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망하게 하는 확실한 법칙-혼군 #10 : 정통의 전량(前涼)을 실질적으로 무너뜨린 장조(f)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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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군(昏君)의 사전적 정의는 ‘사리(事理)에 어둡고 어리석은 군주’다. 암주(暗主) 혹은 암군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정의하고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혼군의 숫자는 너무 많아져 오히려 혼군이라는 용어의 의미 자체를 흐려버릴 가능성이 높다. 역사를 통틀어 사리에 어둡지 않 은 군주가 몇이나 될 것이며 어리석지 않은 군주가 몇 이나 되겠는가. 특히 집권세력들에 의해 어린 나이에 정략적으로 세워진 꼭두각시 군주의 경우에는 혼주가 아닌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의 혼군 시리즈에서는, 첫째로 성년에 가까운 나이 (17세) 이상에 군주가 된 사람으로서 둘째로 상당 기간(5년) 군주의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군주의 역할이나 올바른 정치를 펴지 못한 군주로써 셋째로 결국 외부 세력에 의해 쫓겨나 거나 혹은 제거되거나 혹은 돌연사 한 군주로써 끝으로 국가의 존립기반을 크게 망쳐 놓은 군주를 혼군이라고 정의하였다. |
(31) 동진 유익의 중원 경략(AD343)
동진의 북쪽에는 석륵의 후조가 세력을 크게 확장하고 있었고 서쪽에는 성한의 이웅이 죽은 뒤(AD334) 이반, 이기, 이수의 뒤를 이어 이세(혹은 이시)가 계승하면서 국력이 급격히 쇠락하고 있었다. 당시 동진조정의 군권 실세는 안서장군 형주자사 유익(庾翼)이었다. 유익은 유량의 동생으로써 유역과 함께 삼형제가 동진 성제 사마연과 강제 사마악 형제의 외숙이었다. 그러니까 동진 명제 사마소의 아내 유문군(庾文君AD297–AD328)가 유익 삼형제의 누이였다.
AD340년 36세 유익의 직책은 도독강형사옹양익육주제군사 및 안서장군 형주자사로 무창(지금의 무한)에 진수하고 있었다. 나이가 젊어서 사람들이 가볍게 보았으나 직무를 수행하는데 정성을 다하고 엄정하게 군기를 다스려 잡았기 때문에 공사가 분명하고 재주가 크다고 칭찬이 자자했다. 그러나 울분을 참지 못하는 성격에 공명을 세우기 좋아하는 약점이 있었다. 유익은 20대 약관 환온을 성제 사마연에게 추천했다. 환온은 호방하고 상쾌한 성격을 지녔고 기풀과 기개가 남달랐다고 기록되어있다. 명제 사마소의 사위이기도 했다.
유익의 계획은 전연의 군주 모용황과 양왕 장준과 연대하여 성한 이수와 후조 석륵을 공격하는 것이었다.(AD343년 7월) 유익의 이런 북벌계획에 대해 친척 유빙과 친구 환온과 종실사마무기만 지지했고 나머지 군신들은 대부분 반대했다. 동진 조정은 환선을 도독사옹양삼주형주지사군제군사 및 양주(梁州)자사로 삼아 단(丹)수(장강의 지류인 한수의 양번 지역 지류)로 진격시키고 환온은 전봉도독으로 임회(강소성 우태)방면으로 진출했다. 유익의 북벌군을 위한 대대적인 마소징발과 노복 수레 동원으로 백성들이 깊이 한탄했다.
북벌준비를 대충 마친 AD344년 정서장군 유익은 환선에게 단수를 타고 올라가 후조 장안의 이비를 공격하게 했다. 그러나 수, 육 양로를 통해 먼길을 올라 온 환선이 이비에게 크게패배하자 유익은 환선을 건위장군으로 강등해 버렸다. 환선은 그것이 치욕이 되어 화병으로 죽었다. 환선이 죽자 유익은 아들 유방지를 환선의 군대를 관장시켰다.
(32) 동진 성제의 죽음과 정치혼란(AD344-AD345)
이즈음 강제 사마악이 죽었다.(AD344년9월) 그가 죽기 직전 하충이 지지한 사마담이 태자가 되었으므로 황위를 계승했는데 이 사람이 동진 목제다. 이 때 겨우 두 살이었다. 유익 유빙 형제는 나이가 지긋이 든 사마욱을 태자로 세울 생각이었다. 사마욱(AD320-AD372)은 동진 조정의 창업자 사마예의 둘째 아들로 이미 스물두 살이나 된 성인이었다. 유빙과 유익은 나라의 앞 날이 크게 걱정되었다. 목제의 생모 저씨가 칭제하면서 정치를 농단할 것이 너무나 뻔했다.
