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 : #8C 37년 만에 망한 수(隋)나라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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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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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우문빈의 급작스런 죽음과 양견의 정권 장악(AD580)
천원황제 우문빈은 다섯 명의 정부인을 두었다. 본 부인 양려화(천원황태후, 양견의 딸) 외에도 천우황태후(원씨), 천좌황태후(울지씨), 천상황태후(주만월) 및 천중황태후(진씨)가 그 사람이다. 천원황태후 양려화는 온후하고 공평하고 인자하여 다른 천원황태후들이 모두 존경해 마지않았다. 그런 천원황태후를 천원황제가 못마땅하였다. 자신보다 자신의 처가 더 존경받는 것이 거슬린 것이다. 천원은 양려화를 죽일 생각이었다. 양려화의 생모이자 양견의 처인 독고씨가 피가 나도록 바닥에 머리를 조아려 용서를 구한 덕에 겨우 살아날 수 있었다. 비록 독고씨의 간청으로 양려화를 살려두기는 했지만 양견에 대한 천원의 질시는 가시지 않았다. 대놓고 이렇게 떠들고 다녔다.
“ 내 반드시 양견의 일족을 멸망시키고 말리라.”
그리고는 즉시 양견을 소환한 뒤 부하들에게 양견의 얼굴빛이 조금이라도 변하거든 즉시 격살하라고 지시했다. 이미 여러 차례 마음에 조심을 다짐했던 양견은 조금도 얼굴색에 변함이 없이 태연하게 부름에 임했다. 천원황제 우문빈이 죽일 틈을 찾지 못했다. 위험에서 벗어나긴 했어도 양견은 불안하고 또 불쾌했다. 어릴 적 같이 공부한 정역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 변방으로 나갔으면 하니 좀 자리를 살펴봐 주시오.”
정역이 즉시 그렇게 천원황제에게 주청을 올리겠다고 약속했다. 마침 천원황제는 정역을 파견하여 남쪽 진나라를 침공할 참이었다. 정역은 자신이 원수를 한 명 추천하겠다고 말했다. 황제가 누구냐고 하자 양견을 추천했다. 황제가 허락했다. 그러나 양견은 병 때문에 따라가지는 못했다.
천원이 외출 나갔다가 갑자기 몸이 불편하여 궁으로 돌아왔다(AD580년 5월10일). 이미 말조차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천원황제의 가장 가까운 측근 유방은 아들 황제 우문천(8세)이 너무 어리므로 양견과 정역, 유구, 위오 및 황보적이 집단으로 국정을 맡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양견은 사양했다. 유방이 다그쳤다.
“ 만약 양공이 맡지 않는다면 내가 맡고 말겠소.“
마침내 양견이 수용했다. 그리고 직접 우문빈의 병상을 지켰다. 그날 밤에 우문빈은 21세 나이로 죽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비밀에 붙였다. 그리고 정역과 유방은 거짓 조서를 만들어 양견을 총지중외병마사로 임명한다고 발표했다. 병권을 완전 장악한다는 말이다. 우문빈의 또 다른 총신 안지의가 반대했다. 그는 오히려 황실 최고령 우문초가 임시국정 책임에 적임자라고 주장했다. 유방과 양견은 결국 거짓으로 안지의의 서명을 조작한 다음 조서를 발표했다. 지방에 나가 있는 5개 번왕을 급히 장안으로 소집했다. 명분은 천금공주와 돌궐가한의 혼사요청을 의논한다는 명분이었다. 그러나 사실은 반란을 미연에 막자는 속셈이었다. 양견은 사사건건 반대하는 안지의를 죽이려다가 참았다. 그리고는 국상을 발표하고 겉으로 우문찬을 대승상에 봉했다. 이름뿐인 직책이었다. 양견은 가황월, 좌대승상 및 도독중외제군사가 되었다. 군권과 인사권을 모두 틀어쥔 것이다.
