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7G) : 후조(後趙)의 흥망성쇠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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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
(44) 석호와 모용황의 요동 전투(AD340)
지난 해(AD339)부터 석호는 무군장군 이농을 영지(하북성 천안현:북경 동쪽 200KM)에 주둔시키고 모용황을 토벌할 준비를 진행했다. 하북 7주의 백성들에게 대대적으로 동원령을 내려 장정 5명 집은 세명, 네 명인 집은 두 명씩 징집했다. 이렇게 해서 모은 50만 대군과 배 1만 척과 곡식 1천1백만 곡을 동원해서 낙안(하북성 낙정현)에 모았다. 요서지방의 주민은 모두 남쪽 연주, 예주 및 낙주 등으로 이주시켰으며 백성들의 말은 강제로 빼앗았다.
후조의 어마어마한 대군에도 불구하고 전연의 모용황은 조금도 긴장하지 않고 말했다.
“ 석호가 스스로 낙안성을 지키는데 총력을 기우리고 있지만
계성(북경)을 방비하는 것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
지금 당장 길을 속여서 계성의 석호의 배후를 습격하면 반드시 그들을 깨뜨릴 것이다.“
10월 모용황은 기습부대를 직접 인솔하고 석호의 배후인 거용관(북경시 서북 창평구)을 급습했다. 계성을 지키던 유주자사 석광은 문을 닫고 응전하지 않았다. 모용황은 군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와 고양(하북성 보정)까지 내려와 약탈하고는 북으로 돌아갔다. 석광은 나약하다는 판단에 따라 면직 당해 쫓겨났다. 석호의 요동 정벌은 이렇게 해서 패배로 막을 내렸다.
(45) 태자 석도와 석선의 무능함과 환관 신편(申扁)(AD340)
조왕 석호는 석도를 태위로 삼고 형이자 태자인 석선과 함께 정사를 교대로 나누어 보게 하였다. 사도 신종이 석호에게 간언을 올렸다.
“ 상벌을 주는 것은 임금의 중요하고 고유한 권한이라서
남에게 빌려 주는 것이 아닌 것은 조금씩 권력이 누수가 되는 것을 막아서
나중에 반란이나 혼란을 원초적으로 제거하기 위한 것입니다.
태자의 직책이란 음식을 보살피는 것일 뿐 정치에 간여하는 것이 아닌 것은
지난 번 석수의 경우와 같아서 넘어진 수레가 그리 멀지 않습니다.
또 두 분이 권력을 나누게 되면 서로 다툼이 일어날 것이므로
화가 닥치지 않는 것이 매우 드물게 될 것입니다.
아끼는 것이라도 도를 가지고 다루지 않으면 (爱之不以道)
결국은 해악을 끼치는 것이 될 것입니다.(适所以害之也)“
석호는 신종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지혜있고 총명한 환관 신편이 석호의 총애를 받아 기밀을 관장했는데 그것을 잘 아는 석선과 석도는 모든 일을 신편에게만 맡기고 스스로는 술과 사냥에만 몰두하였다. 인사와 상벌 등 후조 조정의 모든 실권은 신편에게 있었으므로 공경대부들은 신편이 지나가는 먼지에 인사를 올릴 지경이었다.
(46) 석호의 폭정과 황실의 내분(AD342-AD344)
석호는 업성에 40여개의 누각과 고대를 건축하게 하였으며 장안과 낙양의 궁궐도 모두 수리하도록 명령했는데 동원된 인력이 40여 만 명이었다. 또 수도 양국(형태)과 업성 사이의 50여 KM 거리에 나무로 된 고가도로를 건축하도록 하였다. 석호는 황하 남쪽의 네 주에게는 동진을 토벌할 준비를 시키고 청주, 기주 및 유주는 요동 정벌을 준비시켰는데 갑옷을 만드는 사람만 50여 만 명이었고 사공이 17만 명 이었지만 물에 빠지거나 호랑이에게 먹힌 사람이 세 명중 한명이었다. 그 위에 지방관과 토호들은 백성을 착취하는데 여념이 없었고 요역 동원이 그치지 않자 민란이 곳곳에서 일어날 조짐이 보였다.
사십대 중반인 석호는 백성들의 원성에도 아랑곳없이 무절제하게 사냥에 몰두했으며 또 한편으로는 몰래 미복을 하고는 밤중에 시가를 돌아다니면서 자기가 시킨 작업의 진척을 엿보았다. 시중 위소가 석호에게 충언을 올렸다.
