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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 : #8E 37년 만에 망한 수(隋)나라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7년11월02일 16시24분
  • 최종수정 2017년11월02일 16시24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32

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

 

 

(25) 남조의 마지막 왕조 남량과 진(陳)의 몰락(AD589)

 

당시 장강 이남에는 AD557년 진패선이 소연의 양을 멸망시키고 건국한 건강의 진나라와 양의 후손 소찰이 강릉에 세운 망명정부 남량(南梁 혹은 서량)이 버티고 있었다. AD587년 경 남량에는 소종이 황위를 지키고 있었으나 국세로 보아 도저히 수나라에 대항할 수는 없었다. 양견은 소종을 장안으로 볼렀다(8월). 소종은 신하 200여명을 이끌고 장안으로 갔다. 양견은 최홍도를 강릉으로 보내 수비를 시켰다. 강릉에 있던 남량의 신하들과 10여만 주민들은 모두 진나라로 도망가고 말았다. 화가 난 양견은 아예 양나라를 없애기로 마음먹었다.고경을 강릉으로 보내 주민들을 다스리게 하였다.(AD587년 8월)

 

양견은 집권하면서부터 진나라에 대해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었다. 북쪽을 집중적으로 경략하기 위해서는 뒷문인 진나라를 막아둘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북쪽이 거의 통일된 판국에 남은 것은 진을 흡수하는 일이었다. 양견은 고경에게 진나라를 차지할 계책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고경의 계책은 한 마디로 속이자는 것이었다. 공격하는 척하다가 말기를 거듭하면 진나라 군사들은 처음에는 방비를 철저히 하다가도 계속하여 공격과 퇴각을 반복하면 점차 진나라 방비가 느슨해 질것이니 그 때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자는 것이었다. 양견의 수나라가 계속해서 고경의 전략을 수행하자 점차 진나라 군사들은 방비에 둔해지기 시작했다. 진주(晉州)자사 황보속은 진나라가 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 세 가지를 올렸다. 큰 수나라가 작은 진나라를 치는 것, 도리를 지키는 수나라가 도리를 저버린 진나라를 치는 것, 그리고 배반한 소암을 받아들이면서 겉으로 우리에게 우호적인 척한 것이 그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군사를 주시면 진나라 멸망은 ‘머리털을 뽑는 것만큼 쉬운 일(絲發之效)’라고 강조했다. 

 

AD588년 3월 양견은 진나라 주군 진숙보의 20가지 죄악을 종이에 찍어 강남 전역에 뿌렸다. 말하자면 대대적인 전투를 하기 전에 민심여론을 흔들어 놓자는 전략이었다. 그리고 그 해 11월 총사령관 양광을 앞세워 51만의 대군을 몰아 다섯 개 경로로 남침했다. 수나라 군사의 총원수는 좌복야 고경, 사마는 우복야 왕소였다. 중군은 양광의 주도하에 강소성 육합에서 바로 건강으로 남하했다. 동군의 하약필은 장강을 거슬러 공격해 들어왔고 서군의 양준은 왕세적과 함께 기춘에서 출발해 내려왔다. 고경은 설도형에게 전쟁의 승부를 점치도록 했다. 설도형의 대답은 간단했다.

 

“ 아군은 도를 지키는 대군이요(我有道而大)

  적군은 덕이 없으니 소군입니다.(彼無德而小)“   

 

진나라 조정은 지리멸렬이었다. 진숙보 주변은 그 유명한 미인 장려화를 중심으로 수 없는 미녀들로 쌓여있고 궁정은 여자들과 환관들이 날뛰었으며 정치는 무능하기 짝이 없는 공비의 수양 오빠 공범이 전횡을 하고 있었다. 진나라 장군들도 수나라 대군의 공격에 질린 나머지 제대로 대항 전략을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주군 진숙보는 북제가 세 번이나 쳐들어 왔다가 물러간 일과 북주가 두 번 공격했다가 실패한 과거 일을 들먹이며 자만하고 있었다. 공범은 양자강만 믿고 있었다.

 

“ 장강은 하늘이 내려 준 해자요.

  오랑캐들이 어찌 날아서 건널 수가 있겠소.

  변방장수들이 너무 겁을 먹고 우왕좌왕하는데

  걱정할 것 하나도 없소.“

 

진숙보에게는 이보다도 더 위안되는 말이 따로 없었다. 잔치를 열고 여인들과 놀면서 시를 짓고 유흥을 더해갔다.  

