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대 사태: 문사철(文史哲) 모르는 참담함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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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삿속 대학경영
중앙대가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작금, 두산의 중앙대 운영을 접하며 ‘기업이 이처럼 대학을 황폐화시킬 수 있구나’를 실감합니다. 더불어 ‘대학이란 상아탑이 이리도 바스러지기 쉬운 조직이구나’ 하는 씁쓸함도 다가옵니다.
박용성 전 이사장의 선진화 구상이, 대학을 직업교육소로 만든 다음 졸업 후 다시 돈 싸 들고 오기를 바라는 장삿속이었으니 식상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캠퍼스는 두산건설의 공사판이 되었고, 분칠하는 어여쁜 여학생은 돈벌이 안될 거라며 차별하였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대자보 붙이는데 한 건당 100만원 받겠다 겁주었고, 다른 대학 학생회 대표단을 3류대로 비꼬는 현수막도 내걸게 하였습니다. ‘허허, 그 녀석들!’ 하며 감싸 안는 너그러움은 온데간데 없습니다. 참 멋대가리 없는 대학경영입니다.
착각과 밥줄
중앙대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른 단초는, ‘내가 인사권자인데 누가 대들어?’란 태도에 있습니다. 박용성 전 이사장은 자신한테 무소불위의 힘이 있을거란 착각에 빠졌습니다. 대학구성원이 자기 말을 듣지 않으면 마치 타도 대상인 양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교수들은 기라면 알아서 기는 충성파 사원이 아닙니다. 학생들도 장기판 졸이 아닙니다. 대학은 위에서 찍어누르는 관계가 아니라, 누구라도 논리적 사고나 건전한 비판이 맞다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학문의 전당이어야 합니다. 이에 대해, ‘학문의 전당? 좋~아하네’ 하는 꽈배기 심보가 들어앉아 있다면, 이미 대학경영자 마음가짐으로서는 실격입니다. 그런 꽈배기 심보는, 잠재능력을 이끌어내 함양해야 하는 교육의 본령을 짓밟기 때문입니다.
기업과 대학은 추구하는 바(목적함수)가 다릅니다. 기업은 이익극대화로 돈을 벌고, 대학은 인성수양과 전공학문을 하는 곳입니다. 졸업 후 입사하여 돈을 벌게 되지만, 적어도 대학 은 기업현장과는 이질적인 공간입니다. 서로 목적과 기능이 다른데, ‘돈 되나’를 기준으로 대학을 좌지우지 한다면 대학에 대한 모독행위입니다. 이러한 모독이 가능해진 배경에는 사회불안과 배금주의가 자리합니다. 장래가 불안한 사회에선 개인(학생, 직원, 교수)은 조직의 압력에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인지라 밥줄을 끊겠다 위협을 당하면 약해지고 비굴해지기도 합니다. 여기에 조직을 휘어잡는 자가 개별적으로 압박해 오면 함께 모여 집단행동을 하기도 어렵습니다.
더럽혀진 말(言)들과 도그마
이미 대중매체에 크게 보도되었습니다만, 박용성 전 이사장은 ‘가장 피가 많이 나고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내가 (교수들의 목을) 쳐줄 것’, ‘(개혁반대 교수들을) 악질노조로 생각하고 대응(하라)’고 하는 e메일을 20여명의 보직교수들에게 보냈습니다. 다른 메일에서는 중앙대 교수대표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를 변기에 빗대 ‘비데(Bidet)위’라 조롱하거나 개혁반대 교수를 ‘조두(鳥頭, 무식한 말로 새XXX)’라 칭하는 등, 대기업 총수 출신이라고 하기엔 인품이 너무도 의심스런 언사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저는 말(言)에 혼(魂)이 들어가야, 즉 언혼(言魂)이 있어야 심신이 맑아진다고 보고 있습니다. 더럽혀진 말엔 삿된 기운(邪氣)이 잦아들어 몸을 갉아 먹습니다. 일본어에는 ‘말에 깃들인 신령스런 힘’을 뜻하는 어휘로 ‘언령(言靈, 고토다마)’이 있습니다.
