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 #9E: 한 판 전쟁으로 망한 전진(前秦)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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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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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부견의 부법 제거(AD357)
왕위에는 부견이 올랐지만 정치(승상)와 군권(도독중외제군사)은 부법이 가지고 있었다. 당연히 사람들은 부법에게로 쏠렸다. 어느 날 부견의 생모 구태후가 선명대를 유람하다가 부법의 집에 사람들과 가마가 구름같이 몰려 있는 것을 보았다. 깜짝 놀란 구태후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와 이위를 불렀다. 부법을 그대로 두었다가는 사직에 큰 혼란이 올 것이 분명했다. 구태후와 이위는 부법을 제거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결론 지었다. 구태후는 군사를 매복시킨 다음 부법을 집으로 불렀다. 아무런 의심을 않고 부름에 응했던 부법은 그렇게 피살되었다. 스무 살 부견은 형님 부법을 영결하는 날 피를 토하며 울었다. 부법의 아들 부양에게 동해공이라는 작위를 잇게 해주었으며 그의 동생 부부는 청하공으로 삼았다.(,AD357년 11월)
(30) 왕맹 총애와 번세 제거(AD358)
아무리 왕맹이 똑똑하고 자질로 부견의 총애를 받았다 하더라도 저족 전진의 조정에서 왕맹을 싫어하는 사람이 없을 수 없었다. 특히 부씨 종친이나 저족 추장들이 왕맹을 싫어했는데 그 핵심 인물이 고장(감숙성 무위)후 번세였다. 그는 부견의 큰 아버지 부건을 도와서 관중을 평정한 주역이었다. 번세가 왕맹에게 비꼬듯이 말했다.
“ 밭은 우리가 갈고
먹기는 그대가 먹는 군요.“
왕맹이 이렇게 대답했다.
“ 밭을 가는 것 뿐 만 아니라 장차 밥까지 하게 할 것이요.”
번세가 그 말을 듣고 격노했다.
“ 장차 네 머리를 장안 성문에 걸어 놓고야 말 것이다.
만약 그리 되지 못한다면 나 또한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다.“
왕맹은 부견에게 그 사실을 보고했다. 부견은 번세 같은 훈구대신을 제어하지 않으면 장차 조정을 통제하기가 어렵겠다고 여겼다.
“ 내 저 늙은 저족을 죽여야 겠다.
그런 다음에야 조정 백관들이 정신을 차리겠구나.“
마침 번세가 들어와서 보고를 하는 중에 왕맹과 논쟁이 붙었다. 화가 난 번세가 일어나서 왕맹을 손으로 후려치려고 했다. 격노한 부견은 그 자리에서 번세의 목을 쳤다. 이 후 신하들은 왕맹을 보면 숨을 쉬지 못했다.
(31) 왕맹과 등강의 냉엄한 법집행(AD359)
부견은 왕맹을 시중 및 중서령으로 올리고 등강을 어사중승으로 임명했다. 부견의 큰 어머니 강(强, 부건의 비)태후의 동생 강덕은 술주정꾼에다가 백성들의 재물이나 처자를 노략질하기 일쑤였으므로 원성이 자자했다. 왕맹은 수레를 보내 광록대부 강덕을 잡아들인 뒤 부견에게 보고를 올렸는데 부견의 회보가 오기도 전에 처형하고 그 목을 저자거리에 효수하였다. 부견이 사면한다는 회보가 도착했으나 이미 사형이 집행된 뒤라 어쩔 도리가 없었다.
어사중승 등강 또한 법집행이 엄격했다. 특히 권문세족의 권력남용과 횡포를 가차 없이 처단했다. 임용 후 며칠 사이에 호족 또는 귀족으로 목이 잘린 사람이 20여 명이었으므로 온 조정이 벌벌 떨었고 간교한 사람들이 숨을 죽였다. 길거리에 떨어 진 물건을 줍는 사람조차 없었으므로 부견이 이렇게 찬탄했다.
“ 내가 오늘에서야 비로소 법이 있다는 것을 알겠구나.”
