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7D) : 후조(後趙)의 흥망성쇠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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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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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거듭되는 혼란과 근준의 쿠테타(AD318)
AD317년과 AD318년에는 참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서진이 멸망하면서 황제 민제는 진나라를 계승하라는 유지를 몰래 송철을 통해 남경의 사마예에게 전달했다. 사마예는 즉각 동진을 건국했다.(AD317년 4월4일) 유곤과 단필제는 진 조정에 충성을 바치기로 삽혈하며 맹세했다. 기주자사 단필제와 그 동생 단말배가 권력을 두고 심한 갈등을 하면서 그 틈바구니에 걸린 유주자사 유곤은 단필제에게 피살되었다.(AD318년) 민심은 유곤을 죽인 단필제에 등을 돌렸다. 유곤의 부하들은 일부는 단말배에게 붙었고 일부는 석륵에게 투항했다. 민심을 업은 단말배는 단필제를 공격하여 계성(북경)에서 몰아내고 스스로 유주자사를 칭하였다.
유총의 상국 유찬은 황태제 유예마저 모함으로 숙청하였으며(AD317년 4월) 근준을 시켜 죽여버렸다. 또 서진의 후환을 뿌리 뽑는다는 이유로 폐위된 민제 사마업마저 죽였다(AD317년11월). 유총이 그 다음해 AD318년에 죽자 유찬이 황제가 되었다.(AD318년 7월) 그러나 유총의 전조 조정은 외척 근씨의 수괴 근준의 농간에 휩싸이게 된다. 근준은 유총의 두 부인 근월광, 근월화의 아버지였고 동시에 유찬 부인의 아버지였다. 근준은 반대파를 제거하기 위해 사위 유찬을 이용했다. 여러 훈구대신들이 자신을 죽이고 정권을 잡으려 한다고 모함했다. 유찬이 믿으려하지 않자 근준은 딸들을 동원해서 유찬의 마음을 돌리게 하였다. 결국 대부분의 황실 종친들이 죽었다.(AD318년 7월) 정권을 잡은 근준은 자신의 친척 근명과 근강을 을 핵심 군사요직에 앉히고 금자광록대부 왕연을 움직여 유찬을 몰아내는 쿠테타를 모의했다. 왕연이 거부하자 근강이 가두었으며 곧바로 유찬을 잡아 죽이고 모든 유씨도 함께 처형했을 뿐만 아니라 유연과 유총의 능묘마저 다 파헤쳐 훼손시켰다. 스스로 대장군, 한천왕이라고 하면서 백관을 거느리며 칭제했다.
장안에 주둔하고 있던 상국 유요는 즉각 군사를 일으켜 수도 평양(임분)으로 진군했다. 석륵도 5만 군사를 거느리고 형태부근에서 출병을 준비했다. 10월에 유요가 적벽(산서성 영제현)에 당도하자 무리들이 다투어 항복하였으며 주변의 권고를 받아들여 제위에 올랐다. 근준은 시중 복태를 보내 석륵에게 화의를 요청했으나 석륵은 복태를 잡아 유요에게 보냈다. 유요는 복태를 근준에게 보내 설득시켰다. 그러나 근준은 복태의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평양에 거처하던 유요의 어머니와 형제를 모두 죽였다. 더 이상 저항할 능력도 없는데다가 근준의 포학함에 놀란 근준의 측근 교태와 왕등과 위장군 근강은 근준을 죽이고 근명을 주군으로 받들면서 유요에게 항복했다. 왕등과 근강 등이 자신이 아닌 유요에게 항복하자 화가 난 석륵은 곧바로 평양의 근명을 공격했다. 석륵은 석호와 더불어 유주 및 기주의 군사를 몰아 평양을 공격했다(AD318년12월). 다급한 근명은 유요에게 구원을 청했지만 유요 또한 석륵의 예봉을 감당하기 어려워 서쪽 속읍(산서성 백수)으로 군영을 피해 옮겼다. 석륵은 평양성을 모두 불태우고 주민들을 대거 양국(형태)로 이주시켰다. 수도 평양(임분)에서 밀려난 유요는 도읍을 장안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AD319년)
(21) 배신자 조평락의 삼족을 멸함 : 유요와의 결별과 후조 건국(AD319)
근준의 난을 평정하고 평양을 괴멸시킨 석륵이 승리의 소식을 사신 왕수를 통해 유요에게 올렸다. 유요는 석륵에게 태재 및 영대장군, 그리고 조왕을 내렸다. 이 때 왕수를 수행하여전조에 온 조평락은 공직을 받고 그대로 눌러 앉아 있었는데 유요에게 석륵의 진의는 전조의 속국으로 충성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배반하고 공격해 올 것이라고 귀띔했다. 유요는 격분한 나머지 왕수를 잡아 죽였는데 같이 수행 온 유무는 몰래 도망을 쳐서 석륵에게 돌아와 일어난 일을 모두 고해 바쳤다. 석륵이 분개해하며 말했다.