 

AD589년 정월 초하루 하약필의 동군은 광릉에서 군대를 이끌고 강을 거슬러 올라왔다. 하약필의 전략 또한 적을 기망하기 위해 오래 전부터 치밀하게 계획을 세웠다. 허약한 말과 낡은 배를 선봉에 세워 군대가 허약한 것처럼 보이게 했다. 수시로 소리를 지르고 교대훈련을 하는 것처럼 하여 군대가 움직이는 것이 마치 늘 하는 군사훈련처럼 보이게 속였다. 정월 초하루 군사가 진짜로 움직였지만 진나라는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다. 게다가 정월 초하루에 공격을 해 올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하약필의 부장 한금호는 500기병을 이끌고 야밤에 장강을 건너 몰래 남으로 들어왔다. 진나라 조정에서는 정월 2일 수나라 군대의 침입에 대한 대책회의를 열었다. 승려와 비구니까지 동원해서 막는 수밖에 없었다. 표기장군 소마가와 호군장군 번의와 중령군 노광달이 나란히 도독이 되어 수비군을 지휘했다. 그러나 1월 6일 수나라 하약필이 경구(진강)을 점령했고 1월 7일 건강의 동쪽 종산을 함락시켰다. 수도 건강이 코앞에 있었다. 당시 건강 군사는 약 10만 이었지만 주군 진숙보는 울기만할 뿐 무능한 대감군 시문경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시문경은 장수들이 공을 세우는 것을 시기하여 전투에 대한 건의를 올리는 족족 거절해 버렸다. 한 판 싸워보자는 소마가의 건의도 묵살했고 지구전으로 끌자는 임충의 건의도 듣지 않았다. 도대체 무얼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이 없었다. 진의 주군은 소마가의 처를 능욕하였으므로 소마가도 전쟁할 생각이 애초에 없었다. 하약필의 공격에 쉽게 잡히고 말았다. 노광달이 진력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결국 항복했다. 임충도 항복했다. 진나라 군사들은 다투어 도망가느라 무너졌다. 진숙보도 우물에 뛰어 들어 숨었지만 돌을 던지겠다는 말에 겁을 먹고 우물에서 기어 나왔다. 진숙보는 장려화, 공귀빈과 함께 장안으로 압송되었다.

 

 

(26) 양견의 280년 만의 중국 재통일(AD589)

 

고경이 양광보다 먼저 건강으로 입성했다. 양광은 고경의 아들 고덕홍을 보내 장려화를 남겨두도록 시켰다. 고경이 말했다.

 

“ 옛날 주나라 태공(무왕)은 얼굴을 가리고

  은나라 주왕의 애첩 달기의 목을 베었습니다.   

  지금 어찌 장려화를 살려 두겠습니까?“

 

청계 강가에서 목을 베었다. 양광이 이를 깨물며 말했다.

 

“ 옛 사람이 말하기를 덕을 베풀면 보답이 없을 수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내 필연코 고공에게 복수하고야 말 것이다.“ 

 

양광의 머릿속에 고경에 대한 원망이 이때부터 쌓이기 시작했다. 양광은 하약필에게도 불만이 많았다. 자신이 중군 총사령관임에도 불구하고 진숙보의 항복문서를 자기 하약필에게 쓰도록 했었다. 물론 그렇게 되지 않았으나 공을 가로채려는 하약필의 행동에 분개한 것이다. 전쟁기한을 어기고 미리 전투를 벌였다는 죄목으로 하약필을 잡아 장안으로 압송했다. 양견은 역마를 보내 하약필을 우대하면서 조서를 내려 이렇게 말했다.

 

“ 강표(즉 강남)를 평정한 것은 하약필과 한금호의 공이다.”

  

비단 만 필을 내려 공을 치하하였다. 그러나 나중에 양광이 황제가 된 뒤에 소외된 처지에불만을 품던 하약필은 양광에게 처형되고 만다. 양견은 진숙보에게 윽박질러 진나라의 지방장관들에게 항복 명령을 내리도록 했다. 대부분 진나라 지방관들은 수나라에 항복해 왔다. 진나라 소속 주 30개와 군 100개와 현 400개를 수나라가 차지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AD301 전량의 분리 독립 이후 남북조로 분리되었던 중국이 280여 년 만에 최초로 통일되었다.  