“ 폐하께서는 천하의 소중함을 가볍게 여기시고
도끼를 들고 야밤에 거리를 누비시니 만에 하나
미친 녀석이 달려들면 비록 지혜와 용기가 있다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또 사람들에게 일을 시키는 일이란 때가 있는 법인데
농사일이 바쁜데도 노역에 시달리다 보니 저렇게 원성이 자자하지 않습니까?
어질고 성스러운 분이 하실 일은 차마 아닌 것으로 생각됩니다.“
위소의 간언을 가당하게 생각한 석호는 비단과 곡식을 후하게 상으로 내렸지만 제 버릇을 고치지는 못했다.
석호는 태자 석선보다도 나이가 더 어린 석도를 꽤나 총애하였는데 석선은 그런 동복동생 석도를 몹시 시기하였다. 석선에게 접근하려는 우복야 장리는 그런 석선의 심리를 꿰뚫고는 이렇게 말했다.
“ 제후들의 관리와 병사가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당연히 점차 줄여서 근본(즉 황실)의 군사력을 증강시켜야 하겠습니다.“
말하자면 황실 병력을 늘인다는 명분으로 동생 진공 석도의 군사력을 줄이자는 심산이었다. 석선은 장리에게 그렇게 상주하도록 시켰다. 내용은 석호의 네 아들(진공 석도, 연공 석빈, 의양공 석감 및 낙평공 석포)의 관리와 5만 정도의 사병을 1/3로 줄이라는 것이었다. 석호는 그대로 실행했다. 군사력이 크게 줄어든 왕자들의 불만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이 때 청주에서 요상한 보고가 올라왔다. 제남의 평릉의 북쪽에 있던 돌호랑이가 하루 저녁에 성의 동남쪽으로 옮겨졌는데 늑대와 여우 천여마리가 옮겨진 돌을 따라 가느라고 길이 생겼다는 보고였다. 석호는 돌호랑이가 자신을 의미하는 일이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북쪽에서 동남쪽으로 옮겨진 것은 자신이 반드시 장강 이남을 평정할 것이라는 하늘의 암시라고 확신했다. 칙령을 이렇게 내렸다.
“ 여러 주의 군사를 동원하라.
내가 친히 6사(모든 군사)를 관장하여 하늘의 명령을 이룰 것이다.“
석호의 명령에 따라 다섯 집이 수레 한 대와 소 두 마리와 쌀 15곡 비단 열 필을 조달하도록 했으며 명을 어기는 자는 즉시에 목을 벤다고 했다. 많은 집에서는 아들을 팔았고 그래도 모자라 나무에 목을 매어 자살한 사람들이 길에서 서로 보일 정도라고 했다.
일 년 여의 파병 준비가 거의 끝날 무렵인 AD344년 정월 석호는 태무전에서 백관 신료를 모아 신년하례를 올리고 있었는데 때마침 흰 기러기 100여 마리가 큰 길 옆에 모여들었다. 석호는 신하들에게 횐 기러기를 쏘라고 지시했으나 아무도 잡는 사람이 없었다. 태사령 조람이 석호에게 다가와 이렇게 속삭였다.
“ 흰기러기가 들에 모인 것은
바로 이곳이 장차 텅 빌 것이라는 것은 암시하는 것입니다.
남쪽 정벌을 아무래도 불길합니다.“
석호도 그렇게 생각이 들었다. 곧바로 선무관으로 가서 크게 열병식을 올린 뒤 100만 대군을 해산했다.(AD344년 1월)
(47) 소환된 석감과 계속되는 폭정(AD345)
관중(장안지역)에 진수하여 관할하던 석호의 아들 의양공 석감(石鑒)이 아버지 못지않게 폭정을 자행했다. 노역을 과도하게 부리고 부세를 무겁게 올렸으며 문무관료들의 머리털을 뽑아 갓끈을 만들고 남는 머리카락을 궁녀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장사가 조왕 석호에게 그 일을 고해바치자 석호는 즉각 석감을 업으로 소환하고 그 자리에 다른 아들 낙평공 석포를 임명 배치했다. 그리고 옹주(장안지역), 낙주(낙양지역), 진주(섬서중남부) 및 병주(산서성 태원지역)의 군사 16만을 징발하여 장안의 미앙궁을 수리하도록 했고 낙양궁을 수리하는 데에는 26만 명이 동원 되었다.
