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심과 불안감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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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스(MERS, 중동 호흡기 증후군) 공포가 한반도를 강타한 지 한 달 반이 지난 지금, 초기의 공포감은 줄어들었을지 모르나 만성적인 불안감은 여전히 국민 곁을 떠나지 않고 있다. 공포심이나 불안감과 같은 부정적 정서는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다. 하루하루 힘든 국민들의 삶에 부정적 정서의 무게까지 짓누르고 있는 상황이다. 공포심과 불안감은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다르다.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이것을 해소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잠시 생각해 보았다.
□ 공포심
공포심(fear)은 구체적 대상을 강하게 두려워하는 것이다. 『감정과 이성』이라는 책의 저자인 래저러스(Lazarus) 부부는 “우리의 신체적 행복에 대한 구체적이고 갑작스러운 위험”과 직면할 때 공포심이 생긴다고 정의한 바 있다. 여기서 갑작스러운 위험이란 “상해 또는 죽음이 곧 닥쳐올 것이라는 전망”을 의미한다.
대개 공포심은 강도가 강하다. 위험이 구체적이고 현실로 다가 올 가능성이 크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어쩌면 자신에게 닥칠 이러한 위험에 대해 공포심으로 반응할 수 있는 인간의 특성이 인간을 지금까지 생존하게 한 가장 중요한 특성일 지도 모른다. 만약 우리의 조상 중에 누군가 ‘나를 해칠 수도 있는 맹수’를 보고도 공포심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 조상은 이미 그 맹수에게 잡아먹혀 그 유전자를 후대에 전승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현세에 이르기까지 살아남아 있는 우리들의 유전자 안에는 우리에게 해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이를 피하려는 본능이 당연히 남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전쟁을 왜 두려워하는가? 전쟁은 바로 위에서 말한 공포의 조건을 모두 그대로 갖추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쟁도 아주 먼 나라에서 일어난다면 당연히 공포심은 줄어든다. 만약 메르스가 다른 나라에서 발생했다면 우리는 그렇게까지 큰 공포를 느끼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난 5월, 메르스 첫 환자가 발생했을 때만 해도 공포심은 국지적이었다. 그러나 곧 잠잠해질 것으로 기대했던 메르스의 확산 수위가 누그러질 기미를 보이지 않자 공포심도 점차 그 범위를 넓혀 갔다. 바로 이런 공포심 때문에 수많은 학교들이 휴교를 하고 바깥출입을 자제하여 소비심리까지 위축되었다.
□ 불안감
메르스에 대한 초기의 공포심은 차츰 불안감으로 변화해 가고 있다. 불안감(anxiety)의 핵심은 ‘불확실한 위협’이다. 뭔가 위협이 있기는 한데 그것이 무엇인지 콕 집어 이야기할 수 없을 때 느끼는 불안감은 불쾌한 감정이지만 공포심에 비해 그 강도는 약하다. 구체적 대상에 대해 느끼는 것이 아닌 막연한 불안감일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피해를 당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 성격을 정확히 알 수 없을 때 불안해진다. 또는 그러한 피해가 현실화될 것인지 아닌지, 언제 현실화될 것인지를 잘 모를 때도 불안감을 느낀다. 그래서 공포심과 달리 불안감을 일으키는 저변의 위협은 추상적이며 모호할 때가 많다. 그렇다고 하여 불안감에 전혀 실체가 없는 것은 아니다. 뭔가 위협이 있기는 한데, 그 실체를 딱히 꼬집어 이야기하기 어려울 뿐이다.
메르스 감염자들의 범위가 넓어지면서 시간적, 지역적 집중도가 희석되고 있는 현재의 상태에서 국민들이 느끼고 있는 감정은 이처럼 불확실성을 내포한 채 널리 퍼져 있는 불안감에 더 가깝다. 사람들은 메르스로 인해 일상생활을 완전히 접을 수는 없기에 일상을 이어 가고 있지만 여전히 불안해한다. 국가도 병원도 믿을 수 없고, 자기 건강은 자기가 지키는 수밖에 없다는 불신을 껴안은 채, 오늘도 불안한 마음으로 출근을 한다.