유익의 형 유빙도 두 달 뒤 병사했다. 혼자 남은 유익은 군사를 모으고 곡식을 저장하면서 저태후 일당이 농단하는 건강 조정을 바로 잡을 계획을 꾸몄지만 그 또한 병으로 죽었다.(AD345년 7월) 유익은 죽기 직전 동진 조정에 편지를 띄워 아들 유원지에게 형주자사를 맡겨 줄 것을 부탁했으나 실세였던 양주자사 및 녹상서사 하충은 불온한 생각을 지닌 유씨 대신 환온에게 형주방면을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충의 생각대로 조정은 환온을 안서장군, 도독형사옹익양영육주제군사 및 형주자사로 삼아 하구(지금의 무한)에 주둔시키고 유익의 아들 유방지와 유원지는 예장으로 옮겨 임명했다.
(33) 전량 장준의 국가조직 구축(AD345)
장준은 통치지역을 정비하고 국토의 확장계획을 세웠다. 먼저 11개 군을 나누어 양주(涼州)로 만들고 세자 장중화를 자사에 임명했다. 그리고 흥진 등 8개 군을 나누어 하주(河州)로 이름하고 장관을 자사에 임명했다. 마지막으로 돈황 등 서역지역 3개 군을 사주(沙州)로 명명하고는 양선을 자사로 보냈다. 이제 전량은 양주 1주로 된 미니국에서 3주로 구성된 국가다운 국가의 혁식을 갖춘 셈이었다. 장준 스스로는 대도독, 대장군, 가양왕, 독섭삼주의 직책을 떠안았으며 최초로 국가의 관직을 동진과 대등하게 갖추었다.
(34) 장준사망과 후조의 침략(AD346-AD347)
열일곱 살에 즉위해서 거의 이십년 훌륭히 나라를 통치해왔던 장준이 39세 나이로 갑자기 죽었다. 19세 세자 장중화가 사지절, 대도독, 태위, 호강교위, 양주목, 서평공 및 가양왕으로 아버지 장준의지위를 그대로 계승했다. 그리고 생모 마씨를 왕태후, 적모 엄씨를 대왕태후로 책봉했다.
장준 사망의 소식을 들은 후조가 전방위적으로 전량을 공격해 들어왔다. 왕탁은 전량의 무가(감숙성 임조 남쪽)방면을 침입해 들어와 7천호를 관중 옹주로 이주시켰다. 후조의 양주자사 마추와 손복도는 금성(감숙성 난주)방면을 치고 들어왔다. 전량의 금성태수 장충은 전투도 하지 않고 후조에 항복해버리고 말았다. 전량 전국이 공포에 떨었다.
전량 주군 장중화는 전군을 소집하고 배항에게 후조방어를 맡겼다. 배항은 광무(감숙성 영등)에 진을 치고 방어에 집중했다. 양주사마 장탐이 말했다.
“ 나라 존망은 군대에 달려있고
군사 승패는 장수의 용맹에 달려있습니다.
지금 비상시를 맞이하여 모두들 예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을 장수로 추천하고 있사오나
한신이 천거된 것은 예로부터의 덕을 가지고 된 것이 아닙니다.
밝으신 명공이 사람을 등용할 때에는
보통이 아닌 사람을 천거하지만
재주가 감당할 만하면 큰일을 맡기는 것입니다.
지금 강한 도적이 쳐들어오니 여러 장수들이 전진하지 못하여 백성들이 떨고 있습니다.
주부 사애야말로 문무를 모두 겸비하고 있으니
후조를 막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
장중화는 급히 사애를 불러 후조대군을 막을 방법을 물었다. 사애는 7천 기병을 요구했다. 장중화가 사애를 중견장군으로 삼고 진무(내몽고 화림각이)출발했다. 밤중에 효조(올빼미) 두 마리가 아문에서 우는 것을 들은 사애가 말했다.
“ 육박에서 효패를 잡은 사람이 이기는데
지금 효조가 울었으니 승리할 징조임에 틀림없다.“
사애의 7천 특공대는 후조군대를 대파하고 5천 급을 참수하는 성과를 올렸다.
후조의 양주자사 마추가 또 부한(감숙성 임하)을 공격해 들어왔다. 전량 진창(감숙성 안서)태수 낭탄이 외성을 포기하려 하자 무성(감숙성 청수현)태수 장전이 이렇게 외쳤다.
“ 외성을 포기하면 사람들이 불안해져
내성마저 지키기 어려울 것이요.”
