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 #9K: 한 판 전쟁으로 망한 전진(前秦)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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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
(64) 동해공 부양의 반란 발각(AD382)
양양을 함락시키고 부락의 반란을 평정한 부견은 동생 부융을 크게 등용시켰다. 시중에 중서감에 도독중외제군사, 거기대장군, 사예교위 및 녹상서사로 삼았고 아들 정남대장군 수상서령 부비는 도독관동제군사 정동대장군으로 삼았다. 그리고 저족 친척들의 숫자가 늘어나자 부견은 여러 지역을 쪼개어 봉지로 나누어 주었다. 마치 한나라 때 황족의 봉건 제후와 같았다.(AD380)
동해공 부양은 부법의 아들이다. 부법은 부견의 배다른 형님으로 부견과 함께 쿠테타를 일으켰다가(AD357) 부견의 어머니 구태후와 이위에 의해 살해된 사람이다.(위(28)및(29) 참조) 부양의 측근인 왕피와 주효가 반란을 꾸미다가 걸려들어 잡혔다. 왕피는 왕맹의 아들이다. 부견이 반란의 이유를 물었다. 부양이 대답했다.
“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에 대한 복수입니다.”
부견이 울면서 말했다.
“ 부법 형님이 죽은 것은 나 때문이 아니고
어머니와 이위가 꾸민 일인 것을 왜 모르느냐?“
왕피가 말했다.
“ 신의 아버지는 승상으로 천명을 보좌하여 공훈을 쌓았으나
신은 가난과 천함을 벗어나지 못했으니
이런 까닭으로 부유함과 고귀함을 도모하고자 했을 따름입니다.“
부견이 말했다.
“ 승상(왕맹)이 죽음에 임하여
경에게 부탁하기를 열 마리 소가 가는 밭을 자산으로 삼게 하였을 뿐
아직 일찍이 경을 위하여 자리를 요구한 적이 없었으니
자식이 아비보다 못함을 밝히 잘 알았음이 아니고 무엇인가.“
주효가 말했다.
“ 저 주효는 대대로 동진의 은덕을 입은 까닭에
살아서 동진의 신하가 되고 죽어서는 전진의 귀신이 될 터인데
반란의 이유를 따로 물을 것이 무엇이요? “
사실 주효는 여러 번 부견에게 대어들고 항거하며 무례하게 행하였으므로 여러 번 죽이자는 의논이 나왔었으나 부견이 끝내 죽이지 않았던 인물이다. 부견이 이렇게 말했다.
“맹위(주효)는 열사이다.
뜻이 이와 같으니 어찌 죽음을 꺼리겠는가.
살해한다면 그의 명성만 높여 줄 뿐 아니겠는가?“
부견은 연루자 모두를 살려주고 멀리 귀양을 보냈다. 부양은 투르판으로 보냈다가 선선(신강성 약강)으로 옮겼는데 그곳에서 다음해(AD383)에 전진이 동진에게 크게 패한 뒤 혼란한 틈을 타서 귀국하려다가 선선왕에게 피살당했다. 왕피와 주효는 삭방으로 보냈는데 주효는 거기서 죽었다.
(65) 동진정벌 계획과 빗발치는 반대(AD382)
부견에게 동진은 사랑니 같은 존재다. 환온이 살아 있을 때에는 수시로 국경을 넘보면서 국가에 통증을 주곤 했지만 지금은 내부 문제로 골머리 썩다보니 마치 매복된 사랑니 같은 존재가 되었다. 있어도 없어도 별 문제는 없지만 그래도 천하를 통일한다는 관점에서는 아무래도 뽑아야 할 나라였다.
부양의 반란이 마무리되자 부견은 부융을 정남대장군으로 내세워 준비에 착수했다. 일단 파서(사천성 낭중)와 재동(사천성 금양)에 있는 태수들에게 수군을 양성하여 장강을 따라 내려 올 준비를 하도록 명령했다. 부견이 이렇게 말했다.
