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정치리더십 - 외천본민(畏天本民) <2> 국정(國政)의 근본 원칙과 목표 I. 충녕이 왕이 되다 ②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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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3 양녕대군과 충녕대군
이제 세자 양녕의 길은 탄탄해졌다. 세자가 집권하면 권력을 농단할 외삼촌 민무구 일당이 제거된 것이었다. 태종이 세자와 대군 공주들과 함께 망년회를 열고 있던 중이었다. 태종은 충령에게 싯귀를 주면서 해석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충령은 기막히게 시를 풀어 뜻을 해석했다. 태종이 열여섯 살 충령을 자랑스러워하며 세자에게 말했다.
“장차 너를 도와 큰 일을 해결해 낼 사람이다.
(將佐汝斷決大事者也 : 태종 13년 12월 30일)”
양녕도 동생이 대단하다고 칭찬했다. 태종은 충녕에게 열심히 인생을 즐기라고 말했지만 앞으로 별 다른 역할과 할 일이 없을 충녕이 아깝긴 했다. 그러나 충녕은 마냥 즐거웠다. 서화, 화석(化石), 악기, 장난감 등 온갖 재미에 탐닉했다. 충녕이 유난히 악기를 잘 탔으므로 세자도 그것을 동생에게 배웠다. 두 형제 사이는 매우 화목했다. 그러나 두 형제가 장성하면서 자질의 차이는 확연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양녕은 멋 부리는 것을 좋아했다. 잔뜩 차려입고는 시종에게 어떠냐고 물었다. 옆에 있던 충녕이 형을 꼬집으며 말했다.
“먼저 마음을 바로 하신 다음에 모양새를 가꾸시기 바랍니다.
(願先正心 而後修容 : 태종 16년 1월 9일)”
이 말을 곁에서 들은 시종들은 하나같이 탄복했지만 양녕만은 불쾌하고 부끄러웠다. 어머니 원경왕후에게 충녕은 매우 어질고 현명하여 대사를 함께 의논할 상대라고 말하긴 했지만 속마음은 시원스럽지가 않았다. 원경왕후 민씨가 충녕을 대견하게 생각하고는 양녕에게 들은 말을 태종에게 전했지만 태종도 개운치가 않은 것은 양녕과 매 한가지였다.
하루는 태종이 “비가 오는 날 집에 있는 사람은 반드시 길 떠난 가족을 생각할 것이다.”라고 하자 충녕은 바로 <시경,詩經>의 한 구절을 인용했다.
“황새가 논둑에서 우니 아낙은 방안에서 탄식하네.
(鸛鳴于垤 婦嘆于室 : 태종 16년 2월 9일)”
기가 막힌 대답이었다. 열아홉 젊은이가 즉석에서 <시경>을 외우다니 이렇게 총명할 수가 있을까. 태종은 기쁜 마음을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세자가 (충녕을) 따라 갈 수가 없겠구나.
(非世子所及 : 태종 16년 2월 9일)”
양녕은 아버지의 충녕 칭찬에 못마땅해 할 수밖에 없었다.
“충녕은 용맹하지 못합니다.
(忠寧不猛 : 태종 16년 2월 9일)”
태종이 웃으면서 이렇게 대꾸했다.
“비록 용맹하지 않을지는 몰라도 중대사에 임하여 큰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는 당대에 견줄 사람이 없을 것이다.
(雖若不猛 臨大事 決大疑 當世無與爲比 : 태종 16년 2월 9일)”
I.4 양녕대군의 패륜
양녕은 열네 살 되는 태종 7년(1407)에 김한로의 딸과 결혼했다. 그러나 열일곱 살 때부터 외도에 탐닉했다. 잔치에서 봤던 봉지련이라는 기생을 몰래 궁으로 불러들였다.(태종 10년 11월 3일) 궁으로 기생을 불러들이다니! 그것도 세자라는 사람이. 경악한 태종은 세자 측근들에게 엄한 벌을 주는 한편 봉지련에게는 비단을 주어 무마하려했다. 그러나 양녕은 담을 타넘고 빠져나가 봉지련을 만났다. 시종들이 극구 말렸지만 궁 바깥에 측근 앞잡이(은아리, 이오방)까지 포섭해 놓고서는 수시로 담을 넘어 외도를 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궁 안에서 금지된 매를 기르는가 하면 수시로 기생파티를 열었다. 주변 모두가 기겁하여 말렸지만 그걸 들을 양녕이 아니었다. 결국 태종이 그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양녕의 측근들에게 책임을 물려 엄한 징계를 내리려 하자 양녕은 단식투쟁으로 태종에게 대들었다. 결국 단식을 풀라고 태종이 설득하며 애걸하는 상황까지 되어 버렸다.