“ 나는 유씨를 섬기면서
신하로써 해야 할 직분 이상으로 충성했다.
저 사람의 기초는 모두 내가 이룬 것인데
지금에 와서 나를 도모하려 들다니 가소롭기 짝이 없다.
조왕이든 조황제든 나 스스로 하는 것이지
어찌 사람이 시켜 주기를 기다릴 것이냐?(赵王、赵帝,孤自为之,何待于彼邪)“
석륵은 조평락의 삼족을 멸했다. 이때부터 석륵은 전조의 유씨 조정과의 주종관계를 청산하고 확연하게 다른 길을 가게 된다. 장안으로 수도를 옮긴 유요는 국호를 한에서 조(역사에서는 前趙 혹은 漢趙라 칭함)로 변경하였다. 주변의 강권에 따라 석륵도 조나라(後趙)를 건국하였다.(AD319년 11월)
석륵은 석호를 보내 북쪽 삭방지역의 단필제를 공략하였다. 단필제는 북경 쪽으로 도망갔으나 탁발울률이 추격해오자 산동의 낙릉(산동성 덕주 낙릉시)으로 도피하여 기주자사 소속에게 의탁하였다. 이로써 석륵은 사실상 태원과 북경의 거의 지역을 손에 넣게 되었다. 석륵이 북방경략을 거의 마치게 되자 다음은 산동방면이 될 것이 확실했다. 초조해진 예주자사 조적은 석륵에게 사신과 함께 거대한 예물을 보내면서 황하를 경계로 서로 침범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자고 제안했다. 석륵의 생각은 산동성 조적이 아니라 먼저 유요의 장안의 숨통을 끊는 것이었으므로 흔쾌히 동의했다.
(22) 석륵의 낙양 함락(AD320)
AD319년 유요는 장안으로 도읍을 옮기고 나서 종묘, 사직단, 남교 북교를 건립하고 국호를 조라고 명명했다. 석륵은 석호를 시켜 단필제가 도망가 있는 기주자사 소속을 습격했다. 쉽게 소속을 사로잡은 석호는 그를 수도 양국으로 송환했다. 석륵은 소속이 충성스러운 사람이라고 평가하면서 극진한 대우를 펴고 종사중랑으로 등용하면서 명령했다.
“ 앞으로는 선비를 붙잡으면 죽이지 말고
반드시 산 채로 데리고 오라.“
낙양에 주둔하고 있던 전조의 장수 윤안, 송시, 송서 및 조신의 네 장수가 후조에게 항복해 왔다. 석생이 기쁜 마음으로 군사를 이끌고 낙양으로 가는 동안 이들 네 장수는 후조를 배반하고 사주자사 이구에게 투항해 버렸다. 이구는 영천태수 곽문에게 군사를 이끌고 낙양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화가 난 석생이 서둘러 낙양에 진입하여 전조의 군사와 주민을 모두 거느리고 황하를 건너 북쪽으로 가버렸다. 이로부터 낙양은 텅 빈 유령도시가 되고 말았다.