(13) 울지형의 양견토벌 실패(AD580)과 양예의 익주평정(AD580)
당시 상주(相州,하북성 업)총관 울지형은 평판이나 군사세력이나 정치영향력에서 무시 못 할 존재였다. 그는 북주 창업자 우문태의 누님의 아들이었고 매우 총명하면서 무공을 높이 세운 사람이었다. 그리고 현재 장악하고 있는 지역도 과거 북제의 수도 업을 중심으로 지금의 하북성 남부와 산동성, 그리고 안휘성 북서부 일대를 장악하고 있었다. 게다가 회수지역이나 강남지역의 많은 군웅들도 울지형에게 심정적으로 동조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양견은 울지형의 아들 울지돈을 보내 우문옹의 장례식 참석명분으로 장안으로 소환했다. 그리고울지형 대신 위효관을 상주총관으로 임명하여 업으로 보냈다. 울지형은 양견이 주나라 조정에 절대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몰래 양견을 제거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참모 하란귀를 보내 업으로 다가오는 위효관을 정탐시켰다. 위효관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업으로 다가갔다. 울지형은 위효관의 조카 위예를 보내 영접했다. 위효관이 위예에게 울지형의 속내를 은근히 물어보자 대답하지 않았다. 위효관이 칼을 커내 죽이려고 하자 그제야 울지형이 조왕 우문초를 받들고 반란의 생각을 가지고 있음을 위효관에게 알려 주었다. 다급한 위효관은 위예와 함께 서쪽으로 도망가면서 도중의 역마에 있는 말들을 모두 거두어 갔다. 쫓아오는 울지형의 군사들을 지체시키기 위한 계략이었다.
양견이 보낸 위효관은 울지형의 군대와 무척(하북성 무척. 정주 서북쪽 외곽)에서 최초로 전투를 벌였다. 회군하던 위효관의 군대가 무척을 포위한 것이다. 울지형은 아들 울지돈에게 10만 지원군을 파견해 무척 부근에 진지를 구축하고 대치했다. 위효관의 장사 이순이 비밀리에 양견에게 편지를 보내 위효관 장수들이 울지형의 뇌물을 받은 것 같다고 말했다. 무척을 공격하지 않고 포위한 것을 두고 지레짐작한 보고였다. 양견은 걱정이 앞섰다. 내부에 적군과 내통하는 장군이 있으면 이기기 어려운 것은 분명했다.
양견은 의심스런 위효관의 부장 양사언, 우문흔 및 최홍도 세 사람을 교체할 장수를 정역과 함께 물색하였다. 이 때 이덕림이 말리며 나섰다.
“ 이쪽이든 저쪽이든 확신이 서 있지 않은 상태에서
제장들이 충성을 받치지 않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장수를 바꾸기 보다는 위엄과 신뢰를 가지고 대해야 합니다.
뇌물이라고 하지만 근거도 없는 것이고
저쪽에서 흘리는 말이 아니라는 보장도 없지 않습니까?
지금 공께서 하셔야 할 일은 가장 신뢰할 만한 사람을 보내어
군영을 지휘감독하게 하면서 명분과 신뢰를 보내야 합니다.“
양견은 크게 깨달았다. 최중방을 위효관의 군영으로 보내려 했으나 사양했고 정역도 모친의 위중함으로 들어 거절했다. 결국 자원한 승상부 고경을 보냈다. 이후 모든 전략은 오로지 이덕림과 함께 수립했다. 양견의 밀지를 품고 군영에 도착한 고경은 울지돈의 13만 대군과 울지돈 호위기병 1만, 그리고 동생 울지근의 군사 5만 등 거의 20만에 가까운 황룡병 대군과 맞붙어 싸워 크게 이겼다. 이번 패전으로 갈 곳을 잃은 울지형은 자결했고 울지형의 동생, 아들 모두 체포되었다. 울지형의 결정적 패인은 무능하고 오만한 그의 참모 최달나에게 모든 전략을 맡겼다는 사실이었다.
