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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정치리더십-외천본민(畏天本民) <75> 진정으로 행복한 나라 III. 노인을 공경하고 봉양하라.<下>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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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3년06월09일 17시10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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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III.4  초고령자에 대한 특별배려


[초고령자 혜택]

 

양로연에는 80세 이상의 노인들이 매년 남여 수백 명이 참석했다. 그 중에는 90세 이상의 장수를 누리는 노인들도 많았고 더러 100세를 넘긴 사람도 보였다. 세종은 이들 초고령자는 ‘하늘의 축복과 가호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누구보다 먼저 이들을 돌봐야한다고 믿었다. 종전에는 7,80세 노인에 대한 구휼 조건만 명시되어 있었는데 판중추원사 허조가 103세 노인에게는 특별한 대우가 필요하지 않겠느냐고 하는 제안을 듣고 세종은 다음과 같은  조치를 내렸다. 

      

    “백세 노인은 세상에 드문 일이니 당연히 무엇보다 먼저 보살펴야

     할 것이다. 먼저 구휼 조건을 이미 내려 보냈으나 양육함이 미진하니

     지금부터 매년 쌀 10석을 지급하고 달마다 술과 고기를 보내며 

     매 계절 끝 달에 그 숫자를 보고하도록 하라.          

     (百世老人 世所罕有 義先矜恤 其完恤之條 曾有敎旨 然惠養未盡 

     自今歲給米十石 月致酒肉 每季月開數啓聞 : 세종 17년 1월 22일)”

 

강원도 감사가 경비가 부족하므로 103세 노인에게 매년 주는 급료 쌀 10석을 5석으로 줄이자고 했을 때 세종은 그를 나무라며 말했다.

 

    “백세 노인은 늘 있는 것이 아니므로 당연히 먼저 보살펴야 한다.

     전의 규정에 따라 쌀 열 석을 지급하도록 하라. (百世老人 世不常有 

     義當優恤 依前數給十石 : 세종 18년 7월 27일)”

 

세종은 초고령자의 숫자를 조사하게 하였다. 90세가 넘는 노령인구는 경기도와 개성유후사와 충청도 평안도를 제외한 전국에서 614명이 보고되었다. 그 중 백세 이상은 열 명으로 남성이 3명 여성이 7명 이었다. 백세 이상 노인에 대한 봉양 지시가 잘 지켜지고 있는지 세종은 항상 궁금했다. 관리들의 속성을 보면 제대로 잘 안 지킬 가능성이 컸다. 세종은 따로 지시를 내렸다.

 

   “선덕 10년(세종 17년,1435)에 백세 노인에게 쌀 10석을 주고 또 

    수령과 감사는 매월 술과 고기를 주라고 했는데 그 법이 잘 준수되고  

    있는지 자세히 살펴서 보고하도록 하라. (宣德十年敎百歲老人 歲給米十  

    石 又令監司連給酒肉 此法遵行與否 備考以啓 : 세종 30년 11월 28일)” 

 

특히 나이가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일일이 거명하며 그들이 지시한 법대로 혜택을 받고 있는지 조사하여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세종이 의심한 바대로 이들 백세 이상 노인에 대해 혜택이 제대로 지급되지 않고 있었다. 다시 한 번 세종은 교지를 내려 지방 수령들에게 당부했다.

 

   “백세 노인은 세상에 드문 것이라 당연히 보살펴야 한다. 매년 쌀 10석  

    과 드리고 매월 술과 고기를 감사수령에게 주라는 법이 있어도 관리가

    법을 잘 준행하지 않는다. 금후로부터는 만 백세로 기록된 자는 물론

    내년에 만 백세가 되는 자를 먼저 기록에 올려 오는 봄에 같이 쌀을 

    주어 혜양하도록 하라. (百歲老人 世所罕有 所當矜恤 歲給米十石 又令監  

    司連給酒肉 己曾立法 而官吏多不遵行 今後於歲抄己滿百歲者 及 翌年滿  

    百歲者預先抄錄 至春依例給米惠養 : 세종 31년 3월 26일)”