(23) 석륵의 서감격파와 회북지역 장악(AD322)
전조의 연주(산동성 서부)자사 서감은 전조 조정이 흔들리자 곧바로 전조 조정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주변지역을 노략질하고 심지어는 남쪽으로 내려와 동진의 땅을 범하기도 하였다. 동진 황제 사마예는 양감을 보내 서감을 토벌하도록 명령했다(AD319년8월) 그러나 양감은 하비(강소성 수녕)에 군사를 세워 놓고 서감을 공격하지 않았다. 답답하게 여긴 부장 서주자사 채표가 군사를 이끌고 나가서 서감을 크게 깨뜨렸다. 당황한 서감은 석륵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석륵은 장수 왕복도를 보내고 장경을 그 뒤에서 지원하도록 했다. 서감은 난폭하기 그지없는 왕복도를 죽여 버리고 동진에게 항복의 뜻을 전달했다. 그러나 사마예는 서감을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겨 항복을 받지 않았다. 그리고 양감과 채표에게 재공격을 명령하였다. 여전히 양감이 머뭇거리자 상서령 조협이 양감을 탄핵했고 그 자리에 채표를 앉혔다. 양감을 추천했던 왕도도 자신의 잘못을 아뢰며 삭탈관직을 요청했으나 황제 사마예가 허락하지 않았다.(AD320년 4-7월)
석륵은 중산공 석호와 보기병 4만을 파견하여 태안의 서감을 공격했다. 당황한 서감은 처자를 인질로 보내며 화의를 요청했다. 지난번에도 화의를 요청했다가 배반한 적이 있었지만 석륵은 이번에도 선의로 받아들여 항복을 받아줬다. 석호는 군사를 몰아 변성(강소성 사수)수녕)의 채표를 공략했다. 채표는 군사를 하비(강소성 수녕)로 물리고 수비에 치중했다. 그러나 서감에게 공격을 받아 크게 무너졌다. 채표는 패전의 책임을 지고 건강에서 참수되었다.(AD320년10월25일) 석호는 봉구(하남성 봉구)에 기지를 쌓고 돌아왔다.
다음해(AD321) 2월 서감은 다시 마음을 바꾸어 동진에 항복하겠다고 청하였다. 이해에 석륵은 석호를 보내 북쪽의 단필제를 공격하였으므로 서감을 쫓을 겨를이 없었다. 단문앙이 석호에게 사로잡히고 단필제를 비롯하여 소속과 그의 식솔들이 석호에게 항복하고 나서야 석륵은 동남쪽의 서감에게 눈을 돌릴 수가 있었다. 석호는 AD322년 2월 4만 정예군을 이끌고 산동성 태안의 서감을 공격했다. 서감은 몇 달 동안 잘 버텼으나 결국 그 해 7월에 태안이 함락되었다. 서감은 사로잡혀 양국으로 송환되었고 석륵은 서감을 자루에 넣어 매단 다음에 100척 누각에 매달아 놓고서 몽둥이로 때려 죽였다. 그런 다음에 서감에게 억울하게 죽은 장수 왕복도의 처자에게 서감의 인육을 씹어 먹게 하였으며 서감의 수하 3천명을 모조리 땅을 파고 묻어버렸다.(AD322년 7월) 석륵은 연주자사 치감이 합비(안휘성 합비)로 물러나자 그가 통치하던 추산(산동성 추현)땅을 병합했고 서주와 연주의 모든 땅은 석륵의 영토가 되었다.
(24) 석륵의 장량 복양후 장빈의 죽음(AD322)
석륵에게 장빈은 유방의 장량과 같은 존재였다. 중요한 고비마다 현명한 판단과 계략으로 석륵이 승승장구 영토를 확장시키고 경략하는 데 결정적인 공훈을 세운 사람이다. 그런 장빈이 12월에 죽었다. 석륵이 애통하게 곡을 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 하늘이 나의 일을 완성시키지 않으려고 하는 것인가?
어찌하여 나의 우후를 일도 빨리 데려가는가?“
장빈의 우장사 자리에는 정하가 앉았다. 정하는 세자 석홍의 외삼촌인데 석륵이 의논할 때마다 의견이 갈라지자 석륵이 탄식하며 말했다.
“ 우후가 나를 버리고 떠난 뒤
내가 이런 사람들과 같이 의논해야 하다니
어찌 참혹한 일이 아닌가?“
석륵이 온종일 애통해하며 울었다고 기록되어있다.
