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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흥망의 교훈 : #3C 통합으로 북중국을 통일한 탁발도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7년03월30일 17시19분
  • 최종수정 2017년03월30일 17시22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35

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

 

 

 

<1> 북위의 장안공격(AD426)과 하나라 멸망(AD431)

 

당시 장안은 유송이 차지하고 있었다. 원래 장안은 후진의 수도였으나 후진이 동진에게 멸망당하고 나서 동진의 땅이 되었고(AD417) 동진이 역성혁명으로 망하여 유송(유유가 세운 송나라,劉宋) 땅이 된 것이다. 그러나 무너진 후진의 영토 중에서 황하 서북쪽의 대부분의 관중 땅을 차지한 것은 AD407년 하(夏)나라를 건국한 혁련발발이었다. 동진의 명장이자 유유의 오른 팔이던 유목지가 죽자 유유는 장안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건강으로 돌아왔고 장안 땅은 혁련발발이 가져갔다.(AD418) 장안을 차지한 혁련발발은 곧바로 황제위에 올랐다. 

 

그러나 혁련발발이 AD425년 사망하고 아들 간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깊어지자 탁발도는 하나라를 정벌할 생각을 품었다. 장손숭이 안된다고 반대하고 나섰다.   

 

“ 저들이 수비에 몰두하면 

  우리 군대는 피곤한 채로 그들과 싸워야 하며

  그 틈을 타고 북쪽의 욱구려대단이 

  우리의 배후를 공격하는 경우 매우 힘들어집니다.“

 

최호는 여러 가지 천문변화를 볼 때 공격하는 것이 옳다고 찬성했다. 탁발도는 자기 생각대로 해근에게 4만 5천, 주기에게 1만 명을 보내 장안을 공격하는 동시에 장손한과 탁발복진 등을 보내 하의 수도 통만(섬서성 정변)을 습격했다.(AD427) 북위의 기습공격을 받은 하나라는 수도를 상규(감숙성 천수)로 옮기고 저항했으나 결국 AD434년 북위의 탁발도에게 멸망한다.  

 

 

<2> 북위의 유연토벌 논쟁 (AD429)과 최호 칭찬

 

유연(柔然)이라는 나라는 선비족 계열의 유목 부족국가로 예예(芮芮), 연연(蠕蠕) 혹은 여여(茹茹)라고도 불렸다. 유목생활을 주로 하는 부족국가이므로 한 곳에 정착하지 않았으나 대체로 동으로는 요동과 고구려에 맞닿고 서로는 신장자치구의 언기(焉耆), 남으로 고비사막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을 지배하였다. 탁발도는 북쪽의 위협인 유연을 가만히 놔두고는 중국통일의 대업을 이룰 수가 없다고 판단했다. 출정에 앞서 우선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나서 전투부서를 배치하고 진영을 설치하였다.

 

태사령 장연과 서변, 그리고 상서령 유혈이 나서서 전쟁을 반대했다. 올 해가 기사년이므로 세 가지 음의 기운(3음: 己도 陰, 巳도 陰, 己巳도 陰)이 있으므로 불길하다는 것이었다. 여러 군신들도 반대에 합세했다. 그러면서 옛 날 비수대전(AD383) 때에 장연이 전쟁에 반대했었는데 그의 예언대로 되었듯이 장연의 예언은 틀린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탁발도는 전쟁에 찬성하는 최호와 반대하는 장연을 불러 서로 대면시켜 논쟁하도록 했다. 최호는 장연과 서변에게 이렇게 말했다.

 

“ 음은 전쟁, 양은 덕행을 의미합니다.

  군주에게 음은 작은 음은 사형과 형벌이고 큰 음은 전쟁입니다.

  죄 있는 자(연연)를 토벌하려는 것은 큰 형벌을 집행하는 것입니다.“

 

장연과 서변이 유연은 쓸모없는 땅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최호가 대답했다.

 

“ 유연은 신하로 있었는데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원흉을 주살하고 양민을 수습하여 보호하면서 조세와 부역을 부과하는 것은        

  쓸모없는 것이 아닙니다.

  장연과 서변의 예언이 적중한다고 하지만

  얼마 전 하나라 통만을 함락시킬 때 패배의 징조를 왜 장연은 몰랐습니까?

  알았다면 왜 말하지 않았습니까.

  알면서도 말하지 않았다면 그 또한 불충 아니겠습니까?“  

 

장연은 천문담당자로써 하나라의 혁련창 밑에 있었는데 북위의 공격을 받고 하나라가 망할 것을 왜 알지 못했냐는 것이다. 장연은 부끄러워 어쩔 줄을 몰랐다. 그 때 어떤 사람이 최호를 비난하고 나섰다.

 

“ 남방의 도적(유송을 말함)을 두고 북벌을 감행하다니 

  유연이 도망가 버리면 얻는 것이 없을 것이고

  뒤로는 강대국에게 위협을 받는 것이 아닙니까?“

 

최호가 차분히 대답했다.

 

“ 첫째로, 지금 북방을 격파하지 않으면 나중에 남방을 대적할 수가 없습니다. 

  둘째로, 우리는 기병이고 남방은 보병입니다. 보병이 침입하는 것은 

         쉽게 신속히 대적할 수 있습니다.  

  셋째로, 설사 저들이 우리의 남쪽국경을 침범한다고 하여도 

         그들이 땅을 지킬 수가 없는 것은 지난번 장안 점령 때 봐서 잘 아는 바입니다.

  넷째로 지금 유연은 방비가 매우 허술하니 이 때가 아니면 

         다시 공격하기 쉽지 않습니다. 수고로움은 잠시이고 

         편안함은 영구한 것이니 시기를 잃어서는 안 됩니다.

