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 #9F : 한 판 전쟁으로 망한 전진(前秦)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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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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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부류 등 부생 형제들의 반란과 성공적인 진압(AD367)
3년 전인 AD364년에 부생의 친동생 여남공 부등(騰)이 다른 네 명의 동생들과 함께 반란을 꾀하다가 잡혀 죽은 적이 있었다. 왕맹은 예전부터 부생의 자식들을 모두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부견은 주모자 부등만 처리하고 나머지 형제들은 다 살려 주었다. 그 때 살아남은 정북장군 회남공 부유는 다음해인 AD365년 또 다시 반란을 일으켜 군사를 이끌고 장안을 습격했는데 이위가 잘 방어하여 부유를 체포하고 죽였다.(AD365년10월) 이 때 부건의 아끼는 아들 정동대장군 진공 부류(부생의 동생)와 부견의 친형 정서대장군 조공 부쌍도 가담을 했지만 부견은 부유만 처단하고 나머지 형제들은 다 살려 주었다.
부견이 두 번이나 목숨을 살려 주었던 부류가 부생의 다른 동생 진동장군 위공 부수와 안서장군 연공 부무와 함께 또 다시 반란을 일으킬 것을 모의했다.(AD367년) 진동장군부의 주부 요조가 주군 부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 공께서는 주공과 소공처럼 주군(부견)과 친한 사이인데
국가가 어려울 때 서로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어찌 스스로 난을 일으키려 하십니까?“
부수는 요조의 말을 듣지 않고 반란 군사를 일으켰다. 부견이 그 소식을 듣고 즉각 난을 일으킨 부류 형제를 장안으로 긴급 소환했다. 부류 형제들은 소환령을 거부하고 군사를 몰아 남쪽으로 장안을 향해 진격했다. 부견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군대를 물리고 소환에 응하면 용서하겠다고 약속하면서 그 신표로 배를 깨물어 보이는 「설리의 신표(齧梨爲信)」를 보냈다. 그러나 아무도 부견의 호소에 응답하지 않았다. 다음해 정월 부견은 양성세와 모숭을 보내 진주(秦州) 방향 반란군 부무를 토벌하게 하고 왕맹과 등강은 옹주 포판(산서성 영제)의 부류를 공격하였으며 양안과 장자를 보내 섬성(삼문협)의 부수를 토멸시켰다.
섬성을 지키던 부수는 두려운 나머지 전연에게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당시 전연의황제는 용렬한 모용위였고 훌륭하게 정치를 이끌어가던 모용위의 삼촌 모용각은 지난해(AD367) 사망한 직후였다. 모용각은 죽기 직전 조카 황제 모용위에게 친동생인 오왕 모용수를 등용하여 모든 정사를 자문할 것을 신신당부했었지만 모용위는 듣지 않았다. 모용위는 모용수 대신 시기심이 많고 편벽한 작은 할아버지 모용평을 태부 및 대사마로 등용시켰다. 사실 전연 조정에서는 부견의 전진이 부씨 형제간 내전으로 혼란한 지금이야말로 전진을 토벌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태부 모용평은 옹졸하고 그릇이 형편없이 작았다.
“ 전진은 대국이라 쉽게 도모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닫아걸고 국경을 보호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전진을 평정하는 것이 어찌 나의 소관이란 말이냐!“
이런 전연 조정의 내막 형편을 알게 된 부수는 오왕 모용수에게 서신을 보내 상의했다.
“ 지금 이 기회를 타서 빼앗지 않으면
과거 오의 부차가 월왕 구천을 죽이지 않음에 따라
나중에 월왕 구천의 공격을 받아 용동에서 방축되어 자살하게 만든
용동의 한(甬東之恨)이 될까 걱정됩니다.“
모용수가 측근 황보진에게 이렇게 걱정했다.
“ 주군(모용위)이 어리고
태부 모용평은 용렬하기만 하니
어떻게 부견과 왕맹을 당해 내겠소?“
황보진이 이렇게 대꾸했다.
“ 우리가 그것(이 기회에 부견을 공격하자는 것)을 말한 들
듣지 않을 것이니
말할 필요가 무엇이겠습니까?“
전연의 모용위와 모용평 조정은 소중한 기회를 이렇게 놓치고 말았다. 이로부터 2년 뒤인 AD370년 전연은 부견의 공격을 받고 허무하게 멸망했다.
