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7I-끝) : 후조(後趙)의 흥망성쇠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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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
(57) 국가이름을 위로 바꾼 석민(AD350)
황제 석준을 제거하는데 성공한 석민은 ‘계조이(繼趙李)’ 라는 도참설, 즉 ‘조씨를 잇는 사람은 이씨‘를 신봉하여 성을 이씨로 바꾸고 나라도 위(衛)로 고쳤다. 석준 밑에 있던 신료들은 뿔뿔이 지방으로 흩어져 할거하였다. 예를 들어 요익중은 섭두(하남성 조강현), 단감은 진류(하남성 진류현), 포홍은 반두(하남성 준현), 장침은 부구(하북성 자현) 등지를 장악하고 웅거하였다. 결국 후조는 석민이 장악하고 있는 업성 부근과 석지가 장악하고 있는 형태 부근, 그리고 군웅이 할거하고 있는 여러 지방으로 갈기갈기 찢긴 셈이었다.
기주로 달아났던 여음왕 석곤은 7만 무리를 이끌고 석민을 공격하다가 참패당했다. 갇혀있던 석감은 몰래 환관을 바깥으로 장침에게 보내 석민을 습격하도록 종용했다. 그러나 교활한 환관은 그 사실을 석민과 이농에게 고해 바쳤다. 석민과 이농은 결국 석감과 그 식솔들을 모두 죽이고 남아있는 석호의 손자 28명을 죽였다. 석씨 성을 가지고 살아남아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석민은 주변의 강권에 따라 국호를 다시 대위(大魏)라고 고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역사에서는 이 나라를 염씨의 위나라 즉 염위(冉魏)라고 부른다.
(58) 마추의 포홍 암살계획(AD350)
동진 조정은 내부 승계 문제로 혼란한 틈을 타서 염위를 공략할 생각을 품었다. 양주(楊洲)자사 은호와 후조에서 투항해온 포홍과 그 아들 포건을 선봉으로 세워 석민 침략계획을 세웠다. 요익중은 관우, 즉 함곡관 지역을 놓고 포홍과 예민하게 다투고 있었는데 포홍이 염민을 공격한다는 것을 알고 아들 요양을 파견하여 5만 군사로 선제공격을 감행했다가 대패를 당했다.
이번 승리를 계기로 포홍은 스스로를 삼진왕(三秦王)이라 부르면서 성을 포(蒱)씨에서 부(苻)씨로 바꾸었다. 손자 포견(나중에 전진의 영웅 부견)의 등에 초부(艸付) 라는 글자가 새겨 있어서 그렇게 했다는 설이 있다.
장수 맞추가 부홍에게 이렇게 말했다.
“ 염민과 석지가 서로 겨루고 있으니 아직은 중원은 평정될 수가 없습니다.
먼저 관중을 빼앗고 나서 가업을 튼튼히 함만 못합니다.
그런 다음에 시간을 봐서 동쪽으로 쳐들어가
천하를 다툰다면 누가 감히 대적하겠습니까? “
부홍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맞추는 연회를 이용하여 부홍에게 짐독을 먹여 죽이고 그 무리를 자신의 세력으로 규합하려다가 발각되었다. 아들 부건이 맞추의 목을 베었다.
(59) 석지가 후조를 계승(AD350)
양국의 신흥왕 석지는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연호를 영녕이라고 하면서 여음왕 석곤을 상국으로 삼았다. 주변에 흩어져 웅거하는 모든 이민족은 석지에게 지지를 표명하엿다. 석지는 요익중에게 우승상, 친조왕이라고 칭하면서 특별히 우대하였다. 요익중의 아들 요양이 배포도 크고 용감하며 지략이 뛰어났으므로 주변 모두가 그를 세자로 책봉하라고 권했지만 요익중은 장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다. 석지는 요양을 예주자사 신창공에 책봉했고 부건에게는 도독하남제군사 및 연주목과 약양군공에 봉하였다.
AD350년 4월 석지는 10만 군사를 석곤에게 붙여서 왕랑과 장거 등과 함께 남쪽 염민의 위나라를 공격했다. 6월에 석곤의 군사는 한단을 점거하고 번양(하남성 내황현)에서 유국과 협공하기로 했다. 그러나 염위의 장군 왕태가 기습공격을 감행하여 석곤의 군대는 크게 깨졌다. 유국은 군대를 돌려 돌아가고 말았다.
(60) 부건의 관중 장악과 장안입성(AD350)
석지의 거기장군 왕랑이 석곤과 함께 업을 공격하러 떠난 사이 왕랑의 사마 두홍은 장안을 점거하고서 스스로 동진의 정북장군 및 옹주자사라고 부르면서 장거를 자신의 사마로 삼았는데 부홍의 아들 부건이 장안을 탐내어 뺏을 생각이 있었다. 따라서 두홍이 그 생각을 알아채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겉으로는 석지가 내린 후조의 관작(도독하남제군사 및 연주목과 약양군공)을 받는 척하면서 부하들을 하남 요지에 임명하여 서쪽(즉 장안)에 뜻이 전혀 없는 것 같이 위장했다.