이 해 35세 왕맹은 이부상서를 거쳐 좌복야로 초고속 승진했다. 한 해에 다섯 번이나 승진했다고 기록되어있다. 보국장군 및 사예교위에다가 복야와 시중과 첨사와 중서령과 영선 업무를 모두 관장하도록 했다. 왕맹은 극구 사양하면서 부견의 친동생 부융과 임군과 주동을 천거했다. 결국 부융이 시중과 중서감 및 좌복야가 되었지만 행정은 완전히 왕맹이 장악한 셈이었다.
(32) 부견의 인재등용과 학문 숭상(AD361)
부견은 인재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왕맹과 같은 조정의 인재 뿐만 아니라 지방정부 곳곳에 훌륭한 인재들이 정치를 해야만 나라가 뿌리부터 튼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부견은 전국의 지방장관들에게 의무적으로 인재를 발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특히 효제(孝悌), 염직(廉直), 문학(文學) 및 정사(政事)의 네 분야로 나누어 인재를 추천하도록 했다. 천거한 사람들이 과연 능력이 있으면 추천한 인물에게 상을 주었고 만약 그렇지 못하면 벌을 내렸다. 이로 말미암아 함부로 천거하는 일이 사라졌고 인사 청탁하는 일도 없어졌다. 종실이나 외척도 자리를 넘 볼수가 없었고 모든 직분의 선비들이 부지런히 자신의 일을 보았다. 농사는 항상 잘 되었고 도둑들은 숨을 죽이고 몸을 숨겼다. (AD361) 진왕 부견은 한 달에 한번은 꼭 몸소 태학에 나가 학생들의 수업을 참관 독려했고 때로 직접 학생들의 실력을 시험보기도 했다. 태학의 박사들과 경사(經史)를 의논했으며 강론을 직접 하기도 했다.(AD362) 이만하면 태평성세라고 불러도 전혀 손색이 없다.
(33) 부등의 쿠테타 실패(AD364)
실각하여 죽은 부생에게는 여러 명의 동생들이 있었다. 부유(幼), 부류(柳), 부수, 부무, 및 부등이 그들이다. 왕맹은 부생이 죽었을 때부터 이들을 죽여야 후환이 없을 것이라고 강력히 주장했지만 불심이 깊고 온화하며 너그러운 부견은 이들을 하나도 죽이지 않았었다. 여남공 부등(騰)이 마침내 반란을 일으키다 발각되어 부견이 죽음을 내렸다.
(34) 동진 황제 사마비의 사망(AD365)과 사마훈의 반란(AD366)
전진의 부견이 착실하고 부지런하며 온화한 덕정으로 내실 있는 국력을 쌓아가고 있는 동안 북쪽 전연의 모용각은 대대적으로 남하작전을 펴고 있었다. AD350년 수도를 용성(요녕성 조양)에서 계로 옮긴 지 7년 만인 AD357년 다시 업성으로 바꾸었다. 그 만큼 남쪽 지역 영토를 넓게 장악했다는 말이다. 모용각은 AD364년 동진의 진우가 허술하게 지키고 있던 낙양을 공격하여 함락시킨 뒤 수도를 그곳으로 정했다. 사실상 낙양과 개봉과 허창을 중심으로 하는 지금의 하남성 북부 일대가 동진의 땅에서 전연의 땅으로 바뀐 셈이다.
동진은 장강 이남과 회하유역 대부분을 차지할 만큼 가장 광대한 영토를 소유하긴 했지만 내부적으로는 매우 허약했다. AD317년 서진의 방계 황족 사마예가 건강(남경)으로 피신해 와 세운 동진황실은 명제 사마소를 거쳐 성제 사마연과 강제 사마악을 거치면서 목제 사마담에 이르면서 조정의 실권은 어린 황제가 아니라 사마욱과 같은 종친 어른들이 쥐고 있었다. 그리고 군권은 환온이나 은호와 같은 북벌전쟁을 좋아하는 군인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었다. 황실은 허울만 있었을 뿐 아무런 권력이나 지도력이 없었다. AD361년 19세 목제 사마담이 후사도 없이 죽자 그의 생모 저태후는 시숙인 성제 사마연의 아들 사마비를 황제로 세웠는데 나이가 스무 살이었다. 군권을 장악한 사도 사마욱과 대사마 환온은 AD364년 전연 모용각에게 빼앗긴 낙양을 수복할 궁리에 몰두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황제 사마비가 AD365년 죽었다. 낙양수복 계획은 잠시 접어두고 후사를 누가 이을 것인지 의논했다. 두 사람은 사마비의 친동생 사마혁으로 결정했다. 사마비보다 한 살 어린 스물 세 살이었으니 충분히 장성한 셈이었다.