양성세와 모숭이 이끄는 부견의 진주토벌군은 전쟁 초기 부무에게 패배하여 쫓겨왔다. 부견은 다시 왕감과 여광과 적녹에게 3만 대군을 붙여 진주를 재차 공격했다. 이 때 흥분한 왕감이 전투를 서두르려 하자 여광은 적군 식량이 고갈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물러날 때 공격하자고 타일렀다. 여광의 생각은 적중했다. 먹을 것이 다한 부무의 군대가 뒤로 물러나려 할 때 3만 전진군대가 부무를 습격했다. 부무의 진주방면 반란군은 이 일격으로 격파되었다. 부무는 부쌍이 웅거하고 있는 서쪽 상규(감숙성 천수)로 도망갔다. 왕감은 군대를 이끌고 상규로 진격하여 부쌍과 부무를 체포하고 참수했다.(AD368년7월)
진주방면 반란군을 토벌하는 사이 부류가 이끄는 옹주방면 반란군 2만이 장안을 공격했다. 등강은 7천의 군사로 이들을 격파했다. 장안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부류는 잔당을 이끌고 퇴각했는데 왕맹이 추격하여 그들의 근거지 포판(산서성 영제현)마저 함락시키고 말았다. 부류도 이 때 목이 날아갔다(AD368년9월). 이제 마지막 남은 것은 섬성이다. 부견은 왕맹휘하 전군을 보내 섬성을 포위했다. 왕맹은 부수를 생포하여 장안으로 돌아왔다.
부견이 물었다.
“ 왜 반란을 일으켰는가?”
부수가 대답했다.
“ 신은 본래 반란의 의사가 없었습니다만
형과 동생들이 여러 번 모의하고 종용하니
죽을 것이 두려워 참여했을 뿐입니다.
부견이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 너는 평소에 어른다운 사람이었으니
진실로 너의 마음이 그러했으리라고 믿는다.
그러나 이 번 사안은 사적으로 처리할 문제가 아님을 네가 잘 알 것이다.
다만 고조(부건. 부견의 큰 아버지이고 부수의 아버지)의
후사가 끊어져서야 되겠느냐.“
부견은 마침내 부수에게 죽음을 내렸지만 그의 일곱 아들은 모두 살려 주었다. 그리고 그 장자에게는 부수의 후사를 잇게 하였고 나머지 아들들은 후사가 없이 이번에 죽은 부씨들의 대통을 잇도록 배려해주었다.
(38) 환온 북벌과 전진의 전연 지원문제(AD369)
동진의 환온은 온통 북벌생각에 젖어 있었다. 뛰어난 전연의 지도자 모용각이 죽고 형편없는 모용위와 모용평이 실권을 잡았으니 전연 북벌은 더 쉬울 것으로 생각했다. 환온은 5만 군사를 몰아 고숙(당도. 남경 60KM 아래)를 출발하여 수로를 거슬러 연주(兗州, 산동성 남서부 및 하남성 동북부)방면으로 북진을 개시했다.(AD369년5월) 6월 금향(산동성 가상)부근에서 황하를 건넜고 남서쪽으로 내려와 방두(하남성 준현) 진을 쳤다. 동진 환온 군대의 침입으로 전연은 두려움에 휩싸였다. 황제 모용위와 태부 모용평은 북쪽으로 도망갈 생각만 하고 있었다. 모용수와 모용덕이 5만 군사를 모아 가까스로 동진군대를 막았다. 모용위는 급히 사신을 부견에게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부견은 전연에 대한 파병지원 문제를 의논했다. 모두들 반대했다. 15년 전인 AD354년 환온이 전진을 공략해 왔을 때(남전 전투 : 위(19) 참조) 전연이 도와주지도 않았고 또 전진에게 칭번해 오지도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왕맹의 생각은 달랐다.
“ 현재 전연의 실권자 모용평은 전혀 환온의 적수가 되지 못합니다.
환온이 이길 것은 자명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낙양을 잡아먹고
유주(하북성 북경 주변)와 기주(하북성 중부)와
병주(산서성 태원 부근)와 예주(하남성 동부와 산동성 남부)의 온 병사를 긁어모아
우리 전진의 동쪽 국경을 넘볼 텐데
그렇게 되면 폐하의 사업은 끝장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전연과 힘을 합쳐서 환온을 물리치신 다음에
허약해진 전연을 흡수하면 우리가 대세를 잡는 것 아니겠습니까?