사냥을 좋아하는 석호는 나이가 들고 몸이 무거워 말을 타고 좇기가 힘들자 수레 1천여 대를 사냥터 둘레에 늘어놓고는 사냥을 즐겼다. 동네마다 미녀와 좋은 말과 소를 징발했는데 없다고 보고하면 석호의 사냥터에서 불법으로 사냥했다고 무고하여 100여 명 이상을 죽였다. 미녀를 구하지 못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처를 강제로 빼앗기도 하고 그 남편을 죽이기도 했으며 지아비가 자살하기도 했는데 그렇게 죽은 사람이 3천여 명이 넘었다고 했다. 석호의 이런 난폭함과 잘못을 금자광록대부 녹명이 간절하게 지적했는데 석호는 녹명을 납살(拉殺,늑골을 부러뜨려 죽임)시켰다.
석호의 관군대장군 겸 십군육이대도독인 요익중은 청렴하고 강직하며 검소하고 위엄이 있어서 석호 또한 매우 존중하는 인물이었다. 조정 중대사를 결정할 때에는 항상 요익중의 의견을 들었으며 매번 그의 의견을 무시하지 않았다. 당연히 조정의 공경대부들도 요익중을 존경하여 따랐다.
요익중의 영채 안에는 석호의 총애하는 비첩의 동생이 금위로 있었는데 이 사람이 누나의 위세를 믿고서 군영 안에서 큰 소란을 피웠다. 요익중이 당장 그를 잡아들이고 이렇게 꾸짖었다.
“ 너는 금위가 되어서 힘없는 백성을 위협하는데
나는 대신이 되어서 그것을 내 눈으로 똑바로 보았으니
절대로 묵과할 수가 없다. “
주위에 명을 내려서 목을 베게 하였는데 금위가 땅에 머리를 대고 피가 철철 흐르기까지 사죄했다. 주위에서 굳게 말리므로 요익중이 그를 용서해 주었다.(AD345)
(48) 환관 엄생의 전횡과 포홍의 충간(AD346)
석호의 총애하는 환관이 위세를 업고서 상서 주궤를 몹시 증오하였다. 마침 오랫동안 장마가 지자 엄생은 도로를 제대로 수리하지 않아서 백성들의 원성을 샀으며 게다가 조정 정치를 비방했다고 주궤를 참소했다. 석호는 즉각 주궤를 가두었다. 포홍이 나서서 주궤를 옹호했다.
“ 폐하께서 양국과 업궁을 가지고 계신데 장안이나 낙양궁은 어디에 쓰실 생각이십니까?
사냥하는 수레만 1천 대이고 둘레만 해도 수 백리 울타리에서 금수를 기르고 계십니다.
다른 사람의 처를 10여 만 명을 탈취하셔서 후궁에다 채워놓으시니
성스러운 황제와 밝은 임금이 정녕 이렇게 하겠습니까?
오늘은 길을 제대로 닦지 않았다고 상서를 죽이려고 하십니다.
폐하께서 올바른 덕치를 하지 않으시니 하늘이 노하여 비를 70여 일이나 내린 것입니다.
귀신같은 100만 군사라 하더라도 비가 개이고 이틀 만에
진흙구덩이를 제거할 수 없을 텐데 어찌 한 사람에게 그것을 기대한 단 말입니까.
정치와 형벌이 이런 모양이니 사해는 어떨 것이며 후대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부디 작업을 즉각 중단하시고 원유는 없애시며 궁녀들을 풀어서 내보내고
주궤를 용서하시옵소서.“
석호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지만 평소 존경하는 열 살 연상의 어른이었으므로 포홍에게 죄를 주지는 않았다. 장안과 낙양 공사는 중단했으나 주궤는 죽였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고발하는 것을 허용했으나 조정정치를 비방하면 엄벌에 처하는 법을 만들었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군주와 언론과 소통의 길이 꽉 막혀버렸다.
(49) 석선의 석도 살해(AD348)
석호는 사냥과 궁궐 건축에 빠져 사리를 분별 할 수가 없었다. 간악한 사람들은 그런 석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더 큰 사역과 더 큰 사냥을 계속하여 부추겼다. 석호는 태자 석선과 아들 석도를 데리고 호화스런 사냥을 그치지 않았는데 태자 석선은 아버지가 동생 석도를 태자인 자기와 똑같이 대하는 것에 대해 불만이 가득했다. 그런 석선의 마음을 잘 읽은 환관 조생이 석선에게 다가가 슬며시 제안했다.
“ 석도를 제거해야 태자의 자리가 안전할 것입니다.”
