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현상』은 헌법이 중병(重病)에 걸린 징조” ‘어느 후보가 당선되든 병환(病患)은 치명적일 것’ Atlantic誌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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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선이 점차 열기를 더해가고 있는 가운데 첫 번째 후보 간 TV 토론이 끝났다. 대다수 언론이 힐러리 우세로 판단했다. 그간 트럼프 후보에 많은 우려를 가지고 있던 관전자들은 다소 안도할 것으로 짐작된다. 당장, 우리나라와 관련해서도 트럼프는 지극히 편협하고 근시안적 안보관으로, 방위비 분담이 없다(적다)는 허구적 주장을 하고 있다. 당연히 극단적 보수 색채의 정책들(?)을 쏟아내고 있어 일부 미국 국민들 및 주변국들과 함께 우려를 금치 못하는 현실이다.
한편, 두 후보 모두 보호무역 기조를 견지하고 있어 교역 면에서도 정책 선회가 예상되는 가운데, 힐러리 후보는 기존의 우방국들과 유지해 온 안보 공약 및 대외 관계 질서의 준수를 공약하고 있어 그나마 덜 강경한 보호무역 정책을 주장하고 있을 뿐이다. 이 두 후보의 정책 기조의 배경에 있는 새로운 현상이 극단적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트럼프 현상(Trumpism)’이 아닌가 한다.
오는 11월이면 선거의 결판이 나겠지만, 이러한 ‘트럼피즘’은 비록 힐러리가 승리한다고 해서 곧바로 사라질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이 점에서 주변국들의 고민이 깊어지는 것이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미국 정계에 안면도 내밀지 못하던 트럼프가 일약 공화당 후보로 지명된 것은 분명히 그를 그렇게 밀어 올린 면면한 사회 흐름이 있을 것이다. 자유 분방한 행동과 괴이한 편력으로 세간의 화제에 오르내리던, 한 부동산 졸부가 미국 사회의 새로운 흐름의 한 축을 장악하게 된 배면을 직시할 필요가 있는 이유이다. 최근, 미국의 The Atlantics誌가 이러한 ‘트럼피즘’의 연원(淵源)을 분석하는 논설을 게재하여, 이를 정리하여 옮긴다.
■ ‘트럼피즘(Trumpism)’은 이미 나타난 불안의 징조(徵兆)
앞으로 두 달 남짓이면 헌법에 의한 ‘자율 정부(self-government)’는 역사적인 벽에 부딪칠 수도 있을 것이다. 비록,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재앙은 면할 수 있을지 몰라도 올 가을의 선거를 향한 캠페인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은 미국 헌법이 심한 병환에 걸려 있고, 아마도 치명적일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트럼프 현상(Trumpism)’은 불안의 징조(徵兆)이지 원인이 아니다. 나는 때로는 우리들이 헌법 이후 시대(post-constitution era)에 살고 있다는 생각에 빠져들 때가 있다. 미국의 근본이 되는 법률(헌법)은 논쟁의 대상으로 남아 있고, 앞으로도 그렇게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나라(미국)는 헌법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으로부터 멀리 달아나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이제는 귀찮게 하는 규칙의 종합 세트 정도로 여겨지고 있는 것 같다.
■ 트럼프가 당선되면 헌법은 무력화(無力化)될 것
만일, 11월 선거에서 트럼프가 당선된다면 미국의 헌법은 마치 독재자 무솔리니가 로마에 입성하여 진군하고 나서 ‘Statuto Albertino of 1848” (1848년 제정된 이탈리아 제국 기본 헌장으로, 많은 수정을 거쳐 1948년 이탈리아가 공화국이 될 때까지 헌법으로 골격을 유지했음)이 그랬던 것처럼, 이빨 빠진 형상이 될 것이다. 그것은 트럼프가 이런 저런 규정들을 위반할 것을 주장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트럼프와 그의 추종자들에게는 헌법이란 단지 존재감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트럼프의 가장 일관되고 중대한 약속은 표현의 자유를 파괴하는 것이다. (참고로, 트럼프의 뉴욕 및 뉴저지 폭탄 공격에 대한 반응이 “매거진(Magazine)”이 어쨌든 폭탄 공격자들을 지도(指導)하고 있다는 근거로 바로 언론의 자유를 거두자는 것이었던 점을 기억하기 바란다.) 다른 부문에 있어서 그의 정책 프로그램이란, 고문, 인질 가두기, 무고한 시민들 살상하기, 조약의 파기, 국경의 군사화, 기독교의 공식 수용, 다른 종교 집단들에 대한 감시와 배척, 태생적인 시민권 폐지, 인종 및 종교에 따른 차별, 폭력적이고 무한정의 법집행, 대량 체포 및 추방 등이다.