양녕은 이제 태종을 갖고 놀기 시작했다. 기생을 동궁으로 불러들이는 것은 물론 큰 아버지 정종의 기첩 초궁장을 가까이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큰아버님 여자라는 것을 몰랐지만 알고 나서도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태종은 격노했다. 초궁장을 쫒아내긴 했지만 그 다음에는 칠점생이라는 여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 여자는 양녕의 큰 매형 이백강의 애첩이었다. 충녕이 그런 양녕을 저지하고 막았다.
“어떻게 일가끼리 저렇게 서로 통할 수가 있습니까.
(豈可親中 自相如此也 : 태종 16년 3월 20일)”
충녕은 여러 차례 양녕을 말렸다고 했다. 양녕도 하는 수 없이 충녕의 말을 듣긴 했지만 속으로는 분을 삭이며 “나와 너의 도는 다르다!”고 내뱉었다고 기록되어있다(태종 16년 3월 20일). 초궁장과 칠점생 다음으로 양녕에게 나타난 여자는 곽선의 첩 어리였다. 어리를 양녕에게 소개한 사람은 측근 바람잡이 이오방이었다. 이오방은 알고 지내는 사이였던 곽선의 조카사위 권보에게 부탁했고 권보는 자기 첩을 통해 어리에게 접근했다. 처음에는 어리가 거부했다. 그러나 양녕은 어리에게 선물을 보냈고 어리는 자기 양자인 이승에게 그 사실을 일렀다. 그날 밤 양녕은 이승의 집에 몰래 숨어 들어가 이승을 협박하고 어리를 납치하여 결국 궁으로 데려왔다(태종 17년 2월 15일).
이 사실은 우연하게 태종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양녕의 장인 김한로의 종이었던 전별감 소근동이 동궁 무수리와 사통하고 있었는데 이를 알게 된 김한로가 태종에게 그 사실을 고했다. 국문을 당하던 소근동은 엉겁결에 양녕과 어리의 관계를 실토해 버린 것이다. 태종은 격노했다. 이원과 조말생을 불러 ‘태갑(太甲)의 고사’를 본받으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태갑의 고사’란 은나라 시조 성탕의 손자 태갑이 즉위 후 3년 간 포악한 정치를 한 까닭에 이윤이 그를 내쳤는데 3년 뒤 반성하고 돌아와 성군(태종)이 되었다는 고사를 말한다. 즉, 세자를 당분간 내 쫓은 다음에 다시 불러들이자는 것이었다.
이원 변계량 등 태종의 대신들은 양녕의 품성이 좋으므로 주변 인물을 제거하고 교육만 잘 시키면 될 것이므로 굳이 밖으로 내칠 필요는 없다고 했다. 대신 양녕은 스승 변계량의 설득으로 긴 반성문을 썼다(태종 17년 2월 22일). 그리고 조상 종묘에도 반성하는 글을 올렸다. 물론 직접 쓴 것이 아니라 변계량이 대신 쓴 것이다. 그리고 양녕 곁에서 비행을 부추긴 바람잡이 구종수, 구종지, 구종유 형제와 이오방을 참하였다(태종 17년 3월 5일). 임상좌의 양녀를 양녕이 간통한 사실이 또 드러났지만 그 건은 덮어두기로 했다.
여자문제가 막 아물려고 하던 차에 또 사건이 불거져 나왔다. 방유신의 손녀가 미색이 뛰어나다는 소문을 듣고는 양녕이 그 집을 잠입하여 내통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곽선의 첩 어리를 몰래 궁 안으로 다시 불러들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어리가 임신하자 세자빈 김씨의 할머니가 어리를 데리고 궁 밖으로 나가 아이를 낳기까지 하였다. 태종은 한 참 동안 이 사실을 숨기고 있다가 지신사 조말생을 불러 말했다.