“ 내 30여 년 왕업을 이어받고도 아직
저 동남쪽 귀퉁이(동진을 폄하하며 지칭)를 교화하지 못하였다.
대략 계산해보니 전국에서 약 97만을 동원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저 귀퉁이를 토벌할까하는데
경들의 생각은 어떠시오?“
비서감 주융이 손뼉치며 호응했다.
“ 만약 동진 주군(효무제 사마요)이
손을 뒤로 묶고 옥을 입에 물고 항복해오지 않는다면
저들은 모두들 수장되어 물고기 밥이 되고 말 것입니다.“
부견이 흡족해 하며 말했다.
“그것이 바로 내가 바라는 바이다.”
상서좌복야 권익은 반대하고 나섰다.
“ 은나라 주왕이 비록 포학했으나
세 사람의 인자한 사람(三仁 : 微子, 箕子, 比干)이 있었으므로
주나라 무왕이 군사를 돌렸습니다.
지금 동진은 비록 작고 약하지만 크게 나쁜 일을 한 적이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사안과 환충은 강도의 영웅호걸로써
군주와 신하가 위아래로 화목하고 단합되어 있으니
아직은 도모하기 쉽지 않습니다.“
부견은 모든 신들에게 의견을 분명하게 말하라고 명령했다. 석월은 아직 정벌할 때가 아니라고 말했다. 부견은 이렇게 말했다.
“ 시경에 이렇게 씌여 있다 :
“집을 지을 때 길가는 사람에게 물어보면 집을 지을 수가 없네“
내가 마음속으로 결정하면 되는 것이다.“
다른 신하들이 모두 물러가고 부융만 남았다. 부융은 전쟁이 불가한 이유로 세 가지를 들었다.
첫째, 하늘의 도에 순응하지 못하는 것,(정당성이 없다는 것)
둘째, 동진에 아무런 틈새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
셋째, 그동안 전쟁이 너무 잦았고 병사들이 적을 두려워 한다는 것.
부견의 얼굴빛이 달라졌다.
“ 내게 강군 100만이 있다.
그리고 전쟁물자가 하늘처럼 비축되고 쌓여있다.
또 내가 비록 선량한 군주는 아닐지라도 사리에 어둡거나 약하지는 않다.
승기를 이어 망해가는 나라를 치고자 하는데
어찌 이기지 못한다고 하는지 모르겠다.
도적을 밑에 두고 나라 근심을 언제까지 끌고 가야 한단 말인가?“
부융이 단호하게 말했다.
“ 동진을 멸망시킬 수 없슴이 분명합니다.
지친 병사를 끌고 이길 수는 없습니다.
폐하 주변에는 흉노, 선비, 갈, 저, 강 등
우리의 태생적 적들이 가득한데
만약 우리가 동쪽으로 내려 간 틈을 타고 뒤를 공격해 온다면
비록 태자가 지킨다고 하더라도
마치 변란이 배, 가슴, 팔꿈치, 겨드랑이에 생기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승상 왕맹이 죽으면서 한 말을 왜 상기하지 못하십니까?“
부견은 반대 의견에 귀를 닫아버렸다. 부융의 강력한 반대에 힘을 얻은 신하들은 더욱 강하게 전쟁불가를 외쳤다. 한번 군사를 일으키기만 하면 가을 낙엽 떨어지는 듯하다고만 여기는 부견은 신하들의 반대를 이해할 수가 없다고 투덜댔다. 태자 부굉이 동진의죄가 없어서 명분도 없는데다가 만에 하나 밀리기라도 한다면 북중국 최강국 전진의 위신이 도저히 서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부견은 이렇게 쏘아붙였다.
“ 진나라 시황제가 6국을 통일할 때에도
모든 군주가 포학해서 전쟁 명분을 얻었기 때문에 이겼냐?“
찬반 의논이 끝이 없이 길어졌다. 모용수가 부견에게 다가가서 이렇게 말했다.
“ 성스러운 마음으로 폐하께서 결정하시면 그것으로 끝나는 일입니다.