         황상께서 이미 마음을 정하셨으니

         무엇으로 그것을 바꿀 수가 있겠습니까?“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탁발도가 AD429년 5월 29일 직접 대군을 이끌고 북정에 나섰다. 유연의 지도자 흘승개가한과 모든 군대들은 다 도망갔고 탁발도는 30여만 가구와 말 100여만 필을 노획했다. 조금 더 진군하자는 최호와 구겸지의 의견이 있었으나 복병의 습격을 우려하여 탁발도는 회군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때 이틀만 더 공격했으면 유연 무리는 완전히 소탕될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하여 탁발도가 심히 후회했다. 흘승개가한이 죽고 그 아들 욱구려오제(=칙련가한)가 왕위를 계승했지만 유연 세력은 크게 약화된 것은 사실이다.  

 

탁발도는 이번 전쟁에서 수훈을 세운 최호에게 시중, 특진 및 무군대장군의 직위를 하사했다. 최호는 특히 점을 잘 보았으며 탁발도가 수시로 불시에 최호의 집에 들러 자문을 구하였는데 때로는 허리띠를 멜 시간이 없을 정도로 급히 들이닥쳤고 아무렇게 음식을 대접해도 꼭 다 서서 맛을 본 뒤에 돌아갔다고 기록되어있다.   

 

탁발도는 최호를 침실에 불러 이렇게 당부한 적이 있다.

 

“ 그대는 지략과 재능이 깊고 넓어

  짐의 조부(탁발규)와 아버지(탁발사)를 진심으로 섬겨

  충성이 삼대에 걸쳤으니

  짐 또한 그대를 가까이하고 도움을 청하는 것이오.

  경 또한 짐의 마음을 알아서 깊이 새겨 충성스럽게 나에게 간해야 할 것이니

  절대로 감추는 바가 있어서는 안 될 것이오.

  때로 짐이 화를 내고 따르지 않는 일이 있을 지라도

  끝내 공의 말을 깊이 귀담아 기억할 것이오.“

 

그리고는 항복한 적군의 장군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 이 사람이 비록 몸이 허약하여 활이나 창칼을 제대로 잡을 수 없이 보이지만    

  그 가슴 속에는 창칼과 비교할 수 없는 더 큰 무기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오.

  짐이 정벌을 망설이고 있을 때

  앞뒤로 계획을 세워 전쟁을 이기게 가르쳐 준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오. “

 

그리고는 상서에게 칙령을 내렸다.

 

“ 무릇 국가와 군사에 관한 모든 계책에서

  너희들이 결정할 수 없는 사항들은 모두

  최호에게 물어 자문을 구한 뒤 결정하도록 하라.“

 

 

<3> 황하 이남 땅에 대한 유송과의 갈등(AD430) 최호전략

 

지금 북위의 탁발도가 점령하고 있는 황하 이남 회수 이북(지금의 하남성 남부)의 땅은 원래 동진과 이를 이어받은 유송의 땅이었다. 이 땅을 북위가 차지한 것은 7년 전인 AD423이었다. 새로 황제가 된 유송의 유의륭은 북위에 사신을 보내 돌려달라고 점잖게 요구했다. 

 

“ 황하 이남은 송의 땅이니 돌려 주셔서 옛 국경을 회복하여 주십시오.”

 

탁발도가 이 말을 듣고 격분했다. 사신에게 이렇게 호령했다.

 

“ 내 태어나 머리가 마르기도 전부터 그 땅은 우리 땅이었다.

  무슨 망칙한 소리를 지껄이는 것인가?“  

 

이제 북위와 유송의 전쟁은 불가피해졌다. 황하 이남을 방어하는 북위의 장군들은 선제공격을 제안했다. 조정의 대신들도 찬동하는 분위기였다. 최호가 나서서 반대했다.

 

“ 첫째, 그 지역은 덥고 습하여 초목이 매우 무성한 지역입니다. 

       우리 주력부대 기병의 진군에 매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둘째, 이미 엄중한 방어체계가 되어있으니 쳐들어온들 완벽하게 방어가 됩니다.

  셋째, 선공으로 깊이 들어가면 전쟁이 오래 계속되면 군량 조달이 어렵게 됩니다.

       결국, 선제공격으로는 승리하기가 어렵습니다. 

  저들이 먼저 쳐들어오면

  첫째, 피로하기를 기다린 다음에

  둘째, 가을에 말이 살찌고 초목이 시든 다음에 기병을 습격하는 것이 최상책입니다.

       남방지역 장수들은 북방 장수들의 지난 연연토벌의 공을 부러워하여 

       서두르자는 것일 뿐입니다 “

 

탁발도는 최호의 말을 믿고 선제공격 대신 수비에 치중하기로 하였다. AD430년 유송황제 유의륭이 도언지에게 군사 5만을 주어 황하로 나아가게 함과 동시에 왕중덕은 동쪽, 단굉은 서쪽으로 나누어 북진하게 하였다. 유송의 대군이 북침에 나서자 북위의 수비장군들은 한편으로는 북위로 망명온 과거 동진의 황족 사마초지와 그의 휘하 장군들을 전선에 보내 유송군대의 내부반란을 유혹시키고 다른 한 편으로 유주지방의 강력한 기병지원대를 요청했다. 

 

최호는 그 계략에 반대했다. 동진의 망명인사를 앞세워 유혹하면 유씨 군사들은 사마씨를 다시 세우려는 것으로 알고 더욱 분전할 것이니 좋은 계책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탁발도는 최호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자 최호는 여러 가지 음양설을 인용하며 남쪽에 대해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반대했다.

