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정치리더십 - 외천본민(畏天本民) <8> 국정(國政)의 근본 원칙과 목표 IV. 사람 중심의 바른 정치 3. 재판이 잘못됐다!②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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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3 재판이 잘못됐다!②
[고문이면 안 되는 것이 없는가(菙楚之下 何求不得者). : 수구문 살인사건]
서울 동쪽 지금의 광희문인 수구문 아래 초막촌에서 4월 9일 새벽에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초막에 머물던 중 한명이 명화도적에게 피살된 것이다. 같이 있다 살아남은 중 해전은 동네 석공들 소행이라고 제보했고 의금부는 즉각 주변 석공들을 잡아들여 문초했다. 잡혀온 자 중에 막산(김경의 노비의 남편)이 말하기를 서중, 박연, 두지, 부존 및 미마이의 5인 일당이 초막법당을 터는 과정에서 살인이 일어난 사건이라고 공술했다. 법당을 털고 얻은 장물은 자기 주인(김경) 집 다듬이 주춧돌 밑에 숨겨두었으며 자기 아내(김경의 노비)와 미마이 아내 장미가 이를 안다고 진술했다. 의금부는 장미를 매질로 문초했다. 장미남편 미마이가 다음날 그 장물을 캐내어 다른 곳에 묻으려고 하자 무어냐고 물었더니 네가 알 바가 아니고 비밀을 지키라고 하고는 그날 저녁에 다시 캐내어 갔다고 장미가 공술하였다. 또 다른 공술에서는 그날(10일) 캐내어 가져간 게 아니고 그 다음날(11일) 수사관이 와서 조사하고 간 뒤 의심이 들어 캐내어 다 태워버렸다고 장미가 말을 바꾸어 진술하였다. 장미의 진술은 오락가락했다.
수사관은 초막 근처에서 돌 깨는 사람 12명을 모두 불러 모으고는 증인인 해전스님으로 하여금 누가 범행을 자행했는지 지적하라고 했다. 해전스님은 부존, 박연, 서중, 두지의 네 사람을 지목하며 이들이 내가 본 도둑이라고 했다. 이튿날 부존 등의 옷을 바꿔 입게 한 뒤 다른 사람 20여명을 같이 세워 놓고 범인을 지목하라고 했더니 또 그 네 사람을 지적하면서 박연을 가리키며 ‘이 사람이 가장 악독한 사람’ 이라고 말했다. 해전은 내가 돌로 맞을 때 우연히 돌이 있어 도둑을 때렸으니 분명히 발에 상처가 남아 있을 것이며 현장에서 주운 가죽 끈도 가지고 있다고 증언했다. 마침 부존의 발에 상처가 있었고 가죽 끈은 부존이 항상 신던 신이었으므로 부존은 범인인 것이 명백해 보였다. 이대로 종결된다면 이들 5인은 사형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4월 19일 영서역에서 잡힌 강도범 박만과 망오지를 의금부가 문초하는 과정에서 법당의 장물이 나오게 되어 일체 범행이 이들의 소행으로 드러났다. 막산과 장미의 진술은 모두 매질을 면하기 위한 허위자백이었던 것이다. 세종이 이렇게 지적했다.
“매질 앞에서는 구해서 못 얻을 것이 무엇이냐는 말이 이것을 이름이다.
(菙楚之下 何求不得者乎 此之謂也 : 세종 13년 6월 2일)”
[사면 이전 일은 논란하지 마라(赦前之事 不可劾論).]
청주에 이촌이라는 만호(萬戶)에게는 첩과 아들 이자온이 있었다. 이촌의 질녀의 남편 조종생은 충청감사로서 이촌이 죽었을 때 장례에 들어가는 많은 물자와 후한 부의를 내리었다. 이에 고마움을 느낀 이촌의 아들이 이촌의 첩의 노비 한명을 조종생에게 주었다. 자기 노비를 조종생에 줘버린 것에 화가 난 이촌의 첩은 불법으로 뇌물을 받았다는 것으로 감사 조종생을 고발했다. 감사라는 고위직으로 있으면서 함부로 노비를 받는 것은 불법이므로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것이 사헌부 판단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명나라 영종의 즉위(세종 17년:1435)에 따른 대사면(세종 17년 2월)이전에 있었던 일이므로 책임을 물을 수 없었다. 다만 전에 조말생의 비슷한 사례가 있었기 때문에 이에 의거하여 처벌하자는 것이다. 그 사례란 세종 8년 3월 조말생이 불법적으로 36명의 노비를 받았는데 사면 전에 있었지만 사면 뒤에 발각이 났음으로 처벌하기로 하여 문제의 노비를 전부 관노로 삼은 일이었다. 원래 사면 전의 범죄는 ‘사면될 수 없는 죄’를 제외하면 일체 죄를 묻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세종은 이 사건에 대해 이렇게 판단한다.
