에게 들키지 않는 것이 다가 아니니
늦기 전에 개인 소유의 민호를 서둘러 국가로 환입하십시오.“
전연의 주군 모용위가 그 소리를 듣고 놀라서 열관에게 처리를 맡겼다. 열관이 간사하게 숨긴 것을 모두 들추어 국가민호가 20만호나 늘어나자 온 조정의 귀족계층들은 열관을 원망하고 화를 냈다. 열관에게는 지병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직분에 충실하여 가호의 호적을 낱낱이 대조하다가 병이 도져서 그해 겨울에 죽었다.
(24) 동진의 무리한 전연 북벌(AD369)
동진 대사마 환온은 오래 전부터 북벌의 계획을 갖고 있었다. 여기서 북벌의 대상은 전진과전연이다. AD368년 3월 환온은 서여주자사 치음과 강주자사 환충과 예주자사 원진과 함께 전연을 토벌하게 해 줄 것을 조정에 요청했다. 치음은 원래부터 전쟁 따위에 참여하는 것이싫어서 자신의 휘하 부대를 모두 환온에게 맡기면서 다른 자리로 옮겨 달라고 부탁했다. 환온은 즐거운 마음으로 요청을 수락하고 치음을 회계내사로 내보내고 자신이 서연주 이주 자사가 되었다.
환온은 보,기병 5만을 물길을 타고 이끌고 고숙(안휘성 당도, 장강의 마안산 남쪽)을 출발하여 연주, 즉 지금의 산동성 제녕 부근에서 북벌을 시작했다. 치초가 강물의 수위가 낮아서 조운이 원활하지 못할 것에 대비하자고 했지만 환온은 걱정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환온군이 진격하고 나서 가뭄이 점차 심해지면서 강물이 완전히 바닥을 드러냈다. 환온은 모호생을 시켜서 거야(산동성 거야)로부터 300 리 운하를 파서 말라빠진 변수에 물을 대도록 했다. 치초가 무리한 북진전략을 비판했다.
“ 수로의 배후가 적에 의해 막힐 가능성이 높습니다.
차라리 군대를 이끌고 수로가 아닌 육로로
전연 수도 업으로 바로 진격하면
그들이 겁을 먹고 도망가 저절로 붕괴될 것입니다.
만에 하나 나와서 싸운다 하더라도 전세는 금방 결단날 것입니다.
다만 공께서 이런 전략이 경솔한 것이어서
승산이 엷다고 생각하신다면 신중한 태도를 가지고
군사를 황하와 제수 사이에 머물게 하신다음
물자를 충분히 축적하고 나서
여름쯤에 병력을 발동하시면
비록 늦은 것 같아도 필시 성공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이 두 계략을 버리고 계속하여 진군하신다면
속도도 빠르지 않을뿐더러 물러날 수도 어려운 처지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도적들이 이런 형국을 이용하여 전투를 계속 지연시키고
시간을 지체하게 되면 북쪽 지역은 곧바로 가을과 겨울이 와서
물길이 얼고 곡식이 다하며
가죽옷을 입어도 추위가 뼛속을 스며들 것이 두렵습니다.“
환온의 군대를 맞아 산동성 호륙(어태현)에서 녕동장군 모용충(忠)이 분전했으나 패하여 사로잡혔다. 모용위가 하비왕 모용려를 대도독으로 삼고 보기 5만 명을 다시 보냈으나 황허(하남성 개봉 부근)에서 대파 당하였다. 고평태수 서번은 동진에게 항복했고 전연 장수 부안도 동진의 등하와 주서에게 연파 당하였다. 다급해진 전연 황제 모용위는 낙안왕 모용장에게 전군을 통괄하게 하고 환온에 대항했으나 그마저 격파 당하자 이제 남은 유일한 방법이 전진의 부견에게 도움을 청하는 일이었다. AD369년 7월 환온이 무양(산동성 신현)까지 들어와 주둔하자 주변의 인사들이 속속 동진 환온에게 투항해왔다.