 

“ 무릇 나라를 일으키는 군주는

  먼저 인사를 정비하고

  다음으로 지형의 이로움에 유의한 뒤

  천시를 잘 살피는 법이니 

  이렇게 하면 만 가지를 일으켜도 다 승리하게 됩니다. 

  지금 유의륭의 군대는 인사도 정비되지 않았고

  물도 말라 지형에 이롭지도 않으며(유송은 수군이 강했으나 물이 말라 불리)

  각종 재난이 이어 나타나니 천시도 이롭지 않습니다. 

  거병한다면 필패의 운세이니 우리가 군사를 일으킬 이유가 없습니다.“

 

탁발도는 끈질기게 전쟁을 요구하는 제장들을 묵살할 수가 없어서 유주기병과 사마초지를 황하에 출병시켰다. 도언지의 유송군대는 운하를 타고 산동성 동평까지 올라와 황하를 타고 거슬러 북상했다. 개봉과 정주를 지나 낙양까지 올라오자 미처 방어하지 못했던 북위는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 북위의 속국이던 하나라 혁련정이 동생을 보내 북위의 부성(섬서성 낙천현)을 공격함과 동시에 유송에 사신을 보내 협공한 뒤 북위 나라를 나누어 가지자고 제안했다. 유송이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이제 북위는 남쪽에서 유송이 서쪽에서 하나라가 침공하는 어려운 형국에 빠지게 된 것이다. 탁발도는 군사를 모아 혁련정을 먼저 칠 생각을 했다. 제장들은 남쪽의 유송군대를 두고 서쪽을 공격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반대했다. 최호가 나서서 말했다.

 

“ 지금 유의륭과 혁련정은 서로 공격을 미루고 있는 형편입니다.

  마치 달기 두 마리를 묶어두면 전혀 날 수가 없는 꼴이라 하겠습니다.   

  혁련정을 우선 공격하더라도 해가 될 것이 없습니다.

  먼저 혁련정을 쳐부순 다음에

  동관으로 내려가서 자리를 말 듯 기병을 진격시키면

  장강과 회수 이북에는 풀포기조차 설 수 없을 정도로 초토화 되는 것입니다.“

 

탁발도가 손수 대군을 이끌고 혁련정의 도읍 통만을 습격하고 평량을 포위 공략하자 혁련정은 멀리 도망갔다. 4년 뒤 (AD434) 하나라 주군 혁련정은 결국 북위 탁발도에게 사로 잡혀 멸망하고 말았다. 

 

탁발도는 왕근에게 포판(섬서성 영제)을 지키도록 했다. 북위의 장군 안힐은 낙양과 호뢰관을 탈환하고 두초는 산동지역을 수복했으며 숙손건과 장손도생은 황하를 건너 도언지의 유송군을 압박했다. 유송의 도언지는 패주하여 건강으로 돌아왔지만 하옥되었고 돌아 온 많은 장수들 또한 하옥되거나 파면되었다. 이제 북위는 관중지역을 확실히 장악하게 된 것이다.(AD430) 이 때 사로잡힌 유송의 포로 한 사람이 안힐에게 이런 말을 했다.

 

“ 예전에 황제 유의륭이 도언지를 보낼 때 이렇게 명령했습니다.

  북위군이 내려오면 그들이 오는 것보다 먼저 지름길로 가서 황하를 차지하되

  북위군이 내려오지 않으면 나아가지 말로 머물러 있으라.“  

 

이 말은 최호의 생각이 정확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호 말대로 내려오지 않았으면 유송 군대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고 그랬다면 혁련정도 배후를 공격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상 북위와 유송의 전쟁은 북위가 먼저 일으킨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북위로서는 잃은 땅을 되찾은 것일 뿐이고 유송으로써는 패전함으로써 재정고갈이 극심하게 나빠졌다.

 

 

<4> 유송의 반간 계략과 탁발도의 왕혜룡 신임 (AD431)

 

동진의 망명황족 사마초지는 이번 승전을 계기로 남침을 단행하여 유송을 멸망시키자고 요청했다. 탁발도는 전쟁 피로를 들어 반대했다. 그리고 왕혜룡을 형양태수로 삼아 전쟁피해를 신속하게 복구시키도록 했다. 왕혜룡 또한 훌륭한 정치로 재빨리 군사와 농업을 크게 일으켰다. 장차 남침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었던 유의륭은 반간계략을 썼다. 즉 사람을 풀어서 왕혜룡이 자기 업적에 비해 상훈이 적고 낮아서 불만해 하며 곧 반란을 계획한다는 소문을 퍼뜨리게 한 것이다. 탁발도가 이 소문을 접해 듣고서 왕혜룡에게 새서, 즉 황제의 도장을 찍은 친서를 보내 말했다.

 

“ 유의륭이 장군을 보기를 호랑이 같이 하므로 

  이런 황당한 모략을 퍼뜨리고 있음을 내가 잘 알고 있소.

  개의치 마시고 마음에 두지 마시오.“

 

유의륭은 다시 자객 여현백을 보내 왕혜룡의 머리에 200호 봉읍에 남작 칭호에 비단 천 필을 걸었다. 여현백은 거짓으로 항복하여 칼을 품고 왕혜룡에게 다가갔다가 들키게 되었다. 여현백이 잘못을 사과하며 죽기를 청하자 왕혜룡이 발했다.