(25) 석륵의 청주 조억 제거(AD323)
석륵은 중산공 석호와 기병 4만명을 보내 안동장군 청주자사 조억을 공격했다. 청주 주변의모든 군현들은 전쟁이 일어나기도 전에 모두 석호에게 항복했다. 석호는 조억의 근거지 광고(산동성 익현)를 포위했다. 조억은 버티지 못하여 성문을 열고 나와서 항복했다. 석호는 조억을 양국으로 송환했고 석륵은 조억을 참수했다. 조억의 군사 3만 명 또한 땅 묻고 조억의 부하도 죽이려고 하자 후조의 청주자사 유징이 말하였다.
“ 지금 저더러 청주를 다스리라고 하셨는데
백성들을 모두 죽여 버리면
제가 다스릴 것이 무엇이 남겠습니까?“
석호가 마침내 남녀 700명을 유징에게 주면서 광고에 진수하도록 하였다.
(26) 전조와 후조의 사생결단 : 1차 전-후조 전쟁(호뢰관 전투)(AD325)
석호에 의해 초토화 되면서 낙양은 사실상 후조의 영향력 아래로 들어갔다(AD322). 석호는 낙양을 황하 이남 지역 침략의 근거지로 삼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낙양은 전조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요충지였다. 전조와 후조는 낙양 주변의 땅을 놓고 생사가 걸린 전쟁이 불가피했다. 선공은 후조의 석생이 일으켰다. 전조의 하남태수 윤평을 후조 사주자사 석생이 신안(하남성 신안)에서 공격하여 윤평을 죽이고 5천 가구를 압송한 것이다.(AD324년1월) 석생은 승리를 틈타 서쪽으로 하동(산서성 서부)과 남쪽으로 홍농(하남성 남부), 그리고 남동쪽으로 허창과 우현(하남성 우현)까지 노략질을 넓혀 나갔다.
후조의 석호군사에게 압박에 시달리던 사주자사 이구와 영천태수 곽묵은 전조 유요에게 항복하였고 유요는 중산왕 유악을 1만 5천 군사와 함께 보내 맹진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이와함께 진동장군 호연모는 형주와 사주의 군사를 이끌고 이구와 곽문과 만나서 함께 석생을 치기로 계획하였다. 유악은 맹진과 석량에서 이기고 드디어 석생이 있는 금용성(낙양의 서쪽 성)을 포위했다. 다급한 석호는 기병 4만으로 호뢰관으로 들어가 유악과 싸워 크게 이겼다. 유악은 패하여 물러나고 호연모도 사로잡혀 죽었다.
장안의 유요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유악을 지원하러 나섰다. 석호는 3만 기병을 따로 떼어내 유요를 맞아 싸웠다. 전조의 유흑이 후조의 석총을 팔특판(하남성 면지현)크게 이겼는데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없는 일이 밤에 벌어지면서 군사들이 크게 두려워하자 유요는 군사를 급히 물려 장안으로 퇴각하였다. 6월에 석호는 유악과 그의 장수 80여명을 사로잡아 양국으로 압송하였다. 유요는 장안으로 돌아와 소복을 입고 곡을 그치지 않았는데 7일이 지나서야 성으로 돌아왔으나 그 때부터 병을 얻어 눕게 되었다. 이구와 곽묵의 남은 장수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지거나 동진으로 가서 항복하였다. 석륵은 회하 이북의 사주, 예주, 서주 및 연주의 모든 당이 후조의 석륵의 영토가 되면서 회하를 경계로 동진과 대치하게 된 셈이다.