(25) 도망갈 생각 밖에 없는 모용위와 모용평(AD369)
순식간에 황하 이남 회하 이북 영토가 무너지자 전연 황제 모용위와 최고 군사지도자 모용평은 두려운 마음에 화룡(용성, 즉 전연의 옛 수도, 지금의 조양)으로 달아날 생각부터 했다. 사실 황하가 뚫리면 수도 업(하북성 형태)까지는 지척이나 마찬가지였다. 오왕 모용수가 나아와 말했다.
“ 신이 청컨대 이들을 치게 해 주십시오.
만약 그리하고도 이기지 못한다면
그 때 달아나셔도 늦지 않으실 것입니다.“
황제 모용위가 낙안왕 모용장 대신 모용수에게 사지절, 남토대도독의 직책을 주고 범양왕 모용덕의 5만 군사와 함께 환온을 막았다. 동시에 산기시랑 악숭을 전진에 보내 구원해 줄 것을 요청하면서 성공하면 호뢰관(하남성 형양 부근 사수진) 이서 땅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26) 전진 부견의 전연 파병과 모용수의 혁혁한 공(AD369)
전진의 부견은 대신들과 함께 전연에 대한 파병지원 문제를 의논했다. 모두들 반대했다. 15년 전인 AD354년 환온이 전진을 공략해 왔을 때(AD354년 남전 전투: 위(51)) 전연이 도와주지도 않았고 또 전진에게 칭번해 오지도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전진의 책사 왕맹의 생각은 달랐다.
“ 현재 전연의 실권자 모용평은 전혀 환온의 적수가 되지 못합니다.
환온이 이길 것은 자명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환온이 낙양을 잡아먹고
유주(하북성 북경 주변)와 기주(하북성 중부)와
병주(산서성 태원 부근)와 예주(하남성 동부와 산동성 남부)의 온 병사를 긁어모아
우리 전진의 동쪽 국경을 넘볼 텐데
그렇게 되면 폐하의 사업은 끝장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전연과 힘을 합쳐서 환온을 물리치신 다음에
허약해진 전연을 흡수하면 우리가 대세를 잡는 것 아니겠습니까?
기가 막힌 묘책이 아닐 수가 없었다. 부견은 구지와 등강에게 2만 군사를 붙여서 동쪽으로 낙양을 거쳐 영천(하남성 우현)에 진을 치게 하는 한편 산기시랑 강무를 전연에 보내 구원군이 동쪽으로 이미 진군했다고 알려주었다. 황하를 건너 온 환온의 군대는 여러 가지 악재에 시달렸다. 선봉 군대가 결사적으로 항전하는 전연군에게 연이어 패배하는가 하면 너무 깊이 들어 온 까닭에 배후 보급로가 차단되기 일쑤였다. 게다가 전진의 대군이 동쪽으로 진격해 오고 있다는 소식에 동진 군대는 크게 술렁거렸다. 그리고 건강의 동진 조정안에서는 환온에 대한 반감이 싹트고 있었다.
환온은 황급히 철군을 결정했다. 전연의 방위군 선봉장인 오왕 모용수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환온의 뒤를 쫓았다. 참모들은 퇴각하는 환온 군대를 급습할 것을 종용했지만 모용수는 침착했다. 최초로 후퇴를 결정한 환온 군은 추격해 오는 전연군에 대비하여 최정예군을 후방에 배치하면서 퇴각하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한참 동안 전연군이 쫓아오지 않는 것을 본 환온군은 방심하면서 퇴각 속도를 높였다. 이때를 틈타 모용수는 전격 습격 작전을 폈다. 순식간에 환온은 5만 정벌군사의 6할인 3만을 잃었다. 환온은 패잔병을 모아 산양(강소성 회안)으로 물러나 주둔했다. 그리고 패전의 책임을 전부 군량보급의 책임자인 원진에게로 돌렸다. 원진은 모든 잘못을 자신에게 덮어씌운 환온에게 격분하여 수춘(안휘성 수현)에 웅거하면서 전연에 항복하고 말았다.