 

“ 너의 주군을 위해 한 일이니 잘못이 없다. 즉시 풀어주라.“   

 

왕혜룡의 측근들은 여현백을 죽이지 않으면 송나라 음모가 그치지 않을 것이라며 말렸지만 왕혜룡은 이렇게 말했다.

 

“ 생사는 하늘에 달려 있으니

  저들이 어찌 나를 해칠 수가 있겠느냐.

  내가 인의를 가지고 백성을 막고 감싸고 있는데

  또한 무엇을 걱정하겠는가? “

 

결국 여현백을 풀어 주었다. 9년 뒤(AD440) 왕혜령이 죽었을 때 여현백을 자신이 죽을 때까지 왕혜령의 무덤을 떠나지 않고 지켰다.

 

 

<5> 북연의 멸망(AD436)

 

탁발도가 AD432년 6월 출정하여 북연을 공격하며 8월에 수도 화룡(요녕성 조양)을 포위하였다. 북연의 상서 곽연이 북연왕 풍홍에게 속국을 자청하자고 했지만 북연왕은 죽음으로 지키는 것만 못하다고 거부하였다. 북연의 장군 주수지는 유송과 함께 기습병을 보내 탁발도를 암살하려했으나 유송이 참여하지 않아 실패했다. 풍홍은 주수지를 유송에 보내 구원병을 요청했다. 풍홍의 총애를 받지 못한 풍숭 등 여러 아들들이 평소의 불만을 품고 북위에 항복하고 말았다. 북위는 북연왕 풍홍을 요서왕으로 책봉하며 회유하였으나 듣지 않았고 북위와 북연의 대치 상태는 한 동안 계속되었다. AD434년 마침내 풍홍이 사신을 보내 막내 딸을 보내고 태자를 보내 알현하겠다는 약속을 했으므로 탁발도가 허락하였다. 그러나 북연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리고 바다를 통해 또 유송에 사람을 보내 북연을 도와 줄 것을 끈질기게 요청하였다.

 

AD436년 초 북연의 왕 풍홍이 다시 태자를 보내겠다고 요청했으나 탁발도는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어 일거에 거절했다. 그리고 북연 토벌 계획을 세움과 동시에 주변국에 10여 명의 사자를 보내 개입하지 말 것을 엄중히 경고하였다. 그리고 4월 북위의 장군 아청과 고필 군사들이 진격해 들어갔다. 고구려의 장군 갈로맹광이 수만 명의 군사로 북연을 도우려 들어왔다. 북연의 상서령인 곽생이 문을 열고 항복하려고 했으나 북위 군사들은 매복을 염려하여 입성하지 않았다. 북연의 상서령 곽생이 북연왕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자 고구려 지원군이 들어와 북연왕 풍홍은 함께 용성을 불태워버리고 동쪽 고구려 영토로 도망하였다. 북연이 이렇게 멸망했다. 북연왕을 사로잡지 못한 책임을 물어 탁발도는 아청과 고필을 사졸로 강등시켰다. 탁발도는 고구려에 사람을 보내 풍홍을 돌려 달라고 했지만 고구려 장수왕은 약을 올리듯이 이렇게 말했다.

 

“ 풍홍과 함께 덕정을 베풀어 

  탁발도 왕의 덕화를 펼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화가 치밀어 오른 탁발도는 진농(관중과 감숙성)의 기병들을 이용하여 고구려를 정벌할 계획을 세웠지만 먼저 진농의 병사들에게 세금과 요역을 면제시켜 마음을 산 뒤에라야 정복이 가능하다는 말에 고구려 정복 생각을 접었다. 

  

 

<6> 북량 정벌문제(AD439)와 최호-이순의 대질토론

 

하나라가 AD434년에 망하고 북연이 AD436년 망함으로써 이제 천하에는 북위와 유송 외에는 감숙성 고장에 도읍한 저거몽손이 세운 북량(AD401-AD439)만 남아 있었다. 유송에서는 훌륭한 군주 유의륭에 의한 선정, 즉 원가의 치세(원가치세, AD424-AD453)이 베풀어지고 있어 학문과 국력이 크게 신장되었으므로 틈이 없었다.

 

그러나 고장의 북량 조정 내부에서는 심각한 분란이 싹트고 있었다. 북량의 왕 저거목건이 형수 이씨를 간통했고 그 형제 세 사람이 돌려가며 이씨를 사랑한 것이다. 이씨는 총애를 믿고 저거몽손의 누나와 함께 저거목건의 처인 탁발도의 동생(무위공주)을 독살하려 했으나저거목건이 급히 해독제를 주어 살려내었다. 그 소식을 들은 탁발도가 분노하여 이씨를 보내라고 했지만 저거목건은 거부하고 이씨를 멀리 주천으로 보내버렸다. 탁발도는 이런 북량의 조치에 대해 이를 갈고 있었다.  

 

당시 북위 사신이 서역지역으로 갈 때에는 반드시 북량이 지원군을 보내어 길을 인도하며 보호했는데 저거몽손을 이어받은 아들 저거목건의 호위병이 북위 사신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 요즘 이곳에는 북위가 연연 토벌에 실패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서역 곳곳에서 두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북위 사신은 돌아 와서 그 말을 탁발도에게 전달했고 탁발도는 과연 그런지 하다라를 몰래 북량에 보내 탐문하도록 했고 그것이 사실인 것이 드러났다. 탁발도는 최호를 불러 북량 토벌의 방책을 물었다. 최호는 이렇게 대답했다.