□ 바닥 드러난 감정자본
공포심이든 불안감이든 둘 모두 매우 부정적인 감정이다. 이런 감정들은 행동을 촉진하지 않고 억제한다. 적극적으로 나서기보다 안으로 숨어들게 만든다. 즉, 행동 활성화 체계(behavioral approach system)를 억누르고 행동 억제 체계(behavioral inhibition system)를 활성화시킨다.
우리 사회가 이성과 논리의 힘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중요한 에너지의 근원은 바로 감정과 정서의 힘이다. 신나는 감정이 있어야 움직이고 싶은 의욕이 생기는 것이다. 머리로 아무리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해도 마음이 따라주지 않으면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감정자본(emotional capital)’을 쉽게 풀어 이야기하면, 감정이 에너지원이 되어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있는 바탕을 의미한다. 사랑, 신뢰, 인내, 공감, 기쁨, 배려 등이 많으면 감정자본이 증가하고, 증오, 불신, 분노, 고뇌, 슬픔, 적개심 등이 많으면 감정자본이 감소한다. 기업 쪽에서는 기업과 관련된 선의의 감정을 통틀어 감정자본이라 지칭하기도 한다.
감정의 특성 중 하나는 계속 한 가지만 생각하면 그 속에 함몰되어 더욱 단단해지는 자기설득의 공고화 과정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요즘 계속 메르스 생각만 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언론이다. 예전과 달리 온갖 미디어의 과잉 시대에 살고 있는 요즘은 동일한 정보에 과다하게 노출된다. 언론사들끼리도 경쟁적으로 더욱 자극적인 기사를 더욱 빨리 내보내려 애쓴다. 그러다가 모 언론사는 메르스 확진 환자 중 한 명인 삼성서울병원 의사가 뇌사 판정을 받았다는 오보를 내기까지 했다. 부정적 정서를 일으키는 정보에 과도하게 노출되면 정상적인 사람도 부정적 정서에 감염되기 마련이다.
□ 바닥을 딛고 일어서기
정호승 시인의 ‘바닥에 대하여’라는 시가 있다. “바닥까지 가 본 사람들은 말한다. 결국 바닥은 보이지 않는다고. ... 바닥을 굳세게 딛고 일어선 사람들도 말한다. 더 이상 바닥에 발이 닿지 않는다고. 발이 닿지 않아도 그냥 바닥을 딛고 일어서는 것이라고. ...” 바닥이 뚜렷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우리는 바닥을 딛고 일어서야 한다.
2014년 4월에는 세월호 사건으로 인해, 2015년 5월에는 메르스 사태로 인해 한국의 경제와 한국인의 심리는 바닥을 경험하고 있다. 하나의 파도를 극복하고 일어서려는 순간에 또 하나의 파도가 덮친 격이다. 위기의 순간이 왔을 때 국가나 정부가, 또는 권위 있는 의료기관이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줄 것이라는 신뢰는 허망하게 사라져버렸다. 현재 우리 국민의 감정 계좌는 마이너스 통장이다.
작년에 세월호가 유발했던 감정은 우울감이었다. 각성수준이 낮은 부정적 정서였다. 올해 메르스가 유발한 감정은 공포심과 불안감이다. 분노와 유사하게, 각성수준이 높은 부정적 정서에 해당한다. 어쨌든 우리는 개인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이러한 부정적 정서를 긍정적 정서로 전환시키는 데 주력해야 한다. 그래야 사회를 발전적인 방향으로 가동시킬 수 있는 감정자본을 확보할 수 있다.
부정적 정서를 긍정적 정서로 전환시키되, 각성수준이 낮으면 이를 높이고, 각성수준이 높으면 이를 낮추는 것이 올바른 방향이다. 우울할 때는 신나고 흥미진진한 쪽으로, 두렵거나 화날 때는 차분하고 안정감을 주는 쪽으로 감정을 변화시킬 수 있는 자원이 필요하다. 지금은 지나친 공포감과 불안감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일상을 지켜 나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개인의 삶이든 국가 사회의 삶이든, 항상 평화로울 수만은 없다. 크고 작은 위기와 갈등이 가끔 또는 자주 등장하기 마련이다. 상황이 좋을 때보다 상황이 좋지 않을 때 어떻게 헤쳐 나가는가 하는 데서 한 개인과 국가의 진정한 역량이 드러난다. 한국인과 대한민국! 어려움을 극복하고 더욱 성숙한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도록 바닥을 딛고 일어설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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