미국 역사상 어떠한 다른 이들의 정책 프로그램도 이처럼 공공연하게 국가 성립의 근본인 인권 헌장 및 ‘정당한 절차(due process’) 및 ‘평등한 보호(equal protection)’에 관한 14 차 수정 헌법을 모독한 적은 없었다.
트럼프가 집권을 하게 되면 과연 이러한 가치들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 그가 원하는 이런 것들을 공화당이 반대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많은 이유를 찾아 볼 수가 없다 --- 이미 공화당 지도자들은 한마디 소리도 없이 항복하고 말았다. 내 생각으로는 그가 관료 사회나 정보 기관들이나, 연방 법 집행 기구들이나, 미국의 군사 조직 내에서 지지자들을 찾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Stanley Milgram의 “권력에의 복종(Obedience to Authority)” 실험이 보여 주듯이 잘 아는 사람들은 아첨꾼들이 접수(take over)할 때에는 그저 옆에 서서 방관만 한다.
■ 트럼프가 패하더라도 병상(病狀)은 남을 것
그러나, 비록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는 것을 피한다고 해서, 작년부터 퍼진 병상이 곧바로 국가적 규모의 회복 감(good feeling)의 폭발로 사라지게 될 것인가? 어려울 것이다. 트럼프는 알 수도 없는 외계에서 떨어지는 운석처럼 어느 날 갑자기 지구로 내려온 것이 아니다; 그는 병든 시스템의 예상할 수 있었던 산물이다.
“정치적인 올바름(correctness)”은 관심에도 없다. 그러므로, 나는 “양 쪽이” 모두 책임이 있다는 식으로 가장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헌법적 가치에 대해 정신적으로 침식하는 공격은 이미 시작됐고, 앞으로도 오른쪽으로부터 계속해서 공격이 이어질 것이다. 그것은 이미 1998년에 거부감을 가진 상원의 다수당이 당시 빌 클린턴 대통령을 사소한 위반 사항을 가지고 몰아내려고 기도했을 때에 처음으로 공공연히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한 현상은 2000년에 대법원이 무법적(lawless) 권한 행사를 통해서 그들이 택한 대통령을 세움으로써 심화되었던 것이다. (※ 주; 부시 대통령 당선 당시 투표의 적법성에 대한 법원의 판결을 지칭하는 것) 이후, 그들이 세운 부적합한 젊은 대통령이 위기에 대해 제도적인 무법성으로 대처함으로써 가속되었던 것이다 --- 재판을 거치지 않는 구금, 영장이 없이 비밀스럽게 자행하는 도청 행위, 그리고 제도적으로 자행되는 고문 등이다.
다수의 투표로 부시를 대체한 오바마 대통령 취임 이후 몇 년 간, 지금은 야당이 되어 있는 같은 세력들은 그를 적법한 리-더로 인정하기를 거부해 왔다. 그들은 의회를 장악함으로써, 의회의 가장 중요한 기본적 의무도 수행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 예산을 편성하는 일, 국가 채무를 관리하는 일, 정부의 빈 자리를 채우는 일 등 --- 그리고, 가장 충격적인 것은 나라를 평화로부터 전쟁으로 전환하는 것을 통제하는 일이다. 지금 그들은 자신들의 관심을 대법원으로 돌리고 있다. 그리고는 서서히 그 기능을 마비시켜가며 정파적인 이득을 추구하고 있다.
■ 일부 기득권 세력이 헌법 상 책무를 해태(懈怠)
정치 평론가들은 이러한 정치적 일탈을 열심히 주류화(主流化)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사우스 택사스 대학 법과대학 죠쉬 블랙맨 교수는 대법관 앤토닌 스캘리아 판사가 사망한 뒤 곧 바로 “우리들은 상원이 지명자를 승인할 모종의 헌법 상의 의무가 있다거나, 혹은 투표 일정을 정해야 한다는 등의 가정을 해서는 안된다” 고 National Review 독자들에게 인식 시키고 있다. 워싱턴 포스트 Fact-Checker인 글랜 케슬러는 상원이 대법원의 대법관 지명자를 승인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지 여부는 “견해에 따르는 것” 이라고 양보하고 있다. 그리고는, 불가해(不可解)하게도, 자기 자신의 의견을 “사실”인 양 확정하고는 자기 견해와 다른 의견들에 대해서는 (“중대한 사실 관계의 오류 혹은 분명한 상충”으로) 매도한다.