양심과 논리가 통하는 곳이 아니라면 죽은 대학입니다. 서글프게도 대학에서 난무한 더럽혀지고 굴욕적인 언사에 견제력은 작용하지 못했습니다. 때론 낯뜨거운 용비어천가를 부르는 행태도 자행하였습니다. 거부(巨富)로 있는데 뭇 인간들이 상(商)에 비굴하게 다가오는 모습은 어떤 쾌감을 불러올 수 있습니다. 보도된 박용성 전 이사장의 모습에선 ‘겸손함’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는 ‘자본주의 논리가 어딜가나 통한다’는 독단에 젖어 있습니다. 이는 ‘돈이 상전’이고 다른 합리적인 얘기가 있어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도그마입니다. 유연한 사고가 허용되지 않기에 ‘대화로 풀자’는 차원은 물건너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를 포함하여 숱한 다양성이 공존해야 하는 곳이 대학입니다.
인문학은 오아시스
인문학은 오아시스 같은 곳입니다. 의대, 이공대, 경상대 학문의 책장만을 넘기다간 감성이 결핍되기 십상입니다. 이들이 돌아와 쉬고 싶을 때, 또 내면의 멋을 찾고 싶을 때, 인문학은 그 쉼터 역할을 합니다. 인문학을 무시함은 인간으로서 생각하는 힘을 없앤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아사히(朝日)신문(2015년 6월 8일자)에 ‘문과대학이 무엇을 가르치는가’에 대한 독자들의 반향 제시가 실려 있습니다. 결과는 40대 8로 ‘생각하는 힘’이 ‘실천력’을 다섯배나 능가하고 있습니다. ‘생각하는 힘’은 삶의 ‘저력(底力)’을 키워줍니다. 그러지 않아도 뒷심이 약해지고 있는 이즈음, 대학에서마저 인문학이 죽는다면 대한민국은 더욱 황량한 사회가 됩니다.
삼성 창업자인 고 이병철 회장이, 자신의 인간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은 논어(論語)였다고 합니다. “간결한 말 속에 사상과 체험이 응축되어 있어 인간이 사회인으로 살아가는데 불가결한 마음가짐을 알려준다”며 머리맡에 두었다고 합니다(김영래『삼성의 DNA』71쪽). 롯데의 신격호 회장은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감명받아 소설 속 여주인공 샤롯데(Charlotte)에서 롯데라는 이름을 따왔다고 합니다. 박용성 전 이사장은 머리맡에 무슨 책을 두고 있으며, 젊었을 때 감명받은 책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낭만과 고뇌 어린 청춘을 어루만지는 대학이어야 할 텐데……, 보듬는 아량은 터럭 한 끝도 안 보입니다. 문학∙역사∙철학이란 문사철(文史哲)을 모르는 경영자의 참담한 단면을 보게 됩니다.
생각하는 갈대
스님들이 수도를 많이 하면 천진한 어린아이 얼굴로 돌아온다 합니다. 노회한 옹고집의 노인네가 아니라 해맑은 마음의 동자상이 배움의 동산에는 더 잘 어울립니다. 언제부터인지 우리나라에서 감동이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아마도 상호존중이 경시되고나서부터가 아닐까요? 규칙에 의한 통치도 어렵고 인심이 사나워져 덕이나 미풍(美風)에 의한 질서유지도 힘들어졌습니다. 학교 앞 큰 돌에 ‘의(義)에 죽고 참에 살자’고 새겨놓은 중앙대가, ‘불의에 살고 거짓허울에 죽고 있는’ 몰골입니다. ‘의혈(義血)이 한강을 건너면 역사가 바뀐다’던 민주화 항쟁의 자부심은 전설의 고향이 되었고, 지금은 고름섞인 피가 흑석에 뿌려져 기피의 땅이 되지 않을까 저어됩니다.
중앙대 사태가 대한민국의 단면이 아니고 그저 특수한 현상이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더럽혀진 언어, 불안, 협박, 비겁의 난무극 속에서도 양심의 싹은 움트리라 믿습니다. 갈대처럼 흔들리고 휘어지기 쉬운 인간이지만, ‘생각하는 갈대’로서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이제까지 남의 흉을 보았는데, 제 눈의 들보를 보지 못하는지? 상대방을 존중하고 있는지? 자책하는 심정으로 되돌아 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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