기가 막힌 묘책이 아닐 수가 없었다. 부견은 구지와 등광에게 2만 군사를 붙여서 동쪽으로 낙양을 거쳐 영천(하남성 우현)에 진을 치게 하는 한편 산기시랑 강무를 전연에 보내 구원군이 동쪽으로 이미 진군했다고 알려주었다.
황하를 건너 온 환온의 군대는 여러 가지 악재에 시달렸다. 선봉 군대가 결사적으로 항전하는 전연군에게 연이어 패배하는가 하면 너무 깊이 들어 온 까닭에 배후 보급로가 차단되기 일쑤였다. 게다가 전진의 대군이 동쪽으로 진격해 오고 있다는 소식에 동진 군대는 크게 술렁거렸다. 그리고 건강의 동진 조정안에서는 환온에 대한 반감이 싹트고 있었다.
환온은 황급히 철군을 결정했다. 전연의 방위군 선봉장인 오왕 모용수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환온의 뒤를 쫓았다. 참모들은 퇴각하는 환온 군대를 급습할 것을 종용했지만 모용수는 침착했다. 최초로 후퇴를 결정한 환온 군은 추격해 오는 전연군에 대비하여 최정예군을 후방에 배치하면서 퇴각하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한참 동안 전연군이 쫓아오지 않는 것을 본 환온군은 방심하면서 퇴각 속도를 높였다. 이때를 틈타 모용수는 전격 습격 작전을 폈다. 순식간에 환온은 5만 정벌군사의 6할인 3만을 잃었다. 환온은 패잔병을 모아 산양(강소성 회안)으로 물러나 주둔했다. 그리고 패전의 책임을 전부 군량보급의 책임자인 원진에게로 돌렸다. 원진은 모든 잘못을 자신에게 덮어씌운 환온에게 격분하여 수춘(안휘성 수현)에 웅거하면서 전연에 항복하고 말았다.
(39) 전연 조정의 분열과 모용수 전진 투항(AD369)
환온이 퇴각하자 모용수는 양읍(하남성 수현)을 거쳐 전연의 수도 업(하남성 임장현)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전연 조정에 승전 포상 문제를 상주했다. 태부 모용평은 날로 위엄과 명성이 떨치는 조카 모용수를 그냥 둘 수가 없었다. 태후 가족혼(황제 모용위의 죽은 아버지 모용준의 처)씨 또한 시동생 모용수를 싫어했다. 당연히 모용평과 가족혼태후는 모용수를 살해할 음모를 진행시켰다.
죽은 모용각의 아들 모용해와 모용수의 장인 난건이 몰래 모용수에게 알려 주었다.
“ 먼저 일어나야 이긴다.
모용평과 모용장(황제 모용위의 형)만 처리하면
나머지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모용수는 거절했다.
“ 피붙이 간의 다툼이야말로 나라의 혼란입니다.
내가 조용히 죽을지언정
차마 형제를 죽이면서까지 정권을 찬탈할 수는 없습니다.“
모용해와 난건이 거듭 재촉하자 모용수는 이렇게 말했다.
“차라리 제가 피하겠습니다.”
모용수는 근심에 싸여 아들 모용령에게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물었다. 모용령은 일단 전연 모용씨의 근거지인 용성(요녕성 조양)으로 돌아간 뒤 조정의 적개심을 피하는 것이 상책이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주변을 흡수하여 스스로 힘을 기르는 것이 다음의 계책이라고 말했다. 모용수는 그것이 훌륭한 생각이라고 판단하여 몰래 빠져나가 북으로 달아났다. 모용수가 출발한 지 하루도 안 되었을 무렵 모용수의 다른 아들 모용린은 평소 아버지로부터 홀대받은 것에 대한 앙갚음으로 그 계획을 조정 밀고해 버렸다. 모용수의 측근들도 모두 모용수에게 등을 돌리고 말았다. 계획이 틀어지자 모용령이 아버지에게 마지막 수단은 전진에 투항하는 것이라고 건의했다. 모용수도 동의했다. 모용수와 모용령 부자는 그 길로 말머리를 돌려 서쪽으로 장안을 향해 달려갔다. 전진의 부견은 모용수 부자를 크게 환영했다. 모용수에게 관군장군, 모용해에게 적노장군의 직을 주었다. 모용수는 전진이 전연을 AD370년 멸망시키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다. 그리고 14년 뒤인 AD384년 비수대전의 패배(AD383년)로 뿌리째 흔들리는 전진으로부터 독립하여 후연이라는 나라를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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