석선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이로부터 석도를 제거하는 모의가 시작되었다.(AD347년 9월) 사실 조왕 석호는 진정으로 석선 대신 석도를 세울 계획이었으나 나이가 어린 동생이었으므로 결단을 미적거리고 있었다. 석선이 잘못된 행동을 할 때 마다 석도를 세우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이렇게 되니 교만해지고 방탕해지는 쪽은 석선이 아니라 오히려 석도 쪽이었다. 석도가 태위였으므로 태위부 건물의 대들보 길이를 9장으로 했는데 이는 태자부 대들보 보다 더 긴 것이었다. 화가 난 석선은 석도의 장인의 목을 치고 태위부 대들보를 잘라버렸다. 화가 난 석도는 대들보 길이를 10장으로 더 늘여 지었다. 석선은 측근 모신 양배와 모성과 조생을 불렀다.
“ 흉악한 석도가 감히 패역하여 태자인 나에게 이렇게 까지 나오다니.
저 놈을 죽이는 자는 석도가 가진 국읍을 모두 나누어 주겠다.
석도의 장례에 아버지는 반드시 올 것이므로 그 기회에
큰일을 일으키면 성공 못할 이유가 없지 않겠느냐? “
양배 무리가 승낙했다. 8월 석도가 밤중에 친한 속료들을 불러 동명관에서 연회를 열고는 불정사에서 숙박했다. 석선이 명령하여 양배 등이 사다리를 타고 불정사에 들어가 석도를 죽이고 칼과 화살을 두고 가버렸다.
(50) 충격에 빠진 석호의 복수(AD 348)
충격을 받은 석호는 며칠 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석도의 장례일이 다가오자 석호가 참례하려 했으나 사공 이농이 말렸다.
“ 진범이 누구인지 모르는데 가벼이 나가시면 안 됩니다.”
석호는 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석선은 석도의 장례식에 찾아와 곡을 하지도 않았으며 시체를 보고 크게 웃고는 돌아갔다. 그리고는 기실참군 정정과 윤무에게 죄를 뒤집어 씌울 계획이었다. 석호는 석선이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석선을 부르려 했지만 오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석호와 석선의 대결국면으로 발전하는 것은 너무나 뻔한 일이었다. 석호는 다른 계략을 썼다. 즉 석도의 생모가 너무 충격을 받아서 일어나지 못하고 생명이 위독하다고 석선에게 알렸다. 석도의 모후 두씨는 석선에게도 생모였다. 석선은 자신의 소행인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태연히 모후 병문안을 왔다가 체포되었다. 조생을 제외한 모든 자객이 숨어버렸으나 조생은 모든 것을 다 토해 내었다.
격노한 석호는 석선의 목에 쇠고리를 걸어 창고에 가두었다. 그리고는 석도를 죽인 칼과 화살의 피를 직접 맛을 본 다음 슬피 울었는데 궁궐이 울릴 정도라고 했다. 대화상 불도징이 나서서 말했다.
“ 석도나 석선이나 모두 폐하의 자식 아닙니까.
지금 석도 때문에 석선을 죽이시면 이야말로 화가 거듭되는 것입니다.
만약 석선에게 자비와 용서를 베푸시면 복록이 길어질 것이지만
만약 그를 죽이신다면 석선은 혜성이 되어 업궁을 쓸어버릴 것입니다.“
석호는 듣지 않았다. 업성 북쪽에 장작을 쌓아놓고 그 위에 표지를 세우고 사다리를 놓은 다음에 석도가 가까이 했던 환관 학치와 유패에게 석선의 머리털을 다 뽑게 하고 혀를 뽑고 그를 사다리로 장작위로 끌어올렸다. 그 다음 유패는 석선의 손과 발을 자르고 눈을 파고 창자를 터뜨려서 석도가 입은 것과 똑같이 상처를 입도록 했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장작에 불을 놓아 시체를 태웠다. 석호는 이 모든 것을 직접 참관했으며 나중에 재를 가져다가 도로에 나누어 뿌렸다. 석호는 평소 귀여워 한 석선의 어린 아들까지 죽일 생각은 없었는데 대신들이 후환을 없애기 위해 꼭 죽여야 한다며 빼앗아 죽였다. 어린 아이들이 죽지 않으려고 석호의 허리띠를 잡고 놓지 않아 결국 허리띠가 끊어지고 말았다. 석호는 이 일로 크게 병을 얻었다. 동궁에 있던 호위부대 400명을 전원 참살했으며 환관 50명도 차열형으로 죽인 다음 장수(漳水) 강물에 던져 버렸다. 동궁 휘하의 10만 군사들은 모두 량주(감숙성)으로서 귀양 보냈으며 동궁은 폐허로 만들어 돼지우리로 사용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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