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훈의 파리 구석구석 돌아보기(5)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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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어제 결심했듯이 쉬는 날로 정한 날입니다. 그래서 오전 9시 조금 넘어 호텔에서 500m 정도 떨어져 있는 뤽상부르 공원 (Jardin du Luxembourg: 뤽상부르 정원이 더 정확하겠지만 상당히 넓어서 보통 공원으로 번역됨.)으로 갔습니다. 벤치라도 있으면 바람이나 쇠면서 쉬자는 생각에서였습니다. '빠리지앵 흉내내기' 두번째 요소인 Le Monde는 가는 길에 사 들었습니다. 오늘 빠리 아침 날씨는 18도 전후였는데 바람이 조금 불어올 때는 얇은 잠바라도 넣고 나설 걸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춥다고 느낄 수준으로 시원했습니다. 어제까지 그늘쪽을 찾아서 걷던 우리가 햇볕이 따뜻한 쪽을 찾아 걸었으니까요. (한국은 점점 더워지는 것 같은데 죄송하네요.)
도착한 날 겉모습만 봤던 생쉴삐스 성당의 내부도 둘러보고 하느라 10시 조금 넘어 공원에 도착했는데, 공원에서는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좋은 의자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페인트칠을 잘해서 비가 와도 손상이 없도록 해놓은 튼튼한 철제의자들이 필요에 따라 옮길 수 있도록 놓여 있었네요. 게중에는 약간 뒤로 기울어져 있는 의자도 있어서 거기 앉아서 가끔 눈에 띄는 프랑스 사람들을 쳐다보기도 하면서 Le Monde를 잘 읽었습니다. 오늘은 홍콩 데모대 학생들이 의회에 난입하면서 위기에 몰렸던 홍콩정부가 오히려 힘이 되살아날 수도 있는 상황이라는 기사가 머리기사로 다루어졌네요. 국제유가를 둘러싼 국제정치, 프랑스 암발생 증가 현상, 갑자기 늘어난 중고의류 거래 등의 기사들을 읽고 매일 실리는 수도쿠 문제 하나 푸니 오전 시간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그동안 아내는 공원 내에 있는 Palais du Luxembourg (지금은 상원인 Senat가 사용) 주변을 거닐고 왔다고 하네요.
12시 조금 안 되어서 공원을 둘러보러 일어섰더니 상원이 초대한 미술전 세 개가 부설건물 Orangerie (일종의 열대식물원)에서 열리고 있어서 간단히 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이탈리아 메디치가에서 프랑스왕 앙리4세에게 시집왔다가 왕이 죽자 쓸쓸해진 Marie가 원해서 지은 궁전인 Palais du Luxembourg와 거기에 조성된 전형적인 프랑스 왕궁의 정원 (베르사이유 정원의 축소판)을 둘러보았습니다. 정원 한 가운데 연못도 있는 것이 정석이지요.
그러다보니 점심 시간. 공원을 나와서 프랑스를 빛낸 위대한 사람들을 모신 일종의 현충원 같은 빵떼옹 (Pantheon)으로 향했습니다. 가는 길에 도로변에 있는 식당 Comptoir de Pantheon을 택해 앉아 오늘의 요리로 제시된 쇠고기 요리와 생선 요리를 하나씩 시켜서 맛있게 먹었습니다. 학생 시절에는 엄두도 못내서 가격도 쳐다보지 못했던 식당이었는데 둘이서 커피까지 시켜먹고 난 비용이 36.60유로였네요. 분위기와 맛 두 가지의 만족도를 생각하면 가성비가 매우 높았다고 할 수 있지요. 커피를 마실 때쯤 우리 바로 옆에서 식사하던 프랑스 커플에 말을 건넬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 커플도 이미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듯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제가 가까이 있는 빠리1대학교를 졸업해서 왔다고 하니, 그쪽 여자는 자신은 빠리4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했다고 하고 조카가 한국청년이랑 결혼해서 한국에 대해 조금 안다고 인사를 건넸습니다. 대뜸 친해져서 사진도 함께 찍었습니다.