물론, 이들 훌륭한 의견들은 --- 만일 헌법이라는 것이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용될 수 있는 상호관계가 없는 규칙들의 집합체에 불과하다면 --- 그리고, 만일 유일한 강행적인 규정들이 “이 규정은 그것을 작동할 수 있게 할 사람들에 대해서 이런 저런 의무를 부과한다” 는 등의 명시적인 문구를 정해 두었다고 한다면 --- 맞는 것이다.
이런 논설을 읽다 보면 상원은 거의 아무런 “의무”가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매년 12월에 하루 정도 모여서 관료들을 선출하고, 저널을 계속 발간하고, 매 4년마다 선거인단 투표를 계산하기만 하면 되는 그런 것처럼 들린다. 그들에게는 대통령이 구성하는 내각을 승인하고, 군사 조직의 요직들을 충원하고, 또는 정부를 운영해 갈 필요한 자금을 조정할 아무런 의무가 없는 것이다.
이런 해석은 ‘헌법 이후(post-constitution)’ 시대적인 병적(病的) 이상이다. 헌법은 열린 가슴을 가진 수 많은 독자들에게는 확실하게 비쳐질 수 있는 엄청나게 많은 책무(責務)를 부과하고 있고, 많은 가치(價値)를 확인하고 있다. 그런 헌법적 가치를 한 발 뒤로 물러서서 보면 아무런 의무도 부과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대단히 흥미롭게도, 실제적 지배에 대한 보수파들의 혐오감은 그들 보수파들이 지배하고 있는 주(州)들에서는 그렇게 확연하게 드러나지가 않는다. 열성적인 주(州)의 입법 위원들은 투표를 억누르려고 하고, 여성들의 임신 및 성적 심리를 규제하려고 하고, LGBT들의 기존 권익을 되돌리려 하고, 농업에 대해 암묵적으로 비난하고, 단체교섭권을 박탈하려 하고, 높은 교육을 폐지하려 하고, 학문의 자유를 빼앗아 버리려 한다. 주(州) 지도자들은 정말로 서둘러 “주 회의(convention of states)”를 구성하고 헌법을 모두 파기해 버리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 의회가 책무를 회피하면 행정부가 전횡(專橫)
민주당 측도 마찬가지로 헌법에 대한 접근법에서 추저분한 자세가 되어 무릎을 꿇은 것이 사실이다; 예를 들면, 내가 언젠가 글로 썼던 것처럼, 오바마 행정부가 리비아 개입에 대해 승인을 받지 않은 것을 양해한 것은 부시 행정부가 했던 것들과 마찬가지로 절름발이에 불과한 것이다. 지금 벌이고 있는 시리아에서의 ISIL에 대한 작전 및 다른 지역에서 벌이는 작전에 대해 의회의 승인을 받지 않아도 되는 어떠한 다른 음험한 방도는 없는 것이다.
의회가 자신들의 책무를 수행할 것을 거부하면 이러한 종류의 행정적인 교묘한 속임수 등은 피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정당화(justification)의 문제가 아니라 단순히 기술적(記述的)인 문제인 것이다. 행정부는 계속해서 운용되어야 하고, 위기의 시기에는 대통령들은 불가피하게 자신들의 계획이 탁월하다고 결론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의회는 군사력에 대해서 ‘Yes’냐, ‘No’냐를 말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그러나, 의회가 전혀 말을 하지 않으면 대통령들은 자신들의 생각이 최상인 것처럼 행동할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에 대해서 “약하다” 고 가장 일관되게 공격하는 것은 그가 군사 행동에 대해 실제로 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결정했을 경우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 권력보다 헌법적 가치를 우선해야 ‘민주 사회’가 가능
헌법이 무력하게 시들어가는 것이 확산되는 현상은 무책임한 의회로부터 절망적인 행정부까지 폭넓게 확산되어 있고, 결국은 사법 체계까지 약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학교에서 어떻게 가르치고 있던 간에, 헌법은 한 번도 (James Russel Lowell의 말을 빌리면), “스스로 움직여 가는 기계”가 되어 본 적이 없다. 항상, 그것을 움직여 가게 만드는 것은 우리들이 헌법적 민주 사회 안에서 살기를 희망하는 일상에서의 사회적인 결정들인 것이다. 1942년에 Leonard Hand 대법관은 “어느 사회가 분열되어서 조정(moderation)의 정신이 없어지면 어느 법원도 이를 구제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러한 정신이 만개한 사회에는 법원이 필요가 없게 된다” 고 경고했다.
이 사회에는 근본적인 법률에 따라서 살아 가고자 하는 의지는 사라졌고, 아무도 그런 것을 인식하지 않고 있다. 그것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 돌아온다고 하면, 이 미국이라는 사회가 헌법적인 비전이 권력보다 더욱 소중한 것이라는 것을 자각할 때가 되어야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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