이렇게 위장하여 두홍을 안심시킨 뒤 부홍은 스스로 동진이 내린 직책, 즉 정서대장군 및 도독관중제군사의 기치를 높이 들고 전격적으로 군대를 몰아서 두홍을 쳐들어갔다. 동생 부웅은 5천 군사로 동관으로 들어가고, 부청은 7천 무리로 지관(하남성 제원)으로 들어갔다.
부웅이 동생 부청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다.
“ 성공하지 못한다면
너는 하북에서 죽을 것이고
나는 하남에서 죽을 것이다.“
두홍은 장수 장선과 1만 3천의 군사를 보내 동관의 북쪽에서 부웅과 부청의 군사를 맞아 싸웠으나 장선은 참패하고 말았다. 두홍은 관중의 모든 자원을 동원하여 장안에서 부웅 부청의 군사를 대적했으나 두홍의 아우 두욱이 부건에게 항복함으로써 거의 모든 전투에서 지고 말았다. 주변의모든 성읍들은 부건에게 귀부하였지만 두홍은 장안성을 닫아걸고 대치하면서 항복하지 않고 버티었다.(AD350년8월)
부청은 위수 북쪽에서 장선의 나머지 군사를 격파하고 그를 사로잡았다. 장선이 잡히자 삼보(장안을 크게 세 지역으로 나눈 지역)의 모든 성과 보루들이 부청에게 항복했다. 10월 부건이 장안으로 급히 들어오자 석 달간이나 버티던 두홍과 장거도 성을 버리고 서쪽의 사죽(섬서성 주지)으로 도망가고 말았다. 부건은 11월 27일 장안성에 입성했다. 당시 백성들은 진나라에 대한 충성심이 살아있었으므로 부건은 참군 두산백을 건강에 보내 형식적으로 장안이 진나라 소유의 땅이 된 것처럼 승리를 바쳤다. 다음해(AD351년 1월) 부건은 장안에서 대진(大秦:역사에서는 전진前秦)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천왕자리에 오른다.
(61) 염민의 양국공격 실패(AD351)
염위 주군 염민은 석지가 장악하고 있는 양국(하북성 형태)을 포위하고 100여일이나 공격하였다. 다급해진 석지는 황제의 칭호를 버리고 태위장거를 급히 전연의 모용준에게 보내 전국새를 주면서 구원군을 요청하는 한편 하북성 조강에 있는 요익중에게도 손을 벌렸다. 요익중은 아들 요양에게 2만 8천 정예기병을 파견하면서 말했다.
“ 너의 재주가 염민의 열 배이니
잡아서 효수하지 못하면 날 볼 생각을 말아라.“
요익중은 동시에 전연의 모용준에게 편지를 보내 지원군의 필요함을 역설했다. 모용준은 3만 군사를 열관과 함께 파병했다. 염민은 모용준이 석지를 지원한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대사마부 종사중랑 상위를 사신으로 보냈다. 모용준은 길러준 석씨를 배반한 염씨를 극렬하게 힐난했다. 상위가 항변했지만 모용준은 상위를 감옥에 가두었다.
염민은 양국을 포위한 채 석지의 지원군 요양, 여음왕 석곤 및 모용황이 보낸 열관과 치열한 전투를 펼쳤다. 그러나 수십만 석지-요익중-모용황 연합군을 이기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염민은 수만의 군사를 잃은 채로 10명의 기병과 함께 겨우 숨어서 업성으로 돌아왔다. 염민의 군사 중에서 사로잡힌 대선우 염윤과 좌복야 유기는 물론 포로 약 10만을 모두 죽였다. 요익중은 염민을 생포해 오지 못한 요양을 곤장100대를 때려 질책했다.(AD351년 3월)
(62) 유현의 석지 살해와 후조 멸망(AD351)
양국을 무난히 방어한 조왕 석지는 장수 유현와 7만 군사를 일으켜 업성의 염민을 공격하기로 마음먹었다. 석지의 군대가 업성 부근까지 도달하자 겁이 난 염민은 위장군 왕태와 상의하려고 했지만 왕태는 병을 핑계로 의논하기를 거부했다. 할 수 없이 염민은 홀로 전쟁에 나섰고 유현을 대파하고 3만여 명을 참살했다. 유현이 염민에게 항복하면서 자신이 돌아가서 석지를 암살하여 보답하겠다고 하자 염민은 그렇게 믿고 회군하여 돌아갔다. 그리고는 반란음모죄로 왕태와 그 삼족을 처치했다.