오늘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제 모교인 빠리 1대학 (Universite Paris I: Pantheon Sorbonne)을 방문한 일입니다. 우리나라나 미국의 대학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넓은 캠퍼스를 가진 빠리 대학들은 소수입니다. (외곽으로 나가면서 캠퍼스를 확보한 대학들이 몇몇 있지만요.) 빠리 1대학도 마찬가지. 사방에 도로를 면하여 주변건물들과 비슷한 높이로 지어진 큰 장방형 건물 안에 조그만 안뜰인 Court가 있는 정도이지요. 그런데 요즘 빠리가 테러공격을 자주 당하다보니 그런지 들어가는 입구에 경비가 섰습니다. 용무가 확인되는 사람만 들여보낸다는 뜻이지요. 전형적인 관광객 차림의 저를 들여보내줄 확률은 낮아 보였습니다. 그래도 경비에게 다가가서 빠리 1대학의 다른 캠퍼스 이름까지 언급하면서 "30년 전에 이곳을 졸업한 사람인데 여기서도 수업을 들었다."고 하면서 잠시만 둘러보겠다고 했더니 아내와 함께 통과시켜 주네요. 그래서 학교 안내실, 작은 카페테리아, 복도 등을 둘러보고 마지막에는 프랑스를 위해 전쟁에 참여하여 숨진 학생들을 추모하는 조각 앞에서 사진도 찍었습니다. 요즘 제 글을 읽어주시는 선배교수님 한 분이 저에게 이곳을 들르면 꼭 이 사진을 올려달라고 부탁하시면서, 프랑스는 나라를 위해 숨진 사람들을 이렇게 추모하는데 우리나라는 언제 그런 분위기를 만들 수 있을지 걱정하셨습니다. 이어서 제가 수업 전후에 들러 책을 읽기도 하고 자료 복사도 하던 뀌자스 도서관도 같은 방법으로 들어가 사진 찍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학교 옆에 있는 빵떼옹으로. 실은 학교 다닐 때나 OECD 근무할 때 모두 바쁘다는 핑계로 앞의 뤽상부르 공원도 이곳 빵떼옹 내부도 들어가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고백해야 하겠습니다. 빵떼옹에는 주로 프랑스를 빛낸 철학가, 소설가, 과학자들 중에서 엄격한 심사를 거쳐 통과한 사람들만 묻혀 있는데, '레미제라블'의 작가 빅토르 위고가 이곳에 들어오기로 결정되었을 때 개선문에서 출발한 운구행렬이 샹젤리제 거리를 거쳐 이곳에 이르는 6Km를 지나가는 동안 빠리 시민들의 대단한 성원이 있었다고 하는데, 프랑스 축구대표팀이 1998년 자국에서 개최된 월드컵에서 우승했을 때의 빠리 시민들의 성원 정도를 이 행사에 비교할 정도이니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 같습니다. 빅토르 위고라고 해서 적이 없을 리 없었겠지만 위대한 한 작가의 죽음을 기린 프랑스인들의 추모 태도는 우리 국민들도 곰곰이 되씹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저희 부부는 우리 귀에도 익숙한 볼테르, 루소, 빅토르 위고, 퀴리 부부, 그리고 유럽연합의 아버지 장모네 등의 묘소를 둘러보았습니다. 빵떼옹 지상층에 설치된 푸코의 펜듈럼과 빵떼옹 뒤에 서 있는 생에티엔느 뒤몽 성당 (Eglise St Etienne du Mont) 사진도 담습니다.
오후 시간이 길어지면서 슬슬 지쳐가는 가운데 빠리4대학 입구로 갔습니다. 여기는 더욱 경비가 삼엄해서 입구마다 3인조의 경비들이 지키고 있었는데 이 경비들은 아주 단호하게 용무없이는 방문이 불가능하다고 해서 들어가보지는 못하고 입구만 찍었습니다. 관광용 작은 기차 뒤로 이들 3인조 경비들과 우리처럼 들어가기를 시도하다가 실패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실 수 있습니다. 빠리가 테러 때문에 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이런 곳에서 실감할 줄은 몰랐네요. 그나저나 빠리 대학들은 1에서 13까지의 번호를 매겨 구분합니다만 공식 이름 뒤에 이들 대학의 옛 명칭을 별칭처럼 붙여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Universite de Paris I: Pantheon Sorbonne 식으로 말입니다.) 그 중에 1에서 4까지의 대학에 Sorbonne의 별칭이 붙는데, 제 모교가 1대학이지만 제가 겪은 바로는 프랑스 사람들의 대부분은 인문학, 철학, 역사학 등이 강한 빠리 4대학을 Sorbonne 대학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어쩌면 프랑스가 이 분야에서 세계를 이끄는 큰 학자들을 계속 내놓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즉, 프랑스 사람들이 이른바 문사철 세 분야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기에 이 분야에서 상대적인 경쟁력을 가지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지요. 상대적으로 경제학과 같은 실용학문에서는 그런 수준의 경쟁력을 보이지 못하는 것은 아쉬운 점입니다.
돌아오는 길에 한 곳을 더 들러야 합니다. 과거 빠리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을 당시에 만들어져 있던 옛 목욕탕 시설 (therme라고 합니다.) 옆에 세워졌던 수도원의 이름을 딴 끌뤼니 박물관입니다. 밖에서도 약간 보이는 로마시대 벽면을 잘 보존하고 있고 박물관 안에서는 목욕탕 시설의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박물관에서는 추가적으로 전통적인 종교장식에 대한 전시도 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저는 프랑스식의 교육현장을 또 목격하였습니다. Auvers sur Oise의 성에서 본 광경과 비슷한 모습을. 독실한 신앙인으로 보이는 나이 많은 선생님이 유치원생들 앞에서 타피스리의 그림을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는데, 주된 가르침의 내용은 그 분의 설명이 아니라 아이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그 아이들이 (제가 듣기로는 엉터리 같은) 대답을 하곤 하는 과정이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과거 저희 큰 딸이 다니던 프랑스 루앙의 초등학교에 수업참관을 갔을 때 미술시간에 선생님이 엄마를 그리라 했더니 세모만 그린 아이에게 "와! 엄마가 이런 멋진 모습이구나. 그 엄마에 대해 말해보렴."하고 아이의 상상력을 기죽지 않게 하던 장면이 연상되었기에 더욱 그러했습니다. 이러다보니 '쉬려고 한 날'에도 1만1천보를 넘게 걸어버렸습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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