 

 

(27) 수나라 개국 공신들의 연 이은 축출

 

 

(옛 친구 왕의와 원해 제거)

 

대사도 왕의와 원해는 모두 양견과 막역한 치구 사이였다. 왕의의 아들은 양견의 딸 난릉공주와 결혼했으니 사돈지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양견이 수나라를 건국(AD581)하고나서 아무래도 옛 친구들과 사이는 멀어졌다. 왕의도 그게 섭섭하기는 했다. 그러던 참에 어떤 사람이 접근하여 얼굴모습이 왕의 기운이 서려 있고 또 자신의 도참과도 맞아 떨어진다고 꼬드겼다. 왕의가 솔깃해하는 것은 당연했다. 문제는 그 사실이 양견의 귀에 들어갔다는 점이다. 양견은 친한 친구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왕의를 죽였었다.(AD585년 3월)

 

낙안공 원해도 원래 양견과 왕의하고도 친분이 깊었다. 다만 성격이 까칠해서 주변 사람을 자주 꾸짖었기 때문에 다들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양견도 죽은 왕의와 가까운 사이라서 멀리하려고 했었다. 어떤 사람이 양견에게 원해가 평소 불만을 품어서 원방(원해의 사촌), 전란, 기서 등과 함께 반란을 꾀한다고 보고가 올라왔다. 양견은 비밀리에 조사를 명했다. 수사관의 말은 원해가 원방에게 “내가 주인이고 저 전각 위에 있는 인간(양견)은 도둑놈일 뿐이다”는 진술을 얻어냈다. 원방도 “저 하늘의 흘러가는 구름은 쭈그린 개나 달아나는 사슴 같을 뿐이니 우리 복덕보다 못합니다.”라고 말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양견은 크게 화를 내고 네 명을 죽였다.(AD589년 3월)

 

 

(양웅의 실각)

 

양견에게는 네 명의 특별한 공신이 있어서 이를 네 명의 귀인(四貴)라고 불렀다. 고경, 소위, 우경칙, 그리고 양웅이 그 사람이다. 좌위대장군 광평왕 양웅은 귀하고 총애를 많이 받아서 주변에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양견은 군대를 통솔하는 그에 대해 인기가 높은 것을 싫어하고 꺼렸다. AD589년 8월 1일 그를 사공으로 옮기고 군권은 다른 사람에게 넘기도록 조치했다. 직책은 높았으나 명분만 있을 뿐 아무런 실권이 없는 자리로 돌린 것이다. 양웅이 그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문을 닫아걸고 빈객의 왕래를 완전히 끊어버렸다.  

 

(하약필 실각)

 

누구보다도 이번 진나라 정벌에 수훈을 세운 것은 하약필이었다. 양견은 장안으로 돌아 온 하약필을 어좌에 오르도록 하고 비단 8천 필을 또 내림과 동시에 상주국이라는 작위를 송공으로 올려주었다. 이 외에도 갖가지 금은보화를 덧붙여 하사한 뒤 진숙보 누이를 첩으로 내리기까지 했다. 

   

모자라는 하약필은 황제 앞에서 한금호와 전공을 가지고 다투었다. 자신은 실제로 칼을 휘드르며 적군과 교전을 했으나 한금호는 교전을 하지 않았으니 공이 작다는 것이었다. 한금호는 같이 공격하기로 하고서는 기일에 앞서 전쟁을 펼치는 바람에 더 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고 또 자신은 500기병으로 야밤습격을 감행하여 전격적으로 진숙보를 잡았으니 공이 더 뛰어나다는 주장이었다. 양견은 두 사람을 모두 칭찬하면서 한금호에게도 비단 8천 필과 상주국 작위를 내렸다. 고경에게도 상주국과 비단 9천 필을 내리고 제공으로 삼았다. (AD589)

하약필은 재상을 원했으나 얻지 못하자 여기저기 불평을 늘어놓고 다녔다. 양견이 그를 불러 이렇게 물었다.

 

“너는 여기저기 다니면서 고경과 양소가 밥을 축낸다고 떠들고 다닌다던데     

 무슨 뜻이냐?“

 

하약필이 이렇게 대꾸했다.

 

“ 고경은 저의 옛 친구이면서 경쟁자입니다.

  양소는 제 처남이라 잘 알아서 격의 없이 한 말입니다.“ 

 

공경들은 하약필의 언사가 매우 불공하여 죽음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양견은 이렇게 말했다.

 

“ 신하들은 법을 지키는 것일 뿐이라 어쩔 수가 없소.

  허니 공은 스스로 활로를 찾아보시오.“

 

하약필은 군사 8천 군사로 진숙보를 잡은 공을 자꾸 내세웠다. 양견은 이미 줄 만큼 상을 주었다고 답했다. 하약필이 이렇게 간청했다.