 

[노인직 제수]

 

노인을 더 효과적으로 우대하는 조치가 없을까 궁리하던 세종은 이즈음 아주 색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즉, 노인들에게 음식이나 옷이 아닌 직책을 주자는 아이디어가 머리에 떠올랐다. 의정 대신이나 예조가 아니고 순수한 세종의 발상이었다. 이 당시 세종 17,18년은 매우 가뭄이 심한 해였다. 그리고 가뭄의 책임은 자신의 부도덕과 정치무능 때문이라고 세종은 내심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의 무능 때문에 가뭄피해를 보고 있는데 다른 한편에서는 하늘의 축복을 받아 장수하는 노인들이 여럿 존재하고 있었다. 세종은 이들을 정치의 장으로 끌어 들임으로 자신의 결함을 보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얼마 전 90세 이상 노인의 숫자를 조사케 한 것도 사실은 그런 목적이 숨어있었다. 세종은 예조에 다음과 같은 교지를 내렸다 ;

 

   “구십 세 이상의 남자는 모두 자급을 제수하라. 매품의 정이냐 종이냐,

    전직이냐 현직이냐 높으냐 낮으냐를 따지지 말라.  

    (九十以上 男子 除授資級 不計每品正從散官高下: 세종 17년 6월 22일)”

구십 세 이상의 모든 남자에게 자급을 제수한다는 것이다. 원래 9품인 자는 8품으로 올리고 8품인 자는 7품, 7품인 자는 6품 등의 방식으로 올려 제수하였다. 다만 4품 이상의 경우에는 정종을 따져 정4품은 종3품으로 올렸고 종3품은 정3품으로 올렸다. 이 경우 올라갈 수 있는 최고 자급은 통정(정 3품 상계)이 끝이었다. 이렇게 자급이 올라간 자의 부인도 관료부인의 예와  똑같은 대접을 적용했다. 이렇게 해서 관직을 제수한 90세 이상 노인의 수는 남녀 합해서 566명이었다. 세종 21년에도 90세 이상 노인 100여명에게 산직을 제수하였다(세종 21년 5월 21일).이 때에는 나이를 속여 제수 받은 자가 매우 많았다고 기록되어있다. 4년이 지난 세종 25년에도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 관직을 높여 제수하라는 명령을 내려 120여명이 노인직에 제수되었다.

 

   “경로의 예는 반드시 때에 맞추어 거행해야 하는 것이다.

    (敬老之禮 不可不以時擧行也 : 세종 25년 5월 17일)”   

 

세종이 영구화 시켰던 양로연을 4년 만인 세종 25년 7월에 가뭄으로 또다시 중지하게 되자 양로연을 열지 않는 대신 노인들에게 관직을 주기로 한 것이다. 보다 더 많은 관직을 수여하기 위해 자격요건을 90세 이상에서 80세 이상으로 연령을 낮추었다. 이번에는 노인 2백여 명에게 관직을 수여했고(세종 26년 7월 29일) 한 달 뒤에도 1백여 명에게 산관직을 주었다(세종 26년 윤7월 8일). 그리고 90세가 아니라 80세 이상에게 작품(爵品)을 주는 것을 항식으로 삼았다(세종 29년 9월 6일).

 

III.5 백성들의 뜨거운 칭송

 

나이 많은 노인에 대한 극진한 물질적 대접과 관직 제수를 알게 된 백성들은 세종에 대해 절대적인 칭송을 보냈다. 직접 대접을 받은 노인이 감격의 눈물을 흘렸음은 물론이고 혜택을 받지 못했어도 세종의 감동적인 경로정치를 곁에서 지켜본 모든 백성들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을 억제할 수 없었다. 개풍에 있는 할머니 신의왕후의 제릉에 참배하고 돌아오던 도중에 개성(송도)에 이르렀을 때 수많은 인파가 연도에 몰렸다. 어른 아이 노인 모두 늘어서서 지나가는 세종을 칭송하며 시를 지어 올렸다. 그 시가 이렇다 ;

 

   “힘쓰시고 힘쓰시는 우리 왕 그 덕이 극명하시고 

    또 그 덕이 극명하시니 물려받은 업을 밝히시네. 