“세자의 행동이 저 모양이니 어떻게 하나. 어떻게 해야 하나.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然世子之行 至於如此 奈何奈何 其將奈何 : 태종 18년 3월 6일)”
I.5 충녕대군의 세자책봉
개성에 와있던 태종은 일단 양녕을 서울로 내쫓고 왕을 알현하지 못하도록 했다(태종 18년 5월 10일). 서울로 쫓겨 가던 양녕과 충녕이 길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양녕이 버럭 화를 내며 “어리의 일을 네가 고자질했지?”라고 다그쳤다. 충령은 아무 말이 없었다. 한참 동안 서울로 돌아가던 양녕을 태종이 다시 불러 꾸짖자 화가 난 양녕은 태종에게 대들었다. 충녕이 극구 말렸지만 분을 삭이지 못한 양녕은 태종에게 분노에 찬 상서를 올렸다.
“ ... 여자를 궁궐로 들인 것은 사실이지만 아버지나 할아버지 태조도
여자를 모두 신중하게 고르고 골라 들인 것이 아니지 않는가.
또 그 여자를 내보내면 밖에서 욕먹고 박대당할 것 같아 궁 안에 둔 것인데,
전하가 여러 여자를 내쫓으므로 바깥에서는 원망이 가득한데 왜 전하 잘못은
모르고 있는가. 착한 일을 하라고 책망을 해도 꾸짖으면 정이 떠나는데
그 보다 더한 불행은 없지 않지 않는가. 아직까지 악기의 줄을 일부러
끊는 일을 하지는 않았으며 앞으로도 계속 음악과 여색을 참을 생각이 없으니
이대로 살겠다.
내가 앞으로 큰 효자가 되지 않으리라고 어떻게 전하는 장담하는가.
장인 김한로는 전하의 죽마고우인데 그 우정을 저버리는 것은 어찌 포악한 일이
아닌가. 그러면 김한로 같은 공신들이 모두 위태롭다고 느낄 것 아닌가.
앞으로 스스로 새로운 길을 가서 털끝만큼도 전하가 심려하지 않도록 하겠다
(태종실록 18년 5월 30일).”
이것은 반성문인가 협박문인가. 태종은 기겁하여 할 말을 잊었다. 양녕에게 더 이상 한 가닥의 희망도 없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몇 번 더 설득하려 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의정부와 육조와 삼군도총제부와 삼공신 등 대소신료 모두 양녕의 세자폐위를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도록 했다(태종 18년 6월 2일). 태종은 바로 그 다음날 양녕을 폐세자하여 경기도 광주로 내쫓고 대신 충녕을 세자로 세웠다(태종 18년 6월 3일). 양녕의 아들로 세자를 삼는 생각도 했지만 어진 충녕이 세자가 되는 것이 하늘의 도리라고 생각했다.
I.6 충녕에게 왕위를 물려주다.
태종은 충녕을 세자로 책봉하고 나서 한 달 만인 태종 18년 7월 6일 전격적으로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주겠다고 발표했다. 태종은 이미 여러 번 전위의 뜻을 밝혔던 적이 있었다. 태종 6년 8월 18일에 처음 꺼냈었고 그 다음은 태종 9년 8월 11일과 태종 10년 10월 19일의 양위 소동이었다. 그러나 이번의 네 번째 양위는 달랐다. 똑똑하고 든든한 충녕이 세자로 책봉된 데다가 가뭄이 계속되는 것을 보면 하늘로부터 신임을 받지 못하는 것 같기만 했다. 이제 물러나야 할 때라고 직감했다. 사냥을 즐기는데다 병도 있고 또 아끼는 성녕마저 죽었으니 좀 쉬고 싶기도 했을 것이다.
태종은 여섯 대언을 불러 양위할 뜻을 분명하게 말했다. 모든 신료들이 양위만은 안 된다고 말렸다. 영의정 한상경, 좌의정 박은, 우의정 이원, 육조 판서 모두 반대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태종은 양위의 문제는 신하들이 간섭할 성질의 문제가 아니라고 하였다. 대언들이 눈물을 흘리며 말렸지만 다 내보냈다. 지신사 이명덕에게 국보(옥쇄)를 가져오라고 호통을 쳤다. 그리고 그것을 충녕에게 넘겨주었다. 충녕이 머뭇거리고 망설이자 지신사 이명덕이 “성상의 뜻이 결정되었으니 효를 다하여 받으시라.”고 거들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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