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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상상 그 이상이다.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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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7년08월07일 18시1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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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근
  • 서강대학교 경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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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중국을 다녀온 후 한동안 놀란 가슴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중국의 오지인 하서지역(황하의 서쪽인 깐수성과 칭하이성 지역)을 방문하기 전만 해도 ‘우리나라의 70년대 모습이겠지’라고 생각했었다. 인천공항에서 만난 대학후배가 중국의 발전상을 전할 때만 해도 믿지 않았다. 엔터테인먼트 일을 하는 그가 “1998년부터 시작된 우리나라의 멀티플렉스 영화관의 수는 3천9백여개의 상영관이 있는데, 2008년 베이징 올림픽 후에 개설된 중국의 상영관 수는 이미 4만7천개를 넘어섰다고 했다”라고 말했을 때, 중국의 발전 속도에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중국에 도착하자마자 필자의 생각은 어리석은 편견에 불과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중국에서의 경험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상하이(上海) 푸동공항에서 환승을 통해 새벽 1시경에 칭하이(靑海)의 성도인 시닝(西寧)공항에 도착했다. 조그마한 호텔에 잠시 눈을 부치고 바로 칭하이호(靑海湖)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시닝을 빠져나오면서 새롭게 건설된 고속도로의 주변 경관은 산림녹화로 인해 필자가 상상했던 황무지 칭하이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해발 3,840미터의 칭하이 고원지역에 건설된 고속도로를 이용하여 중국 최대 담수호인 칭하이호 주변의 유채꽃과 치롄(祁連)산맥의 만년설을 만끽하였다. 버스로 이동하는 내내 한국에서 가져온 와이파이 에그를 사용하여 중국무선통신망을 통해 아들에게 이 경이로운 광경을 사진으로 전송하였다. 100Km에 이르는 칭하이호를 지나, 차카(茶卡)고개 넘어 차카진(茶卡镇)염호를 거쳐 400km를 이동한 끝에 우란(烏蘭)이라는 현도(縣都)에서 이틀째 밤을 보내었다.

 

다음 날 서역으로의 관문인 깐수(甘肅)성 양관(陽館)을 가기 위해 아침 8시 반, 다시 버스에 몸을 실었다. 12시간의 긴 여행의 중간 목적지인 따차이단(大柴旦)을 향했다. 가는 길목에서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 정책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고속도로와 철도망, 유·무선통신망, 전선망과 같은 인프라가 치롄산맥과 바옌카라(巴顔喀拉)산맥의 협곡 사이에 파노라마처럼 건설되어 있었다. 만연설산의 빙하수를 이용해 구기자 농사를 짓고 있었다. 여기 저기 비닐 하우스도 눈에 띄었다. 불모지라 생각했던 중국의 오지가 점차 생산기지로 변해가고 있었다. 

 

점심을 위해 따차이단의 작은 식당에 들렀다. 서빙하는 학생은 영어를 곧잘 하여 의사소통에 지장이 없었고, 모든 식당에는 무료 와이파이가 설치되어 SNS로 한국의 조교와 보이스톡도 하였다. 그리고 자극적이지 않은 음식, 달콤한 현지 과일은 긴 여정의 피로감을 씻어 주기에 충분했다. 따차이단에서 깐수성 양관까지는 충격 그 자제였다. 고속도로 옆으로는 화력발전소, 풍력단지과 태양광단지의 규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회적 인프라가 고속도로를 따라 끝없어 펼쳐진 이 모습은 실제로 보기 전까지는 상상조차 하지 되지 않았다. 그것도 중국의 최고 오지라 할 수 있는 칭하이성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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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롄산맥을 넘어 깐수성으로 넘어 왔다. 풍경은 초원에서 사막으로 일순 바뀌었다. 경계를 넘어서니 검문소에서 운전자들에게 충분한 휴식을 취했는지를 확인 후 규정된 시간보다 빨리 도착한 운전기사에게 30분 강제휴식 시간을 갖게 하였다. 중국이라는 나라가 이제는 인치(人治)가 아니라 법치(法治) 시스템으로 작동되고 있다고 느꼈다. 이후 사방이 확 트인 사막을 얼마나 달렸을까 사막에 석양이 드리워질 때, 양관 초입의 조그마한 산장에 도착하였다. 양관에는 오아시스가 있어 깐수성에 입성한 후 처음으로 포도와 대추나무를 보았다. 컵라면으로 저녁을 때우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 양관을 둘러보고 또 다른 세관인 옥문관을 방문하였다. 옥문관 입구 매표소에서 사막의 열풍을 맛보게 되었다. 40도가 넘는 모래바람은 옛 실크로드 상인들로 하여금 휴식처를 찾게끔 했을 것이라 짐작케 했다. 옥문관 방문 후 더위에 지친 필자도 돈황의 숙소로 향했다. 호텔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저녁을 위해 야시장의 노점식당으로 행했다. 야시장은 서울의 어느 재래식 시장과 다를 바 없었다. 깨끗하고 현대화되어 있었다. 식사 후 야시장에서 이런 저런 토산품을 구경하고 흥정도 하였다. 그리고는 숙소로 돌아와 밀린 빨래를 하고 지금까지의 일정을 되짚어 보았다. 

 

황하의 동쪽인 북경이나 서쪽인 칭하이와 깐수의 생활환경이 별반 다르지 않았다. 비록 하서지역이 중국의 변방이지만 일관된 일대일로 정책으로 발전된 모습에 소스라치지 않을 수 없었다.<ifs 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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