양견의 동쪽 위협 울지형의 상주가 평정되었지만 서쪽에는 왕겸이라는 익주자사가 여전히 양견에게 충성을 바치지 않으며 웅거하고 있었다. 마침 울지형이 제압되었으므로 양견은 20만 대군을 양예에게 중어 익주방면 토벌을 단행했다. 왕겸도 이에 맞서 달해기, 고아나굉, 을불건 등 관록있는 장군을 보내 양예에 대항했다. 익주의 서쪽에 있던 저족 추장 양영안도 왕겸에게 응원군을 보내왔다. 양예는 왕겸의 선봉장 달해기를 쉽게 격파했다. 아무리 익주지역이 험난하다하더라도 정예 20만 대군을 이길 수는 없었다. 달해기, 을불건은 지키던 성을 가지고 항복해 왔다. 왕겸은 30여 기병을 이끌고 사천성 신도현으로 도망갔지만 신도현령 왕보가 그를 사로잡아 양예에게로 압송했다. 왕겸과 고아나굉은 참수되었다.
(14) 양견의 수나라 건국(AD581)
최대 적대세력 울지형과 왕겸이 차례로 토멸되면서 양견이 사실상 실권을 장악했다. 양견에게 이 모든 것의 결정적인 기회를 제공한 사람은 황공(黃公) 유방과 패공(沛公) 정역이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우문옹의 사망 직후 내부조정을 틀어 쥘 수가 없었다. 그러니 양견으로서도 그 두 사람을 마음깊이 고마워했고 또 두텁게 대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욕심 많고 교만, 방자한 범생이었다. 양견은 점차 유방과 정역을 멀리했다. 그 대신 똑똑하고 당찬 고경을 신임하기 시작했다. 유방 대신 고경을 사마로 임명하고 유방과 정역을 사실상 퇴역시켰다. 외부적으로는 북주의 잔존세력 울지형과 왕겸의 토벌로 대강 일단락이 된 셈이다. 그리고 내부저으로는 유방과 정역과 같은 조정의 구신들도 도태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양견이 대위에 오르는 일 뿐이었다. 유계재가 양견에게 이렇게 말했다.
“ 이번 달 갑자일이야말로
하늘에 부름에 응하셔서 천명을 받으실 날입니다.(今月甲子應天受命)”
모든 조정 관료들이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졸라댔다. 몇 번 형식적으로 사양하는 모습을 보인 뒤 양견은 북주의 마지막 황제 정제(靜帝) 우문천(혹은 우문연)에게 양위 받는 방법으로 수나라를 건국하였다.(AD581년 2월14일) 이로써 북주는 AD557년 효민제 우문각에 의해 건국된 지 24년 만에 멸망한 셈이다. 양견은 상서좌복야에 고경을 임명하고 조경을 상서우복야, 이덕림을 내사령, 우경칙을 내사감에 앉혔다. 이들이 수나라 양견의 최측근 건국 오른팔, 즉 좌명공신이다.
(15) 북주 황실 우문씨의 족멸(AD581)
내사감 우경칙은 양견에게 북조 우문씨를 모두 없애야 후환이 없다고 재촉했다. 고경도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반대는 하지 않았다. 내사령 이덕림은 굳게 간쟁하며 우문씨 제거를 반대했다. 양견이 안색을 바꾸며 나섰다.
“ 그대는 서생이니 이 문제를 논하기에는 부족하다.”
우문씨는 이 때 거의 모두 죽었다. 이덕림은 이 일 이후 양견에게 소외당하여 승진하지 못했다. 북제가 북주에게 멸망했을 때 북제의 황족 고씨가 우문씨에게 멸족당했듯이(AD577) 이번에는 우문씨가 양견에게 멸족당했지만 양씨 또한 38년 뒤(AD619) 당의 이연에게 멸족당하고 만다. 탁월한 유생 이덕림은 이미 이것을 알고서 말린 것이었다. 이 때 어린(9세) 황제 우문천은 다치지 않았다. 다만 얼마 되지 않아서 사람을 시켜 조용히 죽였다.
(16) 미양공 소위의 등용과 감세정책(AD581)
미양공 소위는 소작의 아들로 미모도 뛰어나고 높은 지식과 덕망을 갖추어 주변의 명성이 자자하였다. 그런 소위를 탐낸 북주의 실력자 우문호는 거의 강제로 자신의 딸을 처로 맞게 하였다. 내키지 않았지만 당시 실력자의 듯을 거스를 수도 없었던 미양공 소위는 산으로 들어가 은거하며 살았다. 우문호가 실각하고(AD572) 우문옹이 집권하면서 소위에게 거기대장군 자리를 제수하였으나 소위는 한사코 칭병하며 거절했다. 그 다음 우문빈이 개부의동삼사라는 높은 자리를 제시하자 출사하여 조정에 들어왔었다. 양견의 밑에 있던 소위의 절친한 친구 고경은 양견에게 소위를 추천했고 양견도 소위의 명성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불러서 면접을 보고 매우 흡족했다. 그러나 양견이 선양을 받아 수나라를 세우자 소위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고경이 따라가서 그를 붙잡으려 하자 양견이 말렸다.