 

“ 그들이 전혀 생각지 못한 상태에서

  대군이 갑자기 들이닥치면 그를 사로잡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탁발도도 그렇게 생각했다. 해근 등 여러 장수들은 사막 지형 및 유목민의 특수성을 감안하면 공격이 어려울 것이라고 반대했다. 이순이라는 사람은 북량에 14번이나 사신을 갔으므로 그 지역 지형을 잘 아는 사람이었지만 저거몽손이 오랫동안 뇌물로 회유한 사람이어서 북량 편에 서서 물도 없고 황량한 땅이라 전쟁이 어렵다고 반대했다. 최호는 그런 유착관계를 여러 번 지적했지만 탁발도의 신임이 워낙 강해 먹히지가 않았다. 

 

탁발도는 결국 최호와 이순에게 대질토론을 시켰다. 최호는 한서지리지에 그 지역이 물이 풍부하다고 기록됐다고 지적했다. 이순은 스스로 눈으로 본 것을 말함이지 책으로 보고 말하는 것이라고 항변했다. 최호가 드디어 들추어내었다.

 

“ 남의 돈을 받고서 그를 위해 유세하는 처지에

  내가 보지 않았다는 사실 만으로 우기면서 모두를 속이려고 하는데 

  과연 속일 수 있겠는가?“

 

두 사람이 격론을 벌이자 아무도 끼어들지 못하고 회의는 끝이 났다. 모두가 나가자 비서 이발이 탁발도에게 가까이 가서 이렇게 말했다.

 

“ 물이 없고 살기가 어렵다면 

  어떻게 그곳에 대대로 나라를 만들었겠습니까?“ 

 

탁발도가 무릎을 치며 탄성을 올렸다. 

 

“ 바로 그것이다.”

 

AD 439년 6월 11일 탁발도가 손수 대군을 이끌고 평성(산서성 대동)을 떠나 북쪽으로 출정했다. 그리고 저거목건에게 이렇게 경고했다.

 

“ 친히 군사를 이끌고 먼저 나와 우리를 맞으면 상책이다.

  우리 6군이 도착하고 나서 면박여친하면 중책이다.

  다복하게 살 방법을 잘 생각해 보아라.“

 

북량을 공격하는 도중 그 지역에 물이 많음과 끝없이 늘어진 목초지를 보고서 탁발도는 최호의 예견이 정확했음에 또다시 놀랐다. 저거목건은 황급히 몽골지역에 있는 유연에게 도움을 구했지만 유연 또한 끼어 들 형편이 되지 못했다. 저거목건의 큰 조카 저거만년이 북위에 항복하고 군대가 흩어지자 저거목손이 모든 신하를 이끌고 면박여친 항복을 요청하였다.(AD439.9.25) 북량은 이렇게 북위에게 멸망당하였다. 탁발도는 항복한 모든 북량의 신하를 용납하고 중용 우대하였다. 전국이 거의 평정되자 탁발도는 문치에 매우 힘을 썼다. 그동안은 오로지 무예만 강조함으로써 귀족 자제들이 문학이나 경학에 뜻을 두지 않고 소홀했으나 이제부터는 국가의 기강을 바로 잡기 위해 예절과 학문을 숭상하는 기풍을 진작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 일은 최호와 중서시랑 고윤과 산기시랑 장위가 책임을 맡았다.  

 

 

<7> 충신 고필(AD444)

 

최호와 함께 탁발도에게는 충신 고필(古弼)이 있었다. 8년 전 북연을 공격할 때 도망가던 풍홍을 놓친 죄로 사졸로 강등되었던 사람이다. 그는 정직하고 신중하며 소박하고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다시 복직되어 시중으로 있던 중 탁발도는 모든 행정을 태자 탁발황에게 위탁하고 중서감 목수와 사도 최호와 시중 고필에게 태자를 보필하도록 명령했다. 고필은 상곡(하북 회래)에 있는 황실 소유의 동물원이 너무 넓어서 그것을 반으로 줄이고 가난한 백성들에게 경작할 수 있도록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일을 주청하기 위해 알현을 기다리는 동안 황제는 시종 유수와 바둑을 두면서 좀체 시간을 내주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한 고필이 갑자기 유수에게 다가가 머리채를 잡고 끌어내려 등을 때리며 말했다.

 

“ 조정이 제대로 다스려지지 않는 것이 오로지 네 놈 때문이다.”

 

탁발도가 놀라서 얼굴이 일그러지면서 말했다.

 

“ 주청하는 일을 듣지 않은 것은 내 잘못인데 

  유수가 무슨 잘못을 했다는 말인가? 그를 해치지 말라. “

 

고필이 황실 동물원 건에 대한 사실을 고하면서 양해를 구했다.

 

“ 남의 신하가 되어서 무례하기를 이와 같이 했으니 그 죄는 큽니다.“ 

그리고는 밖으로 가 관을 벗고 맨 발로 땅에 엎드려 죄를 청했다. 탁발도가 이렇게 말했다.

 

“ 경에게 무슨 죄가 있다는 말인가.

  진실로 사직을 생각하고

  백성의 편안함을 생각하는 사람이 온 힘을 다하여 

  해야 할 말을 한 것이니

  관을 다시 쓰고 신발을 신어 직무에 나아가라.“(AD444)

 

탁발도가 사냥을 나가면서 고필에게 사냥기병에게 가장 좋은 말을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고필은 가장 나쁘고 늙은 말을 공급했다. 탁발도가 격노하여 말했다.

 

“ 연필 대가리(筆頭) 같은 고필이 일부러 짐을 깎아 내리는구나.

  내 장차 이 놈의 목을 베어 버릴 것이다.“

 

고필의 좌우에 있는 신하들이 죽을 것이 걱정이 되었다. 고필이 이렇게 말했다.

