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찬동의 문화시평 <20> 국립 백남준 미술관 건립을 꿈꾸며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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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서울시는 서울시립미술관이 운영하던 창신동 ‘백남준 기념관(이하 기념관)’을 폐관키로 했다가 미술계의 반발에 부딪혀 이를 급히 철회했다. 향후 시설과 콘텐츠를 활성화할 계획이라 한다. 결과적으로 잘된 일이긴 하지만, 단순히 예산 대비 운영의 비실효성 차원에서 폐관의 논의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서울시의 문화 경제적 관념의 한계를 보는 것 같아 답답함을 떨칠 수 없다.
문제가 된 장소는 백남준의 어린 시절 자라던 집터의 일부로 2017년 서울시가 창신동 일대를 도시재생 1호 지역으로 지정하면서 이곳 한옥을 개조하여 기념관으로 조성, 운영해 왔다. 무분별한 개발을 막고 지역의 역사·문화를 보존하기 위한 명분으로 추진해온 도시재생 프로그램이 해제되면서 이 지역은 아파트 중심의 재개발을 앞둔 상황이다.
이 기념관은 그 규모는 작지만, 상징적인 기념비적 공간으로서 그나마 백남준이라는 거장을 기리는 국가적 체면을 유지하던 곳이었다. 폐관 소식을 접한 미술계는 ‘문화가 중심이 되는 나라’, ‘K-아트 세계화 원년’을 표방하는 정부의 정책이 구호에 불과한 것인가를 의심하며 참담한 마음이었다. 정부와 서울시 지방자치 단체의 정책이 따로 놀고 있었다는 것인가? 서울시의 폐관 철회를 접하며 차제에 좀 더 본격적으로 이 공간이 활성화할 수 있는 야심 차고 담대한 계획을 세워보는 것은 어떨까 생각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기념관은 현재의 30평도 안 되는 작은 공간이지만, 실제 백남준이 살던 집터는 이 일대 전체를 차지하는 큰 저택이었다 한다. 이 지역을 재개발하여 아파트 단지만을 조성할 것이 아니라 이곳 원래 그의 집터 전체를 사들여 백남준 미술관을 조성하는 방안을 검토해보면 어떨까? 물론 경기도 용인에 경기문화재단이 운영하는 ‘백남준 아트센터’가 있다. 하지만 규모도 크지 않고 접근성도 떨어지며, 문화재단의 운영 능력 제약으로 백남준의 세계를 좀 더 본격적으로 확산시키기엔 역부족이다. 그리고 그곳은 백남준과 아무런 연고도 없이 단순히 그가 수원 백씨라는 이유에서 그곳에 공간을 건립한 것이다.
최소한 연고가 있는 곳에 본격적으로 국가적 차원에서 미술관을 건립하는 것은 의미가 크다 할 것이다. 그는 한국현대미술을 넘어 세계적으로 한국 미술의 대표적 브랜드이다. 그는 오래전부터 세계 미술계에 보이지 않는 영향력을 가지고, 1995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건립, 휘트니 비엔날레 한국전 유치 등 우리 미술의 해외 진출과 국제교류를 위해서도 많은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간 우리는 백남준에 대해 너무도 인색했다. 해외에서 힘들게 활동할 때 조국이 그를 기억하거나 도움을 준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때에 따라서는 그의 명성이 국내에 알려질까 봐 일부러 정보를 차단하던 화단의 분위기도 없지 않았다. 필자가 문화예술위원회 재직시절, 특별한 용무로 뉴욕의 백남준 스튜디오를 찾았을 때, 부인 구보다 시게코 여사에게서 들었던 “한국은 백남준에게 너무도 인색하다”라는 불만에 찬 이야기는 여전히 귀에 쟁쟁하다. 실제로 우리는 그에게 해준 것이 별로 없다.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는 세계적 거장으로서의 위상을 가진 백남준은 사실 미국, 독일, 일본 등 그가 생활했거나 연관을 맺은 국가들에선 어떻게든 그의 브랜드적 가치를 자국의 문화에 접목하려는 세련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 점을 생각할 때, 우리의 무딘 태도는 참 부끄럽기 짝이 없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미국은 2006년 그가 타계하자마자 그의 작업실에 있던 작품과 아카이브는 물론 먼지 한 톨까지도 스미스소니언 미술관으로 옮겨 갔다. 그가 뒤셀도르프 대학 교수로 재직했던 독일의 경우, 1963년 독일 부퍼탈에서의 첫 개인전 이후 30년이 되는 해인 1993년 그를 베니스비엔날레 독일관의 작가로 출품케 하여 '전자 초고속도로'로 황금사자상을 수상케 했다. 그뿐만 아니라 서거 1주기를 맞는 2007년 뒤셀도르프를 운행하는 트램에 랩핑 광고를 씌워 그를 추모했다. 그런가 하면 일본 역시 그가 도쿄에서의 대학 생활과 일본 작가들과 함께 뉴욕의 플럭서스 활동에서 보여준 일본의 선(禪) 사상을 연결해 그를 일본문화의 맥락에서 여러모로 조명하고 있다.