 

“ 신이 격에 넘치는 상을 받았습니다만 

  이제 격에 넘치는 활로(즉 살기)를 찾기를 원합니다.“

 

양견은 하약필을 하옥시킨 뒤 며칠을 고민하다가 제명하고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조정에 연회가 있을 때마다 불러 즐거움을 같이 하여 옛정을 유지하였다.(AD592년 12월)

 

(이덕림 퇴출)

 

이덕림은 자신의 재능과 언변을 믿고서 논쟁을 하여 이기기를 좋아하였으므로 주변에 실허어하는 사람이 많았고 좌명공신임에도 불구하고 10여년 승진을 못하였다. 특히 상서우복야소위와 다투기를 심하게 하였다. 아마도 내심 자신보다 능력이 모자라는 사람이 높은 자리에 있음을 견디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고경은 소위 편에 서서 이덕림이 사납고 광포하며 악랄하다고 양견에게 상주하였다. 양견도 소위와 고경 편을 들었다. 마침 어떤 사람이 자신의 땅을 빼앗은 사람을 소송했다. 소위는 이 틈을 타 그것이 이덕림의 소행이라고 무고했다.사농경 이원통도 소위에 편에 서서 이덕림을 몰아세웠다. 양견은 더욱 이덕림을 멀리하게 되었다. 우경칙이 양견의 명을 받아 전국을 시찰하고 돌아와 심각한 지방토호들의 부정부패가 문제라고 보고했다. 양견은 지방토호들의 행정 간섭을 모두 금지하라고 명령했다. 이덕림이 끼어들며 말했다.

  

“내가 전에 지적하지 않았습니까.

 토호들이 행정을 하면 반드시 부패한다고 말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하기로 해 놓고 이렇게 급히 뒤집으시면 조삼모사가 아니고 뭡니까.

 행정제도를 바꾸자고 하는 사람들은 굽법으로 다스려야 합니다.“

 

양견이 마침내 분통을 터뜨렸다.

 

“ 너는 나를 폭군 왕망으로 만들 참이냐? ”

 

터져 나오는 화를 참지 못한 양견은 이덕림을 호주자사라는 지방관으로 내쫓았다. 이덕림은 지방으로 나가기가 싫어서 어쨓든 조정에 참여하기를 바랐으나 양견은 거절하고 옮겨서 회주(하남 심양)자사를 내렸다. 이덕림은 곧 61세로 죽었다(AD590년 2월) 이원통도 동료 진무의 헐뜯음과 견제를 받아 지방으로 쫓겨났다.(AD590) 

 

(소위 실각)

 

AD592년과 AD594년 사이에 수도 없는 공신과 충신들이 수나라 조정에서 쫓겨났다. 국자박사 하타가 상서우복야 소위와 다툼이 누적되었는데 그의 아들 소기와도 다투다가 밀리게 되자 소위를 붕당결성의 죄로 무고했고 그에 따라 소위는 작위와 관작을 잃고 100여 명의 다른 유사들과 함께 집으로 쫓겨났다.(AD592년 7월) 소위는 금방 복위되기는 했다. 

 

(노분 퇴출) 

 

노분은 천원황제 AD578년 우문옹이 죽었을 때 황실 군대를 움직이지 못하게 막고 제압함으로써 양견의 정권장악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공이 있는 사람이다. 고경과 소위가 조정의 핵심이 되었는데 자신은 태자를 보좌하는 좌서자가 되어 불만이 가득찬 노분은 유방,원해 등 불만 세력을 규합하여 반란을 꾀하다가 들켜 폐출된 적도 있었다.(위(16) AD581년3월) 나중에 노분은 다시 제주(산동성 제남시)자사로 복귀되었지만 주민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가난한 자를 구휼하는 일에 소홀하여 죄를 받아 자시 제명되었다. 양견은 다른 주 자사로 임명할 생각이었으나 노분이 불평을 그치지 않자 생각을 거두었다. 황태자 양용이 나서서 노분을 두둔하고 새 직책을 주기를 요청했지만 양견은 이렇게 말했다.

 

“ 유방, 정역, 노분, 유구, 황보적 등이 아니었으면

  나는 여기에 오르지 못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쉽게 배반하고 뒤집는 사람들이다.     

  북주 천원황제 우문옹이 위독할 때 

  조신들은 물론 우문옹의 뜻을 받은 안지의는 

  조왕 우문초를 고명하기를 바랐지만

  이 다섯 명은 속여서 나를 고명하도록 하였다.

  그 후에 내가 정치를 하게 되자 유방 무리들이 

  또다시 음모를 꾸며 큰 반역을 저질렀고 정역은 무고를 만들었다.  

  모두 만족하지 않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직분을 맡겨도 공손하지도 않고 충실하지도 않은 것이다.

  그들이 질책을 받는 것이 이들의 원망 때문이지

  내가 그들을 버린 것은 아니다.“

노분은 폐출되어 나이 54세에 집에서 죽었다.(AD594)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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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 2017년11월02일 16시2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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