 

“ 남의 신하가 되어서 

  주군이 사냥이나 하면서 즐기는 것을 막지 못한 죄는 작다.

  불우한 일이 일어날 것을 대비하지 않고

  군대와 국가가 쓸 물건을 낭비한 죄는 크다.

  지금 북으로 유연이 강성해지고 있고 

  남쪽으로는 유송이 건재해 있는데

  약한 말을 주고 좋은 말을 따로 비축해 둔 것은

  국가를 위해 먼 장래를 대비한 일 아니냐.

  비록 작은 죄로 죽더라도 무엇이 한스러우냐.

  그리고 그건 내가 한 일이니 너희들이 걱정할 게 무엇이냐.“

 

탁발도가 그 말을 듣고 감탄했다.

 

“ 이 고필 같은 신하는 나라의 보배다.”

 

옷 한 벌과 말 두 필과 사슴 열 마리를 상으로 하사했다. 탁발규가 사냥을 갔다가 사슴 수천마리를 잡았다. 운반하는데 수레 500대가 필요했으나 고필이 분명히 수레를 주지 않을 것이니 각자 자신의 말로 운반하라고 하였다. 돌아오는 도중에 고필의 편지가 도달했다.  

   

“ 지금 가을 곡식이 여물어있고

  삼과 콩 또한 들판에서 추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멧돼지와 사슴과 들새가 곡식을 노리고 있으니

  추수가 늦어지면 아침과 저녁 사이에

  수확량이 세 배나 차이가 나게 됩니다.   

  수레를 보내려 하오니 급하게 오지 마시고

  천천히 내려오십시오.“

 

탁발도가 경탄하며 말했다.

 

“ 과연 내 말대로 필공은 사직을 지키는 신하다. 

  (果如吾言,笔公可谓社稷之臣矣)“

 

 

<8> 국기(國記)와 최호의 죽음(AD450)

 

탁발도에게는 또 다른 훌륭한 충신들이 많았다. 태위 장손숭은 4대를 걸쳐 탁발씨 황실을 섬겨 아버지 탁발사로부터 추천을 받은 훈구공신이고 최호는 지혜로, 장손도생은 청렴으로 이름을 떨친 신하였다. 탁발도가 이렇게 말했다.

 

“ 지혜라면 최호이고 청렴이라면 장손도생이다.“

 

최호가 탁발도의 총애를 믿고 인사를 독단적으로 전횡하면서 태자 탁발황과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탁발도는 최호와 고윤에게 사실에 근거한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국기(國記)>를 저술하도록 명령했다. 최호는 교만하고 아첨꾼인 민담과 치표를 측근으로 두고 있었는데 이들이 황제를 설득하여 최호를 국기 저술의 총책임자로 선출하게 했었다. 최호 또한 민담과 치표를 추천하여 국기를 저술하는데 참여하도록 추천했다. 민담과 치표는 최호에게 <국기>를 돌에 새겨 영원히 남기자고 제안했다. 이 말을 듣고 고윤이 경계하며 말했다.

 

“ 돌에 새긴다면 글자 하나 차이로 

  가문의 만세의 화가 될지도 모르는데 두렵습니다.

  우리 또한 제대로 목숨을 건질 수가 있을지 걱정입니다.“

 

최호는 마침내 사방 100보의 석단 위에 국사를 돌에 새겨 세웠다. 문제는 그 내용에 있었다. 사실대로 기록하다보니 북방민족, 즉 북위의 선조인 선비족을 폄훼하는 내용이 들어있었던 것이다. 내용을 본 북방출신 사람들이 모두 최호를 비방하며 말했다.

 

“ 그가 나라(탁발씨)의 잘못한 점을 폭로하여 드러냈다.”   

 

탁발도는 크게 화를 내며 조사를 시켰다. 이 소식을 들은 황태자 탁발황이 서둘러 스승 고윤을 불러 같이 잠을 자면서 말했다.

 

“ 황제께서 찾으시거든 내가 경을 불렀다고 말하시오.

  그리고 무엇을 물으시면 반드시 내가 일러 준 대로 말하시요.“

 

고윤이 무슨 일 때문이냐고 물었지만 태자는 들어가 보면 안다고 말했다. 마침내 황제가 고윤을 불러 국기의 저술자가 누구냐고 물었다. 태자가 끼어들어 말했다.

 

“ 고윤은 신중하고 세밀하여

  직급이 낮아서 최호의 명령을 받았을 뿐입니다. 

  청컨대 사형을 면제해 주십시오.“

 

그제야 고윤은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깨달았다. 최호의 일이 이렇게 될지 어느 정도 예상은 되었던 일이었다. 황제가 국기의 내용을 모두 최호가 서술했는지 다시 물었다. 고윤이 대답했다.

 

“ 태조기록은 등연이 썼고

  선제기와 현 황제의 기록은 저와 최호가 기록했으나

  최호는 워낙 바쁜 몸이라서 대강만 기록했을 뿐

  거의 모든 것은 제가 썼습니다.“

 

탁발도가 화를 내며 태자에게 말했다.

 

 “ 고윤의 죄가 더 큰데 어떻게 살려 준다는 말이냐.”

 

태자가 고윤을 두둔 옹호하며 말했다.

 

“ 고윤이 지금 정신이 없고 헷갈려서 그런 것입니다.

  전에 제가 물어 보았을 때 분명히 최호가 다 썼다고 했습니다.“ 

 

탁발도가 다시 고윤에게 그것을 확인했다.

 

“ 과연 태자 말이 맞는가?”

 

고윤이 확실하게 대답했다.