일단 회하 이북을 장악한 석륵은 그 다음 단계로 장강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싶었다. 장강의 동진을 공략하는 요충지는 수춘(안휘성 수현)이었다. 석륵은 석총을 수춘 공략에 투입했다. 석총은 부릉(안휘성 전초현) 지역을 노략질하고서 5천명의 주민을 잡아갔다. 건강의 동진 조정은 경악했다. 곧바로 사도 왕도에게 대사마 및 도독중외제군사의 직책을 주어 강녕(강소성 강녕현)을 근거로 석륵의 군대를 막게 하였다. 왕도가 군사를 풀기 이전에 역양 내사 소준이 부하 장수 한황을 파견하여 석총의 군대를 습격하자 석총은 도망갔다.(AD326년11월)
(27) 포판과 낙양에서 유요에게 패한 석호 : 2차 전-후조 전쟁(AD328)
유요를 호뢰관에서 격파한 후조의 중산공 석호는 4만 대군을 이끌고 서쪽으로 진군하여 전조의 영토를 넘보았다. 지관(하남성 제원)에서 출발하여 하동(산서성 하현)을 공격하고 나가서 포판(산서성 영제)까지 나아갔다. 이제 장안까지 거리는 200KM가 안 남았다. 석호의 군대가 황하를 건너면 모든 것이 어려워진다고 생각한 유요는 선제적으로 유술을 보내 군대를 먼저 황하를 건너게 하였다. 생각지도 않게 유요가 먼저 선공을 하고 넘어오자 석호는 놀라서 퇴각했다. 유요는 도망가는 석호의 군대를 끝까지 쫓아갔다. 이미 3년 전 뺏긴 낙양부근까지 쫓아간 유요는 낙양을 포위함과 동시에 군대를 사방으로 풀어서 지금의 정주시 부근인 심양, 형양, 급현을 공략하도록 했다. 유요는 3년 전 잃어버린 국토를 다 회복했다. (AD328)
(28) 석호의 복수와 3차 전-후조 전쟁 승리(AD328년 11월)
점령했던 낙양을 다시 유요에게 뺏긴 석륵은 낙양을 다시 탈환할 생각이었다. 정하가 반대하고 나섰다.
“ 유요가 군사를 천리 가까이 벌여 놓았으니
가만 두어도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대왕은 가만히 계시기만 하면 됩니다.
움직이시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석륵은 정하를 크게 꾸짖었다. 그리고 패장 서광에게 물었다.
“ 유요는 분명히 지금 승리에 도취되어 있다.
모두들 그가 승세를 타니 예봉을 피하자고 하는데
갑옷 정병 10만을 가지고 포위하고서도
100일이 지나도록 함락을 시키지 못하는 것을 보면
그 군사는 늘고 게으른 것이 분명하다.
내가 정예병을 가지고 공략하면 한 번에 격퇴가 가능하다.
지금 낙양을 지키지 못하면 반드시 양국(후조의 수도)이 위태로워 질 것이고
황하 북쪽에서부터 자리를 밀 듯 밀려 내려오면
내 할 일은 구름처럼 사라지고 말 것이다.
정하는 공격을 반대하고 있는데 네 생각은 어떠냐? “
서광이 웅크리며 말했다.
“ 유요가 더 이상 나아가지 않는 것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지금의 기회를 놓칠 수는 없습니다.”
석륵이 서광을 칭찬하며 말했다.
“ 자네의 말이 옳다.”
석륵은 전쟁에 반대하는 자들의 목을 즉각 베어 버리고 군대를 규합했다. 석감, 석총, 도표 등의군사를 모두 형양 부근에 모았다. 중산공 석호에게 석문을 지키라고 하고 석륵 본인은 4만 군사를 이끌고 유요가 점령하고 있는 낙양 금용성으로 진격했다. 그러면서 부하 장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 만약 유요가 성고관에 많은 군사를 집결시켜 놓았으면 우리로는 하책이고,
낙수를 막고 있으면 중책이며,
낙양을 지키고 있으면 상책이다. 들어가서 사로잡으면 끝이다.“
석륵의 후조군사가 성고관에 집결했다. 보병 6만에 기병 2만 7천의 대군이었다. 유요는 낙수에 집결해 있었다. 유요의 군대는 10만 이었다. 석륵은 웃음을 띠며 축하할 만 하다고 중얼거리며 큰 저항 없이 낙양으로 입성했다. 이렇게 해서 낙양성은 쉽게 탈환되었다. 석륵의 군사와 유요의 군사는 낙수를 가운데 두고 대치했다. 이 때 유요는 술에 취해 있었다. 젊어서도 술을 좋아 했지만 말년에 가서는 더욱 심해졌다. 전쟁을 앞두고도 몇 말씩 술을 들었다. 말에 올라타고도 술에 취해 고개를 숙이기 일쑤가 되자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말을 아예 조랑말로 바꾸어 버렸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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