(27) 암살 모의와 모용수의 전진 망명(AD369)
환온이 퇴각하자 모용수는 양읍(하남성 수현)을 거쳐 전연의 수도 업(하남성 임장현)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승전 포상 문제를 전연 조정에 상주했다. 태부 모용평은 날로 위엄과 명성이 떨치는 조카 모용수를 그냥 둘 수가 없었다. 태후 가족혼(황제 모용위의 친모) 또한 오래 전부터 시동생 모용수를 싫어했다. 당연히 모용평과 가족혼 태후는 서로 짜고 모용수를 살해할 음모를 진행시켰다. 죽은 모용각의 아들 모용해와 모용수의 장인 난건이 몰래 모용수에게 암살계획을 알려 주면서 말했다.
“ 먼저 일어나야 이긴다.
모용평과 모용장(황제 모용위의 형)만 처리하면
나머지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모용수는 거절했다.
“ 피붙이 간의 다툼이야말로 나라의 혼란입니다.
내가 조용히 죽을지언정
차마 형제를 죽이면서까지 정권을 찬탈할 수는 없습니다.“
모용해와 난건이 거듭 재촉하자 모용수는 이렇게 말했다.
“ 그렇다면 차라리 제가 피하겠습니다.”
모용수는 아들 모용령에게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물었다. 모용령은 일단 전연 모용씨의 근거지인 용성(요녕성 조양)으로 돌아간 뒤 조정의 적개심을 피하는 것이 상책이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주변을 흡수하여 스스로 힘을 기르는 것이 다음의 계책이라고 말했다. 모용수는 그것이 훌륭한 생각이라고 판단하여 몰래 빠져나가 북으로 달아났다. 모용수가 출발한 지 하루도 안 되었을 무렵 모용수의 다른 아들 모용린은 평소 아버지로부터 홀대받은 것에 대한 앙갚음으로 그 계획을 조정 밀고해 버렸다. 다른 모용수의 측근들도 모두 모용수에게 등을 돌리고 말았다. 북쪽으로 가려던 계획이 틀어지자 모용령이 아버지에게 마지막 수단은 전진에 투항하는 것이라고 건의했다. 모용수도 동의했다. 모용수와 모용령 부자는 조카 모용해와 함께 그 길로 말머리를 돌려 서쪽으로 장안을 향해 달려갔다. 전진의 부견은 모용수 부자를 크게 환영했다. 모용수에게 관군장군, 모용해에게 적노장군의 직을 주었다.
(28) 모용수를 제거하려는 왕맹(AD369)
부견이 모용수 부자를 크게 후대하는 것을 왕맹은 경계했다.
“ 모용수 부자는 용과 호랑이 같은 부자이니
지금 제거하셔야 합니다.“
부견의 생각은 달랐다.
“ 영웅호걸을 거둬들여 사해를 깨끗이 평정하는 것은
군자의 소망인데 내 어찌 그들을 죽이겠소.
또 서로 이미 정성스럽고 충성스런 말을 나누었는데
필부도 허툰 말을 하지 않을 터인 바에
만승인 내가 어찌 약속한 말을 거두어 그를 죽이겠소.“
당시 전진과 전연의 외교관계는 우호적이었다. 서로 신하들의 교류가 활발했다. 전진에 들어 갔던 양침은 돌아와서 전진의 전쟁준비와 민심수습 등을 보고하면서 장차 있을 변란에 철저히 대비해야 할 것이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황제 모용위와 태부 모용평은 부견이 모용수를 받아들이는 것을 보면 먼저 우호관계를 깰 생각이 없는 것이 분명하다고 판단했다. 부견이 전쟁을 생각하고 있었으면 분명히 적개심 때문에 오왕 모용수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라는 단순논리였다. 그러나 전연의 태위 황보진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 오원의 화(伍員之禍)를 대비하셔야 합니다.
낙양과 태원과 호관(산서성 장치)에 병력을 증강시켜
장차 전진의 침입에 준비를 하셔야 합니다.“
오원의 화란 BC 6세기경 춘추시대 초나라 오원(오자서)의 아버지 오사가 간신 비무기에게 모함을 받아 죽자 오원이 피란을 거듭하다가 결국 오왕 합려에게 등용되어 아버지 원수 초나라를 멸망시킨 고사를 말한다. 황보진이 빗댄 것은 전진으로 도망간 모용수를 경계하자는 말이었다. 태부 모용평이 황제 모용위에게 말했다.