    순서를 잊지 않으시고 효도만을 생각하시니

    춘추로 게으르지 않으시고 제사를 잊지 않으시네. 

    흰 이슬 서리되니 햇볕이 기우는 철이 되었네. 오셔서 조모께 제사를 

    드리니 제사가 아름다워 향을 맡으시리. 

    효로 제사를 드리니 축복이 내리고 

    사모(새의 종류)가 날듯하고 팔난이 창창하네. 

    깃발을 보니 용이 빛이 나네. 

    나를 도우시고 먹이시니 진실로 왕이시고 오직 왕비시네. 

    은혜로운 임금이시라 백성의 부모시라. 

    늙은 사람 어린 사람 모두 편안히 살아가니 

    먹고 마시는 것 극진한 은혜가 아닐 수 없네. 

    하늘이 도우시어 만수를 누리시고 거듭 거듭 무강하시어 

    자손이 천억이 넘으시라. 

    이 나라에 태어났으니 그 낙이 어떠할까. 

    모든 사람이 머리 숙이며 이 노래를 짓나이다.       

    (勉勉我王 克明其德 其德克明 昭哉嗣服 繼序不忘 孝思維則 春秋匪懈 

    享祀不忒 白露爲霜 歲亦陽止 來方禋祀 烝畀祖妃 籩豆靜嘉 有餤其香 

    以孝以享 降福穰穰 四牡翼翼 八鸞蒼蒼 言觀其旗 爲龍爲光 拊我畜我 

    允王維后 維此惠君 民之父母 黃髮兒齒 燕燕居息 日用飮食 莫非爾極 

    天其佑之 萬壽攸作 申錫無疆 子孫千億 生此王國 其樂如何 大小稽首 

    是用作歌 : 세종 20년 10월 12일)”   

 

세종이 베푼 양로연에 참석한 영돈녕부사 권홍은 솟아오르는 감격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권홍은 태종의 의빈 권씨의 아버지였고 재종조모는 원나라 황태자비였다. 권홍은 세종을 주나라 문왕(西伯)을 비유하여 칭송하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올렸다 ; 

 

    “풍운같은 신하들이 경회루에 모인 것이 하청에 응하는 듯하고

     천년 동국에 성명한 임금을 만났으니 덕이 천하와 짝하여 백성을 

     두텁게 양육하시는구나. 은혜는 산악과 같고 노인과 영재를 중하게

     여기시니 가을 모습이 황봉주에 넘실거리는 도다. 국화 빛깔 백발에

     휘황찬란하네. 봉관과 곤현과 선악이 움직이니 소리소리 모든 것이

     승평의 치세로다.       

     (風雲慶會應河淸 千載東韓遇聖明 德配乾坤敦子育 

     恩同山岳重耆英 秋容澰灩黃封酒 菊艶輝煌白髮莖 

     鳳管鯤鉉仙樂動 聲聲皆是賀昇平 : 세종 22년 9월 6일)”

 

여기서 하청이란 황하가 맑아진다는 뜻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일,즉 상상도 못할 성군이 나타나 온 신하가 경회루에 모였음을 의미한다. 세종은 권홍의 이런 치사를 몹시 고마워했다.

 

   “내가 그대의 아름다운 뜻을 이미 알고 있소.

    (予己知美意 : 세종 22년 9월 6일)”  

 

권홍은 이 말을 듣고는 갓을 벗고 여러 번 머리를 땅에 대고 절을 올렸다.

세종은 조용히 권하여 자리에 가도록 한 다음 도승지 성염조에게 명하였다.

 

   “술잔 수가 너무 적으니 두루 다니며 술을 권하라. 

    (酌數旣少 宜令遍行勸酒 : 세종 22년 9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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