널리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진무제(사마염)가 오나라를 멸망시킬 때
오직 장화와 두예 두 사람만 찬성했었습니다.
여러 사람의 의견을 좇았다면 어느 틈에 출병할 수 있었겠습니까?“
부견이 크게 기분이 좋아졌다.
“ 나와 더불어 세상을 도모할 사람은
오직 경뿐인 것 같소.“
부융이 나서서 말했다.
“ 만족할 줄 알면 욕을 입는 일이 없고
그칠 줄을 알면 위태로움이 없다고 했습니다.
동진은 작지만 우리 융적과는 다른
중화의 정통성을 지니고 있는 나라입니다.
하늘이 그들의 대통을 절대로 끊어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66) 부견의 총애하는 승려 도안(AD382)
부견은 평소 존경하는 승려 도안을 찾아갔다. 도안은 허베이 성(河北省)의 유교 가문에서 태어나 12세에 출가하여 서역으로부터 온 불도징(佛圖澄: AD233-AD348)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불도징 사후에는 전란을 피하여 이리저리 여러 곳을 전전하면서 유랑하였다. 혜원(慧遠) 등 400명의 문하생과 함께 후베이 성(湖北省) 양양에 단계사(檀溪寺)를 짓고 엄숙한 구도와 수련을 중시하는 교단을 조직하여 국왕과 귀족으로부터 두터운 존경과 신임을 받았다. AD379년에 부견의 초빙을 받아 장안으로 가서 국가고문에 추대된 사람이다.
부견이 동진 정벌에 대해 묻자 도안은 이렇게 대답했다.
“ 동남쪽은 축축하여 찬 기운이 쉽게 생깁니다.
그래서 우순(순임금)께서도 여행에서 돌아오지 못하셨고
대우(하나라 우왕)께서도 갔다가 돌아오지 못하셨습니다.
어찌 대왕은 대가를 움직이는 수고를 자청하시는 것입니까?“
부견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 수고를 마다한다면
옛 제왕들은 아무도 정벌을 나가지 않았을 것 아닙니까?“
도안이 말했다.
“ 꼭 정벌하셔야 한다면 이렇게 하십시오.
먼저 한 장짜리 편지를 앞세워서 받들게 하고,
뒤에는 제장들이 6군을 거느리고 따라가면
동진은 반드시 머리를 조아리며 복종해 들어 올 것입니다..
친히 장강을 건너실 필요는 없습니다.“
(67) 부견의 총희 장부인의 반대(AD382)
부견이 사랑하는 총비 장부인이 나서서 말했다.
“ 자연 이치에 따른다면 이루어지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서경에 말하기를
하늘이 총명한 것은 나의 백성들이 총명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군사를 내보낼 때에는 반드시 위로 하늘의 뜻을 살피고
아래로 백성들의 마음을 읽어야 하는 법입니다.
지금 사람들의 마음이 반대하고 있으니
그것은 하늘의 뜻이라고 봐야 합니다.
속담에 이르기를
닭이 밤에 울면 군사행동이 불리하고 개가 짖으면 궁궐이 텅 빌 것이며
병사가 움직일 때 말이 놀라면
군대가 패하여 돌아오지 못할 징조라고 했습니다.
지금 닭이 밤에 울고,
개가 슬프게 짖으며,
말들이 놀랐고 무기고 병사들이 스스로 움직이며 소리를 냈으니
이보다 더 불길한 징조가 어디 있겠습니까?“
부견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이렇게 쏘아 붙였다.
“ 군사 문제에 아낙네가 끼는 것이 아니요.”
어린 아들 부선마저 나서서 이렇게 말했다.
“ 나라의 흥망은 현자를 쓰고 버리는 것에 있다고 했습니다.
양평공(부융)의 말씀을 멀리 하시면서
사안과 환충의 동진을 공격하신다니
신은 가만히 의심스럽게 생각이 듭니다.“
부견이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 어린아이가 어찌 큰일을 알겠느냐?”
거의 모든 신료들이 반대했지만 부견은 동진정벌의 꿈을 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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