“ 그 사람은 나와 같이 일할 생각이 없는 것 같소. 그냥 두시오”
대신 소위에게 태자를 가르치는 태자소보의 자리를 제시하고 그의 아버지 소작의 지위를 크게 높여 주어 대접했다. 그리고는 얼마 있지 않아서 소위를 납언과 탁지상서 자리를 겸하게 하였다. 재정 및 행정의 총책임자 자리인 셈이다.
소위의 아버지 소작은 북주 이전인 서위 시대(AD535-AD556)에 재정을 담당하는 관료로써 국가재정이 궁핍하여 매우 엄한 세제를 집행한 사람이었지만 내심 너무 가혹한 것을 한탄하며 자주 이렇게 말했었다.
“ 내가 지금은 이렇게 가혹한 세금을 거두어들이고 있지만
이것은 마치 전쟁 중에 활시위를 당기는 것과 같이 불가피한 것이다.
언젠가는 누군가 이것을 느슨하게 할 때가 와야 할 것이다.“
자주 아버지의 이런 한탄을 듣고 자랐던 소위는 자신이야말로 아버지의 소원을 풀어 줄 사람이라고 확신했다. 양견의 신임을 얻게 된 소위는 기회가 있을 때 마다 세금을 감면하고 부역을 낮추어야 나라가 강해지며 재정이 튼튼해진다고 역설했다. 양견도 같은 생각이었다. 양견은 고경과 함께 조정의 모든 대소사를 소위와 같이 결정하였다.
한 번은 어떤 일로 몹시 화가 난 양견이 직접 사람의 목을 베려고 했다. 소위가 깜짝 놀라서 양견을 가로 막으며 저지했다. 양견은 그런 소위를 비껴 달려가려하자 황제의 소매를 붙잡고 잡아당기기를 한참 하였다. 소위의 끈질긴 방해에 풀이 죽은 황제 양견은 소매를 떨치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가 한 참 뒤에 나오며 말했다.
“ 공이 이와 같이 나를 막을 수 있으니,
이제 나는 걱정할 것이 없겠소.“
소위에게 말 두 필과 전 10만을 하사하고 본직과 함께 대리경, 경조윤 및 어사대부를 겸직하게 했다. 양견의 유례없는 소위의 겸직을 비판하고 탄핵한 사람이 있었다. 치서시어사 양비였다. 치서시어사는 고위공무원의 형벌과 행정의 비리를 조사하는 직책으로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 같은 것이다.
“ 소위는 다섯 개의 직책(납언,탁지상서,대리경,경조윤,어사대부)을 지니고서
나태하게 업무를 보면서 극단적인 처사를 좋아하고
현명한 인재를 천거할 생각이 없이
혼자서 중직을 독점할 생각을 품고 있습니다.“
양견이 깊이 소위를 옹호하면서 말했다.
“ 소위는 아침저녁으로 부지런히 직무를 수행하고 있소.
또 소위가 나를 만나지 못했으면
아버지의 소원인 감세 정책을 펼 수도 없었을 것이고
나 또한 소위를 만나지 못했다면
이렇게 재정을 튼튼하게 쌓지 못했을 것이오.
나를 도와서 올바른 정치를 하고 백성을 교화 선도하는 것에서는
아무도 소위를 당할 자가 없소.
만약 세상이 시끄러웠다면
사호(四皓 : 동원공,기리계,하황공 각리선생등 은사들)처럼
숨어살았을 소위가 이렇게 나와 세상을 밝히는 것을
왜들 못마땅하게 생각하시오?“
유행본은 들고 있던 홀을 대전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물러났다. 황제가 깜짝 놀라 옷매무새를 고치고(斂容) 유행본을 불러 진지하게 사과하고 낭관을 용서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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