 

“ 황실을 욕보인 신의 죄는 멸족이 되어도 당연합니다.

  감히 헛되고 망령되게 거짓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태자께서는 저에게 오래 시강 받으시면서 

  저를 가엽게 여기셔서 두둔하시는 것일 뿐

  저에게 그렇게 물으신 적도 없으며

  신 역시 그렇게 대답한 적이 없습니다.

  신의 정신은 헷갈린 적이 없습니다.“

 

탁발도가 그런 고윤에게 감탄하며 태자에게 말하였다.

 

“ 정직하구나.

  훌륭하구나.

  죽음에 임하고서도 

  말을 바꾸지 않으니 믿음직하고,  

  신하가 되어 주군을 속이지 않았으니 곧은 사람이 아니더냐.

  그의 죄를 사면하고 

  그의 충직함을 널리 표창하라.“

 

그러고 나서 탁발도는 최호를 불러 국기 기술을 물었다. 겁에 질린 최호는 아무 대답을 할 수 없었다. 탁발도는 고윤에게 조서를 쓰라고 하여 최호, 종흠, 단승근 등 국기 기술 관련자 128명을 사형시켰고 관련자 모두의 5족을 멸족 시키도록 명령했다. 고윤은 그런 조서를 쓸 수가 없었다. 고윤이 계속 미루자 황제가 재촉했지만 고윤은 움직이지 않고서 황제에게 알현을 요청해서 말했다.

 

“ 최호가 다른 죄가 아니고

  직서를 쓰다가 죄를 지은 것이라면

  사형에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화가 난 황제는 황명 거역죄로 고윤을 가두었다. 태자가 나서서 간청하자 화가 풀린 황제가고윤을 풀어 주며 말했다.

 

“ 고윤이 아니었으면 족히 수천 명은 죽었을 것이다.“   

 

최호의 일족과 최호와 혼인관계에 있던 노씨, 곽씨 및 유씨를 족살 시켰고 그 외에는 모두 본인에게만 사형을 내렸다. (AD450)

 

 

<9> 종애의 탁발도 시해(AD452) 탁발여 옹립 탁발여 피살(AD452) 

 

북위 황제 탁발도는 거의 모든 국사를 태자 탁발황에게 맡겨 제왕의 정치를 실습하게 했는데 탁발황은 매우 꼼꼼한 성격에다가 재물에 대한 욕심이 많아 가혹하게 백성들로부터 뜯어 냈으므로 원성이 높았다. 당시에 중상시 종애 또한 황제의 총애를 믿고 가혹하게 법을 위반하며 착취했으므로 태자가 싫어하였다. 태자의 측근 구니도성과 임평성이라는 사람이 종애와 심하게 다투자 종애는 그 두 사람을 황제에게 참소했고 탁발도는 구니동성과 동궁관속들을 처형했다. 종애 일파에게 부하들이 당하게 되자 황태자 탁발황은 분하고 또 걱정이 되어 결국 화병으로 사망했다.(AD451) 황제 탁발도는 크게 슬퍼하며 자신의 경솔함을 자책하였고 그만큼 탁발황의 아들인 네 살 손자 탁발준을 가엽게 생각하며 가까이 하였다.      

 

종애는 매우 초조했다. 자신 때문에 태자 탁발황이 죽은데다가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한 황제는 장차 황제가 아끼는 손자 탁발준을 황제로 지명할 것이 분명하니 자신들은 이제 죽은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종애는 AD452년 2월 12일 부하를 시켜 황제 탁발도를 시해하였다. 그 때 그의 나이는 45세 였다. 조정에서는 그 사실을 비밀에 부친 뒤 장성한 황제의 아들 탁발한(15세)을 세우려고 했으나 적통이 탁발준(4세)에게 있었으므로 격론에도 불구하고 결정을 할 수가 없었다. 종애는 탁발한과 사이가 좋지 않았으므로 은밀히 남안왕 탁발여를 모셔와 탁발황의 부인 혁련황태후의 뜻이라고 속여 황제로 옹립하려고 꾀했다. 조정대신들이 미천하고 어리석은 종애를 전혀 경계하지 않고 궁궐에 소환되어 들어갔을 때 종애가 풀어 놓은 무장한 환관 30여 명이 난연 등 조정대신들을 모두 격살하고 탁발한을 가두었다가 처형한 뒤 탁발여를 황제로 옹립했다. 종여는 그 공로로 대사마 대장군 태사 및 도독중외제군사의 최고 실권자가 되었다.(AD452.2월)      

 

 

<10> 탁발준 옹립 쿠테타(AD452)

 

종여의 쿠테타로 집권한 탁발여는 자신의 정통성이 약했으므로 관료와 군대의 환심을 사기 위해 모든 국고를 털어 포상하는 바람에 국가재정이 크게 고갈되었다. 게다가 종여 또한 정치와 군권을 모두 쥐어 잡은 권력실세가 된 뒤 폭정을 서슴지 않고 착취를 더해가자 민심은 크게 이반되었다. 나이가 어렸지만 황제 탁발여는 그런 종여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제거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종애는 분개하며 소황문 가주를 보내 제사를 드리는 탁발여를 시해했다.(AD452.10.1) 우림군(황실 근위병) 낭중 유니가 탁발준을 세우자고 하자 종여가 깜짝 놀라며 대꾸했다.

 

“ 이 어리석은 사람아.

  환손이 어찌 정평(AD451년)의 일을 잊었겠는가?“ 

 

유니가 그렇다면 누구를 세워야 하는가를 묻자 종여가 대답했다.

 

“ 황자들이 환궁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적당한 사람을 세웁시다.”