양국으로 돌아온 유현은 석지와 승상 석병, 그리고 태재 조서 등 10여명을 시해하고 그 머리를 업으로 보냈다. 이로써 마지막 남은 후조의 뿌리가 완전히 절멸된 셈이다. AD319년 석륵이 후조를 세운지 꼭 32년 만에 망한 것이다. 염민은 석지의 머리를 사거리에서 태워버리고 유현에게 상대장군 및 대선우 기주목의 직책을 내렸다.(AD351년3-4월) 그러나 몇 달 뒤 유현은 다시 군사를 이끌고 업을 공격했으나 패해서 돌아온 뒤 스스로 황제를 자칭했다. 양국에서 스스로 황제를 칭했던 유현은 그 다음해(AD352년) 염민의 공격을 받고 사로잡혀 죽었고 염민 또한 그 해 전연 모용준의 장수 모용각의 공격을 받고 사로잡혀 계성(북경) 처형되었다(AD352년 5월3일).
염민의 아들 염지가 업성에서 버티었으나 7월 명위의 장수 마원이 성문을 열고 항복함으로써 염위는 건국 2년 만에 멸망했다. 모용준은 염지를 죽이지 않고 해빈후라는 작위를 주어 생계를 이어가게 하였다. 그러나 2년 뒤 반역을 모의했다는 무고로 결국 모용준에게 죽었다.
(63) 석륵의 후조가 일어났다가 망한 이유
갈족의 작은 추장의 아들로 태어나서 이리저리 흘러 다니던 방랑아 석륵이 서진이 망한 뒤 갈래 갈래로 찢긴 북중국 거의 전역을 통일하는 대업을 세운 것은 가히 조조를 능가한다고 할 만하다. 특히 완벽한 흙수저의 빈 손으로 출발하여 큰 행운도 없이 오로지 자신의 능력으로 대업을 일구었다는 점에서 확실히 조조나 사마염에 뒤지지 않는다.
석륵이 북중국을 통일해 나가는 과정은 그야말로 한 편의 드라마다. 유연의 객장으로 시작해서 북방 여러 주의 자사와 실력자들을 하나하나 정복해 나갔는데, 왕미, 근준, 업성의 사마등, 기주자사 왕빈, 연주바사 원부, 예주자사 사마확, 청주자사 이운, 기주자사 왕상, 청주도독 구희, 연주자사 전휘, 연주자사 서감, 청주자사 조억, 그리고 유주자사 왕준까지 처단하고 궁극적으로 유연의 전조마저도 멸망시켰다.(AD329)
당대 최고의 강자 후조도 석륵이 죽자(AD333) 급격하게 붕괴되었다. 첫째, 황위를 물려받은 석홍이 대업을 이을 재목이 되지 못하였다. 둘째, 이미 실권은 석호에게 넘어가 있었고 병든석륵도 조정을 거의 장악한 이복동생 석호를 제지할 능력도 기력도 상실한 상태였다. 셋째, 석호가 황제 석홍을 죽이고 등극(AD335)하는 과정에서 너무 많은 훌륭한 인재들이 제거되거나 혹은 조정을 떠나게 되었다. 석호는 석륵에 버금가는 무공을 세운 사람이다. 전투능력이나 실전 전공으로 치자면 석호는 절대로 석륵에 뒤지지 않는다. 사실 석륵 치하의 대부분의 무공은 사실은 석호가 세운 것들이었다. 따라서 석호가 황위를 찬탈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이 후조의 멸망으로 자동 연결될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수많은 조정의 인재를 죽이거나 잃은 것은 통일된 이후의 후조를 이끌고 갈 정치적 자산을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물론 석호는 전 중국을 통일하기 위해서 과도한 전쟁을 일으키기는 했다. 두 차례 요서정벌 및 동진정벌 로 국력이 크게 피폐해 진 것은 맞다. 그리고 수많은 토목공사와 사치로 국가재정을 고갈시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후조가 결정적으로 망하게 된 것은 석호의 무자비한 정치로 인한 민심이반이 끊임없는 내분 및 반란의 단초를 제공했다는 점이다. 태자 석수의 반란시도, 석선으로의 태자 교체(AD337), 태자 석선의 동생 석도 살해(AD348), 석호의 태자 석선처형(AD348)으로 후조 황실은 심각한 내부분열이 진행된 것이 멸망의 근본원인이다. 이런 와중에 석호마저 병사(AD349년 4월) 병사하자 어린 황제 석세를 두고 치열한 내분이 격화되었다. 석감(石堪)의 쿠테타(AD349), 석감의 쿠테타(AD349) 그리고 석민의 쿠테타로 황위는 계속 바뀌어 갔다. 마지막으로 정권을 잡은 석호의 양자 석민은 나라의 이름은 염위로 바꾸었고 석호의 살아남은 다른 아들 석지는 자신의 봉지 양국에서 명맥을 잇고자 했지만 결국에는 염민에게 멸망당하고 말았다.(AD351)
민심에 유념하여 나라를 대대로 잇는 것이 혁혁한 무공으로 나라를 세우는 것보다 몇 배나 어렵다는 것을 석륵과 석호의 후조가 잘 보여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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