“ 전진은 힘이 적고 약하기 때문에 우리를 도왔던 것입니다.
또 부견은 항상 정도만 따라 가는 사람이므로
반란을 일으킨 오왕 모용수의 말을 듣고 우리를 공격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가볍게 놀라서 경계심을 일으키는 것이
오히려 그들에게 침략의 빌미를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설득하면서 한편으로 전진에서 온 사신에게 얼마나 전연이 풍요롭고 잘 사는 지를 보여 주었다. 고태와 하간과 같은 강직한 전연 신하들은 오히려 강한 병기와 조직된 군사들의 힘을 보여줘야 할 것이라고 간청했지만 무력긴장을 원하지 않는 모용평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었다. 정권은 문란한 가족혼태후가 쥐고 있었고 모용평은 옹졸하고 편협하며 질투와 탐욕에 가득 찬 사람이었다. 뇌물로 자리를 사는 것이 유행이 되어 유능한 관리는 능력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29) 왕맹의 낙양함락과 모용수 제거 모략(AD370)
동진이 스스로 퇴각하고 나서 승리에 도취된 전연은 참전 대가로 약속한 호뢰관(하남성 형양 서북쪽 사수진) 서쪽 땅을 전진에게 주지 않았다. 사신이 말을 잘못한 것일 뿐 애당초 호뢰관을 할양할 생각이 아니었다고 둘러댔다. 화가 난 부견은 왕맹과 양성과 등강에게 3만 군사를 주어 전연을 토벌하기로 하고 낙양을 공격했다.(AD369년 12월) 낙양을 지키던 전연의 형주자사 모용축은 부견의 항복권유 편지를 읽자마자 창과 칼 을 내려놓고 투항해 왔다.
왕맹은 낙양을 향해 출병하기 직전 모용수의 아들 모용령을 향도로 삼음과 동시에 모용수를 찾아가 기념할 만한 물건을 주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모용수는 의심하지 않고 몸에 지니던 작은 패도 하나를 건네주었다. 낙양을 함락시키자 왕맹은 모용수와 가까운 금희라는 사람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 모용령을 찾아가서 이 패도를 보여 주면서
아버지가 이렇게 말 했다고 전하시오.
‘지금 왕맹이 나(모용수)를 심하게 견제하고 있고
부견 또한 나를 진정으로 신뢰하는지 알 수가 없다.
나 아버지 모용수는 막 동진으로 망명길을 떠나면서
이 칼을 금희에게 주어 미리 알리는 것이니
너 또한 곧장 동진으로 출발하라.‘ “
모용령은 아버지가 동진으로 망명했다는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하루 종일 결심을 못하다가 사냥 간다는 핑계로 사촌지간인 전연의 낙안왕 모용장에게로 피신했다. 왕맹은 즉각 모용령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표문을 장안으로 올렸다. 그 소식을 들은 모용수는 황급히 도망가다가 남전에서 사로잡혔다. 부견은 대범하게 이렇게 말했다.
“ 경의 아들이 고향이 그리워 돌아 간 것을 가지고
흉허물 잡을 수는 없을 것 같소.
장차 전연은 망하고 말 것이니
모용령도 거기서 살아남지는 못할 것이오.
제 발로 호랑이 굴로 돌아 간 것이 애석할 따름이요.
부자간이나 형제간에는 연좌되지 않으니
경께서 어찌 지나치게 두려워하며 일을 낭패할 수가 있겠소?“
부견은 마치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모용수를 대했다. 모용수는 부견의 대범하고 사려 깊음에 뼛속깊이 감탄했다. 전연에서는 돌아 온 모용령을 의심하여 조양 북쪽 600여리로 귀양보냈다. 귀양지에서 모용수 장자 모용령은 그 다음해에 모반을 일으키려다 발각되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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