여러 요소를 종합하여 전 세계 작가들의 순위를 매일 발표하는 <ARTFACT>의 기록을 보면, 100위 안에 드는 한국 작가는 오직 백남준뿐이며 그는 전 세계 시각예술가 중 17위를 차지하고 있다. 박서보나 이우환 등 국내에서 명성을 얻고 있는 작가들은 그저 내수용 작가들일 뿐, 그 어느 작가도 그 리스트에는 아직 등장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에게는 백남준을 기리는 공간은 경기도 용인에 자리한 ‘백남준 아트센터’와 창신동의 ‘백남준 기념관’이 전부이다. 경기문화재단이 운영하는 용인의 ‘백남준 아트센터’는 백남준 관련 상설전과 기획전, 아카이브 구축, 백남준 미술상 등을 운영하며 나름대로 명맥을 이어 가고 있지만, 소장품의 규모나 연구 역량 등은 여전히 국제적 수준에 비해 열악함을 면치 못하고 있다. 백남준 미술상은 한국뿐만 아니라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NRW) 예술 재단에서도 운영하고 있는데 국내의 그것보다 훨씬 더 국제적 지명도를 가지고 있는 실정이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백남준의 위상은 현대미술이라는 산맥에서 피카소, 마르셀 뒤샹의 뒤를 잇는 세계적 거봉임은 부인할 수 없다. 단순히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로서뿐만 아니라 이후의 다양한 미디어 기반의 미술을 아우르며 서구 중심의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을 뛰어넘는 독자성을 가진 인물이다. 1984년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을 통한 생중계 쇼인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미래 정보사회 속에서 예술의 가능성과 해체된 형식을 통해 전 세계를 하나로 묶었다.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던 '전자 초고속도로'로는 웹 기반 사회의 미래를 예견하며 과거 몽골 등 유목민족이 세계를 재패하며 운영하였던 역참제도와 연결 지어 과거와 미래를 관통하는 시각을 드러내었다. 또한 단군을 동아시아의 대표적 샤먼으로 인식하는 세계관을 보여주며 한국 미술의 세계적 위상의 단초를 제시한 바 있다. 그는 자기의 동료인 요셉 보이스와 샤머니즘적 사유를 공유하고 있는데, 1990년 한국의 갤러리현대에서 굿을 매개로 펼쳐보인 퍼포먼스가 그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
우리는 경제력에 걸맞은 문화강국으로서의 면모를 보이기 위해 다양한 정책적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한류와 K-컬쳐의 영향력을 세계 곳곳에 확산시키려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새로운 한류와 K-컬쳐의 콘텐츠를 발굴하는 일은 무척 치밀한 전략이 필요한 일로 많은 전문인력과 재원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이미 구축된 백남준이란 원천 콘텐츠를 살리는 방향엔 매우 둔감한 실정이다. 새로운 콘텐츠 개발도 중요하지만, 기존의 자원을 끊임없이 재가공하고 평가하고 홍보하는 일이 더욱더 효율적이라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따라서 백남준이 가진 문화적 상징성과 가치를 활용하기 위해 그의 세계를 보존하고 발굴하고 연구하는 일의 전진기지가 될 미술관을 만드는 일은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이다. 흩어져 있는 그의 대표작들을 모으고, 그에 대한 다양한 아카이브를 축적하며, 그가 남긴 미술사의 족적들을 지속해서 재평가해야 한다. 한국문화의 국제적 영향력을 구축하는 일을 위해 미술관의 역할은 가장 핵심적 요소이다. 서울시가 미봉책으로 ‘백남준 기념관’의 폐관을 철회하고 운영을 활성화하겠다는 계획의 수준이나 규모가 어떠할지 알 순 없으나 기존의 공간 규모 안에서 사업을 보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차제에 서울시의 차원이 아닌 국가적 차원에서 좀 더 야심 차고 담대한 계획을 수립하는 것은 어떨까? 창신동 재개발 계획에 국제적 규모의 국립 백남준 미술관을 건립을 포함하는 방안이 그것이다. 백남준의 작품은 물론이고 그와 교류하던 많은 국제적 작가들의 작품을 소장하며 백남준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들이 오가게 하고 백남준의 이름으로 세계적인 작가들을 대상으로 수상자를 길러내는 것이다. 그들은 하지 말라 해도 백남준과 한국 미술의 옹호자들이 될 것이다. 미술관은 백남준의 창의적 정신을 공유하고 있는 빼어난 한국 작가들을 국제적 맥락에서 평가받을 수 있는 발판이 될 것이다. 이를 통해 한국 미술의 정체성과 독자적 위상을 전 지구적으로 높여가며 미래의 세계미술을 이끄는 계기를 만드는 것이다. 정부의 국립미술관 종합건립 계획에 반영하고 조속히 국가의 문화적 역량을 모아 국립 백남준 미술관 건립에 착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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