“종생이 감사가 되었을 때에는 범죄가 드러나지 않았고, 사면의 글에
이르기를 ‘사면 전의 일로 왈가왈부하면 죄를 준다.’고도 하였다. 너희
사헌부는 법을 지킨다는 사람들이면서 사면 전의 일로 논박하는 것이
옳겠는가? (從生爲監司之時 所犯之事未箸 且赦文云 敢以宥旨前事 相
告言者 以其罪罪之 所以示信於民 今汝執法 以欲劾論赦前之事可乎
: 세종 18년 1월 12일)”
[그것은 아버지 유언을 가볍게 고치는 일이다(시경개부명,是輕改父命).]
부모가 일시적인 애증 등의 이유로 재산을 아들들에게 불균등하게 물려주는 경우에는 관가가 나서서 재산을 균등하게 나누어 주던 종래의 법<육전>을 세종은 시행하지 말도록 했다. 총제 정초가 이것의 부당함을 지적하였다. 재산을 적게 물려받은 아들은 아버지 노릇도 제대로 하지 못할 것이며, 결국 형제지간의 화목과 우의도 사라질 것이므로 천리와 화합하지 못하는 것이며, 또 민간의 불공평한 것을 관리가 다스리는 법이 있지 않았냐는 이유에서다.
세종은 그것이 <정자(程子)>의 말이라고 시인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옛말에 “이치에 맞는 유명은 좇지만 혼미한 상태에서 한 유명은 좇지 않는 것”이며 군왕의 말도 “정당한 의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면 좇지 않는 것”이라 했다. 그러니 민간의 잘못되고 부당한 부분을 관가가 고치는 것이 전혀 불가할 것이 없다는 말에 동의하는 듯 했다. 그러나 세종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반대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아버지의 명령을 경솔하게 고치는 것이다.
(然如此則是輕改父命也 : 세종 12년 9월 18일)”
이에 대해 정초가 다시 반문했다. 고생하는 아들은 결국 평민의 신분으로 떨어질 것이며 혹 죽은 부모가 다시 살아나서 그런 광경을 보게 된다면 필시 이 지경으로 되기를 바라지는 않을 것이며, 또 아들도 비록 입으로는 말하지 않더라도 남몰래 원망하는 마음이 왜 없겠으며, 똑같은 자식이 하나는 안락하고 다른 자식은 고생한다면 어찌 이것이 옳은 일이냐고. 세종은 그 말이 옳다고 했다. 그러나 세종이 그런 법을 없앤 이유는 그 법으로 인해 발생할 엄청난 문제점 때문이었다. 즉, 자녀들이 유언의 잘못되었음을 고발하고 다툼에 따라 발생하는 문제점을 생각해 보라는 것이었다.
“비록 부모 된 자의 망녕된 처사(유언)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빙자하여 소송을 일으켜 장차 고려시대 때와 같은 (혼란한) 결과가
오지 않겠는가. 그렇게 되면 법을 집행할 때 어려움이 없겠는가.
(然如此則 雖非父母病所爲 而托辭訴訟 將有如前朝之意決矣
官吏奉行之際 無乃有礙乎 : 세종 12년 9월 18일)”
즉, 자식들이 부모 유언의 진위나 진의를 의심삼아 문제를 삼고 소송을 거는 경우 과연 관리가 유언의 진위 여부를 제대로 판단 할 능력이 있겠느냐는 것이다. 옳은 일이라 하더라도 옳음을 보장할 수단이 없다면 그냥 두는 것이 더 낫다는 판단이 깔려있는 것이다.
[사실을 확인할 때 까지 형벌을 시행하지 말라(眞僞閱實間 姑勿行刑).]