 

유니는 종애가 또 계략을 쓸 것이 두려워 몰래 전중상서 원하에게 그런 상황을 전하였다. 원하는 육려와 함께 의논한 뒤 탁발준을 세우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장손갈후를 보내 궁궐을 완전히 포위한 뒤 명령을 내려 모든 군사들의 무장을 해제하고 황손 탁발준을 궁궐로 모셔와 황제로 옹립했다. 군사를 종애와 가주의 가택에 보내 체포한 뒤 끌고 와서 오형을 내린 뒤 삼족을 멸했다.(AD452.10.3) 

 

탁발여 황제 때 사도였던 고필과 태위였던 장려는 일단 귀양을 보낸 뒤 사약을 내렸으며 쿠테타의 공을 가지고 권력 다툼을 그치지 않았던 탁발수락과 장손갈후는 한 달 만에 모두 처형했다. 가장 가까운 신하인데다 황제 옹립에 큰 공을 세운 사도 육려에게 평원왕을 평원왕을 내렸으나 두 번 세 번 사양했다. 황제도 물러서지 않자 육려가 그러면 그의 아버지 육사에게 왕의 봉록을 내리도록 부탁하자 이렇게 대답했다.   

 

“ 어찌 천하가

  경의 부자로 두 명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하겠는가.“

 

육사에게는 동평공, 육려에게는 평원왕을 내렸다. 유니와 원하에게도 왕을 내렸다.

 

<11> 탁발도의 북위건국의 완성과 통합 융화정책 

 

탁발도는 AD386년 나라를 건국한 할아버지 탁발규와 아버지 탁발사를 이어 AD439년 북중국 통일의 대업을 완수하였다. 열여섯 살인 AD424년 황제가 되어 AD452년 까지 38년 동안 재위하면서 북 중국의 강국인 하나라(AD434)와 북연(AD436)과 북량(AD439)을 차례로 병합함으로써 오호십육국 시대를 종결한 사람이 탁발도다. 탁발도는 건장하고 용감하였다. 적의 성을 공격할 때에는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몸소 가까이 다가가 공격에 독려하였고 좌우에 사망자가 쌓여도 조금도 놀라지 않고 기색이 태연하였으므로 주변의 장수와 병사들이 겁내지 않고 공격에 진력했다. 성격은 매우 검소하고 솔직했으며 의복과 음식과 수레는 그냥 제공되는 것을 아무런 불평 없이 받았다. 적군의 노획물은 모두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신하들이 권위를 높이기 위해 성벽이나 궁궐을 신축하거나 수리하자고 하면 항상 이렇게 대답했다.

 

“ 옛 사람이 말하기를

  성(城)은 덕망에 있지 높음에 있지 않다고 했다.

  혁련발발이 흙을 찧어 성벽을 높이 쌓았지만 내가 무너뜨리지 않았는가.

  지금 세상이 아직 통일되지 않아서

  해야 할 일이 많은데 

  어찌 담벼락 쌓는 일에 몰두한단 말인가? “

  

그러면서도 재물은 국가의 근본이라고 생각하여 가볍게 소비하지 못하도록 했다. 사람을 보는 눈이 매우 밝았으며 졸병 중에서 쓸 만한 사람을 발견하면 반드시 중용하였고 그 사람의 재간을 보되 잘못은 마음에 두지 않았다. 듣고 살피는 것이 매우 정밀하고 예민하므로 사람들이 속일 생각을 못하였다. 상은 반드시 죽음으로써 공훈을 세운 사람들에게만 후하게 내렸으며 친척이나 아끼는 측근이라고 법을 어겨가며 후한 상을 절대로 내리지 않았다.  탁발도는 항상 이렇게 말했다.

 

“ 법이라는 것은 짐이 천하와 같이 나누는 것이니

  어찌 내가 감히 가볍게 여길 수가 있겠는가? (法者,朕与天下共之,何敢轻也)“

 

그의 대업의 기초에는 선대 이래로 중용된 이들에 그치지 않고 널리 등용된 인재의 힘이 컸다. 북중국의 통일대업에는 이 때 등용한 인재들이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탁발도의 단점은 지나치게 잔인하여 사람을 죽이는 것을 가볍게 여겼는데 그러고 나서는 심히 후회하기를 잘 하였다.

 

북위는 유목민족인 선비족의 전통을 버리고 중국 전통에 의한 국가 체제를 채용하기로 정하고, 화북지방을 평정하면서 데려온 여러 유목 부족을 나누어 부민(部民)으로 구성한 뒤 각 군현(郡縣)의 호적에 편입하였다. 말하자면 한족과의 평등융화정책인 셈이다. 그 이전만 해도 막강한 군사력을 가졌던 유목이민족들은 경작지에 바탕을 둔 전통적인 한민족을 몹시 깔보면 하층민 취급을 하는 경향이 강했다. 북위는 그런 차별 정책을 없애고 한선비(漢鮮卑)동화 정책을 실시하여 통합을 추구해 나갔다.

 

이후 효문제(孝文帝) 탁발굉 때에는 국도를 뤄양[洛陽]으로 옮겼고(AD494), 호복(胡服)·호어(胡語)를 금하고 호성(胡姓)을 한인(漢人)처럼 단성(單姓)으로 고치게 하였으며, 황족인 탁발씨도 원씨(元氏)로 개성(改姓)하였다. 효문제는 봉록제(俸祿制)·삼장제(三長制)·균전법(均田法) 등을 창시하여 북위의 국력과 문화가 크게 발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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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7년03월30일 17시19분
  • 최종수정 2017년03월30일 17시2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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