이 때 동진의 익주자사 주무가 사망하자 포학하기로 이름난 양주자사 사마훈은 익주(촉)역을 장악하고 성도왕 및 양익이주자사라고 자칭하면서 반란을 일으켰다.(AD365) 낙양을 공격하려던 환온은 일단 그 계획을 미루고 먼저 서쪽 익주와 양주를 토벌하기로 결정했다. 주서에게 지원군을 붙여서 보냈는데 죽은 주무의 아들 주초가 사마훈의 목을 베어 건강으로 보냄으로써 사마훈의 반란은 깨끗이 수습되었다.
(35) 전진의 동진 : 남양과 석천 공격(AD366)
전연이 동진이 취약한 틈을 타서 남쪽의 낙양과 허창을 점령하자 전진의 부견도 동진을 서둘렀다. 2만 군사를 왕맹과 양안과 요장(요장은 AD356년 동진에서 도망 나와 전연으로 갔다가 AD357년 부생에게 죽었고 요양의 동생 요장은 전진 부견 휘하로 들어왔음.)에게 주어 석천과 남양 방면을 경략하도록 했다.
동진에서는 전량 장천석에게 사신을 보내 전진과 결별을 선언하도록 함과 동시에 전진의 배후를 공격하도록 설득했다. 강족 추장 염기와 이엄 같은 토후들이 전진에 반기를 들면서 독립을 선언했다. 전진의 부견은 한가하게 남쪽을 공략할 때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한바탕 약탈극을 벌인 뒤 군사를 되돌려 돌아갔다.
(36) 왕맹의 서북쪽 부한(감숙성 임하) 점령(AD367)
부견은 지난 해 중요한 교훈을 깨달았다. 배후를 확실하게 틀어막지 않고서 남방을 공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전진은 일단 서북방 지역을 먼저 정벌하기로 결정했다. 그 첫째 목표가 염기였다. 왕맹과 요장과 강형과 소강 등 전진 장수들은 1만7천의 군사를 이끌고 염기가 있는 약양(감숙성 진안현)으로 진격했다. 원래 염기는 요익중의 휘하였으므로 그의 아들 요장이 온다고 하자 모든 군사들이 무기를 내려놓고 요장에게 투항해버렸다. 염기는 감숙성 남쪽으로 도망갔다. 큰 싸움 없이 전진은 염기를 토멸했다.
문제는 전량의 장천석이 직접 3만 대군을 이끌고 이엄을 토벌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이엄은 이미 작년에 전진과 전량으로부터 독립하겠다고 선언한 상태였으므로 전진도 이엄에 대해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막상 전진을 배반한 전량이 이엄을 토벌한다고 하자 전진은 이엄을 지원하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이엄도 전량 장천석에게 패전하여 부한(감숙성 임하)로 내몰리게 되자 부견에게 사람을 보내 사죄하면서 충성을 서약했다. 부견은 양안과 왕무에게 2만 군사를 주어 이엄을 구원했다. 장천석의 양휼과 전진의 왕맹은 부한에서 큰 전투를 벌였다. 일단 첫 전투에서 왕맹이 대승을 거두었다. 두 군사가 부한에서 대치상태에 들어가게 되자 왕맹이 장천석에게 이렇게 제안했다.
“ 장군이 군사를 물리시면
나도 이엄을 사로잡은 뒤 군사를 물리고 동쪽으로 돌아가겠소.“
장천석은 그 말을 믿고 군사를 돌렸다. 왕맹도 약속대로 이엄을 붙잡고 돌아갔다. 부견은 팽월을 양주자사로 임명하여 부한에 주둔시키고 이엄에게는 광록훈이라는 작위를 하사하여 후하게 대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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