김척은 태종 때 하급관리로 출발하여 주로 중국과의 외교나 무역관계 업무에 종사하던 사람이다. 중국에 말(馬)을 보낼 때 같이 동행하기도 하고 또 북경에 보내는 사신을 여러 번 동행하기도 하였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통사라는 낮지 않은 관직을 지내던 인물이었다. 세자(문종)가 중국황제에 조현할 때(세종 9년 10월 13일)에도 사역원판관으로 수행하기도 했다. 여러 번 밀수혐의를 받기도 했으나 별 문제 없이 빠져나왔었다. 세종 13년 1월에 김척의 밀수혐의가 또 포착되었다. 공인의 신분으로서 북경에 갈 때 약과 진주를 몰래 가지고 가서 백반과 납철로 바꾸어 왔으며 요동에서는 자기가 본국의 어사로써 모든 걸 조사하는 사람인 양 행세하면서 국사를 누설했다는 죄목도 덧붙여졌다. 사헌부의 판결에 따라 척은 국사를 누설한 죄로 참형에 처할 것이 확정되었다.(세종 13년 4월 7일) 형조도 같은 판결을 내렸다.(세종 13년 7월 4일) 사형죄의 경우에는 반드시 세 번 다시 검토해야 한다는 법(사죄삼복법,死罪三覆法)에 따라 의정부의 최종판결이 이루어졌다. 맹사성은 김척의 죄가 중하기는 하지만 목숨만은 살려주어 왕의 덕을 보여주자는 주장이었고 황희와 허조는 진주밀매나 어사위세는 용서할 만하나 요동인에게 국사를 누설한 죄만큼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는 주장을 폈다. 임금은 황희의 의견을 좇기로 했다. 장차 참형이 진행되려고 할 때 척의 어미가 탄원하여 말하기를 80이 넘은 나이에 아들이 셋이 있으나 하나는 폐질이고 다른 하나는 눈이 멀어 오로지 척을 의지하며 살아왔는데 이제 척이 형을 받는다면 장차 어떻게 살 수가 있겠냐는 것이었다. 임금은 즉각 형집행을 중단시켰다.
“사실을 확인 할 때까지 아직 형벌을 시행하지 말라.
(眞僞閱實間 姑勿行刑 : 세종 13년 10월 13일)”
그리고 5개월 뒤인 세종 14년 3월 김척을 첨지중추원사로 임명한 뒤 어머니의 뜻을 고려하여 어머니가 있는 고향근처에 그를 배치하였다. 확인되지 않은 사실로 공이 있는 김척을 죄를 줄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리고 김척이 2년 뒤 죽자 그 아들의 재간을 높이 사 채용하였다.
[판결을 지체하지 마라.]
판결이 지체되면 관련자들이 많은 피해와 불편함을 겪게 된다. 사형과 같은 중범자라면 문제될 것이 별로 없을 것이나 가벼운 경범죄를 짓고서 오래 갇혀 있으면 그만큼 피해도 크고 원망도 클 것이다. 세종은 이것이 궁금해 대언에게 물었다.
“내가 들으니 형조의 옥수들이 지체된 게 많다고 한다. 만약 죽고 사는
중범이라면 그만이나 대수롭지 않은 소송으로 오래 감옥에 갇혀
있다면 억울하고 원통함이 클 것이므로 형조관리를 불러 물어보라.
(予聞刑曹獄囚多滯 若關係死生者則己矣 以不緊訴訟 久在牢獄 冤抑不小
其召刑曹官吏問之 : 세종 14년 3월 22일)”
형조좌랑 이백첨이 대답하였다.
“요사이 대성이 번갈아 최고 책임자가 되므로 해서 낭관의 견해가 일치
되지를 못하였고 또 오래된 옥수를 먼저 국문하기 때문에 죄가 가벼운
사람도 지체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近因臺省交坐 郎官不齊 且先鞫久獄
故罪輕之人 或有滯獄者 : 세종 14년 3월22일)”
세종은 아무 말이 없었다. 옥사가 지체되어 백성들의 고통이 크지만 형사재판의 현실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공정한 판결을 위해 사헌부 사간원 형조가 번갈아가며 재판하므로 의견일치가 어려운 데다가 중범부터 처리하다보니 옥사가 지체되는 현실을 세종도 어쩔 수가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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