낭탄이 옳다고 생각하고 죽기를 각오하고 방어하기로 했다. 마추가 여러 겹을 쌓아 필사적으로 공격했지만 성 안에서 훌륭히 방어한 까닭에 마추군 수 만 명이 전사했다. 오랜 공격에도 성이 떨어지지 않고 전세가 기울어지지 않자 후조 주군 석호는 보,기병 2만을 추가로 유혼에게 보냈다. 성을 지키다 지친 낭탄이 후조군사 1만 명을 성안으로 영입했지만 전량장수 장거가 결사대로 방어하여 격퇴시켰다. 석호는 중서감 석녕에게 2만 군사를 추가로 보내 마추를 지원했다. 그 사이 장중화의 장수 송진이 2만호를 가지고 후조에 항복하고 말았다.
장중화는 사애에게 보,기병 3만명을 주어 임하에서 대치했다. 사애는 우스꽝스럽게 흰 모자를 쓰고 나팔을 불고 북치면서 행진했다. 마추를 놀리는 행보였다. 격노한 마추가 외쳤다.
“ 나이어린 서생에 불과한 놈이
흰 모자에 북을 치고 나서면서 감히 나를 조롱하다니!“
곧바로 용양부대 3천을 보내 격퇴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사애 주변이 놀라서 말을 타고 도망가자고 권유했다. 사애는 태연히 수레에서 내려 호상에 걸터앉아 부채를 부칠 뿐이었다. 후조 용양부대 병사는 함부로 덤벼들지 않았다. 분명히 매복군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용양부대가 머뭇거리는 그 사이에 전량장수 장모는 샛길로 후조군대의 후미를 습격했다. 후조의 수급과 포로는 1만 3천을 넘었고 마추는 홀로 대하로 도망갔다.(AD347년 4월)
한 달 위 마추와 석녕이 다시 12만 군사로 하남에 주둔하면서 유녕, 왕탁이 진흥(민화), 광무(영등), 및 무가(임조) 방면으로 침공 하면서 무위까지 진격해왔다. 장중화는 우선을 보내 방어하는 한편 부한(감숙성 임하)을 수비하는데 전력을 쏟았다.
상황이 위태롭자 장중화는 친정을 고려했다. 사애가 적극 말렸다.
“ 임금이란 한 국가의 기둥이니 가볍게 움직일 수 없습니다.”
사애를 도독정토제군사로 삼고 색하에게 보,기병 2만을 주어 방어하게 했다. 전량 별장 양강이 후조의 유녕을 사부(섬서성 대협)에서 대패시켰다. 유녕은 금성(감숙성 난주)을 지켰다.(AD347년 5월) 마추가 9월 전량의 장모를 습격하여 3천여 급을 참수했고 부한 호군 이규는 7천 무리를 이끌고 마추에 항복하고 말았다. 이로써 황하 이남 강족 저족이 모두 후조에 항복하게 되었고 전량의 영토는 후조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35) 양왕으로 불리기 원한 장중화(AD347년10월)
동진이 시어사 유귀를 직접 보내 장중화에게 시중, 대도독, 대장군, 독농우관중제군사 및 서평공의 직책을 내렸다. 그러나 내심 장중화는 양왕이라고 불리기 원했다. 심맹을 유귀에게 보내 이렇게 말하도록 했다.
“ 전량 주공은 여러 세대 진의 충성스런 신하인데
지금은 선족보다도 대우가 못하니 어떤 일인가?
모용황을 연왕으로 책봉하면서
주공(장중화)은 겨우 대장군일 뿐이니
어떤 포상방법을 가지고 충성과 현명한 사람이 되기를 권고하시겠는가?
양왕이 되게 하여 주시지요.“
유귀가 웃으며 말했다.
“ 방금 그대는 실언을 하신 것입니다.
옛적 하은주 시대에 왕이 내린 작위로는 상공만한 것이 없었읍니다.
오나 초가 처음으로 왕이라고 불렀지만
그것은 야만인이기 때문에 그냥 못 들은 척 한 것일 뿐 인정한 것은 아닙니다.
만약 제나라나 노나라가 망령되게 왕이라고 했으면
제후들이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한 고조가 한신과 팽월에게 왕을 내렸지만
결국에는 다들 목이 날아갔읍니다.
일시적으로 내린 상일 뿐 근본적으로 후대한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황제께서는 귀공의 충성을 깊이 헤아리셔서 상공을 내린 것이니
이미 총애와 영광이 지극한 것입니다.
어찌 선비 야만족과 같이 비교할 것이 있겠읍니까?
또 공에는 큰 것과 작은 것이 있는 법인데
귀공께서 3대를 이은 결과로 왕이 되셨지만
나중에 동쪽의 호족과 갈족을 평정하고 낙양을 접수하여
황제를 영접하게 되면 무엇으로 덧붙여 줄 수가 있겠습니까?
할 말이 없는 장중화는 더 이상 요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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