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률의 심쿵 인터뷰] - 세 번째 길, 몽골 올레 여는 서귀포 여자 서명숙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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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로가 ‘제주 할망 잘했다’며 뺨을 비벼줄 것 같다
규슈에 이어 6월 몽골 올레 열어
허허로운 밤 서귀포를 꿈꾸다
‘무데뽀’ 정신으로 제주 올레 시작
올레 걷기는 지친 삶 치유에 그만
대개 상상은 이렇다. 여성이지만 기골이 어느 정도 장대할 것이고 담배는 하루 서너 갑, 목소리는 괄괄하고 상당한 카리스마가 있을 것이다. 게다가 언론계에 오래 있었다니 감각도 남다를 것이라는 그런 상상들이다. 그러나 막상 실제 만나 보니 모든 상상이 어긋났다. 그나마 줄기차게 피우던 담배를 연전에 담뱃값 인상이 괘씸해 끊었다는 사실만이 가장 근사치에 가까웠다. 아담한 사이즈에 가끔 한숨을 내쉬고 경우에 따라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소녀티가 나는 중로(中老)의 여인이다. 서명숙(60) 제주 올레 이사장. 제주 올레길을 만든 여자다. 제주도에서 출마하면 국회의원이든 도지사든 무조건 당선된다고 했다. 온 국민을 걷기 열풍에 빠지게 했던 금세기 제주도가 낳은 가장 유명한 인물이 오늘 인터뷰의 주인공이다.
- 피차 맘이 편치 않겠지만 까칠한 질문부터 해야겠다. 올레길도 유명하지만 제주도 땅값 광풍의 주범이자 외지 인구 폭증, 환경 파괴의 몸통이라는 말도 들린다.
“말씀이 지나치다. 부작용이 없는 세상일이 어디 있나. 그 정도의 부작용은 우리가 껴안고 가야 한다. 재벌기업의 골프장, 초호화 리조트 건설 등등은 안 보이나. 눈이 있으면 부릅뜨고 한번 봐라. 그쪽이 문제다. 우리는 겸손하고 소박하게 개발했다. 아득한 옛날부터 있던 길을 복원하고, 걷게 하고, 그래서 사람들의 영혼을 풍요롭게 한 것이 전부다. 현대인의 삶은 간단찮다. 모두가 아프다고, 힘들다고, 괴롭다고 비명을 지르고 있지 않은가. 그런 소시민들이 안식을 찾은 곳이 제주도다. 그래서 사람들이 대처생활을 버리고 끊임없이 밀려오고 있다. 제한된 땅이니 만큼 땅값이 오르는 것은 어떡하겠는가. 그래도 서울에 비하면 아직은 터를 잡고 살 만하다.”
-부분적으로 인정하지만 다시 한 번 물어 보자. 이런 분야의 시조 격인 ‘월든’의 작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가 봤다면 어떻게 평가할 것 같나? 그는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소로를 생각하면 가슴이 뛴다. 현대인의 영혼에 안식을 준 분이다. 그래서 월든 숲에 가보는 것이 내 인생의 로망이자 판타지였다. 소로는 매사추세츠주 콩코드 근처 월든 호수가에서 오두막집을 짓고 평생 산책하며 살았다. 그 시대 최고의 엘리트가 왜 그랬겠는가. 거기에는 상당한 메시지가 숨어 있다. 알려진 대로 에머슨과 함께 시민 불복종 운동을 펼쳤다. 그는 우리보다 조금 더 일찍 기계 문명에 의한 환경 파괴, 나아가 정신적인 황폐화 현상을 경험했다고 봐야 한다. 자연 속에서 영혼의 안식을 찾고자 몸부림친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을 버리고 숲으로 갔다. 소로의 경우 북미대륙 광활한 자연 속에서 주어진 대로 살면 된다. 그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정이 다르다. 한반도는 워낙 좁다. 게다가 인구는 살인적으로 많고. 소로가 누렸던 이상적인 자연생활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최소한의 개발을 통해 조성된 올레 길을 걸으며 지친 삶을 치유하게 하려는 것이다. 소로 선생이 나를 만났다면 ‘제주 할망 잘했다’고 반갑게 뺨이라도 비벼줄 것이다.”
- 스페인 카미네 데 산티아고를 걷다가 우연히 만난 영국인이 올레길을 제안한 것이 계기라고 들었다. 제주 올레길에 이어 나라 밖 올레길에도 관심이 많다. 몽골에 만들고 있는 올레길은 어떻게 돼 가나? 몽골이야 나가면 모두 초원이 아닌가. 지나치게 오지랖이 넓어 보인다. 몽골 땅값도 들썩일까 걱정되고.
“뜬금없이 들릴지 모르지만 우선 나와 몽골의 관계, 나아가 제주 사람과 몽골의 관계부터 얘기해야겠다. 제주는 100년 이상 몽골의 지배를 받았다. 당연히 피가 알게 모르게 많이 섞였을 것이고. 그래서 그런지 몽골은 내게 늘 남의 나라 같지 않았다. 그래서 그쪽의 요청을 받고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한국인이면 누구나 엉덩이에 몽고반점이라는 퍼런 점 하나씩 달고 나오지 않는가. 아마 내 몸에 몽골인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 같다.
몽골이 청정하다는 것은 옛말이다. 모르는 소리다. 사정이 심상찮다. 급격한 산업화·도시화가 진행되고 있다. 사람이 다니던 예전의 정겹던 길은 포장되고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있다. 더 늦기 전에 그 옛날 칭기즈칸의 후예들이 다니던 길을 옛 모습 그대로 복원해 보자는 것이다. 6월에 올레길이 개통된다. 의심스러우면 비행기표 끊어 같이 가보자. 우문현답, 우리의 의문은 현장에 답이 있다. 가보면 안다.”
- 5년 전에 조성한 일본 규슈 올레길은 어떤가. 성공적인가.
“규슈 사람들이 찾아왔다. 민관 합동기구였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관광객이 급감하자 제주 올레길을 벤치마킹해 보겠다고 내게 온 것이다. 규슈 올레길도 아주 성공적이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벳푸·유후인 온천에서 목욕하고 후쿠오카에서 쇼핑하면 끝이었다. 즉 사진 찍고 목욕하고 쇼핑하고 떠났다. 고작 사흘 일정이면 여행은 끝났다. 지금은 다르다. 두 발로 걸어 다니면서 자연을 오감으로 느끼며 걷고 또 걷는다. 당연히 체류일수가 길어지고 지방 경기가 활성화됐다. 가다가 쉬고 쉬다가 가면서 규슈의 속살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규슈 올레 200㎞가 현지인과 관광객들에게 사색의 공간이 되었다.”
- 길에 대한 노자의 고상한 아포리즘도 있고 로버트 프로스트는 가지 않은 길에 대해 성찰하는 시를 지었다. 왜 길에 꽂혔나.
“누구나 그렇겠지만 인생이라는 게 맘대로 되지 않는다. 나의 인생길도 그랬다. 서른둘을 넘긴 아들과는 그동안 원수처럼 지내다가 최근 들어 비로소 말을 붙이고 지낸다. 서귀포는 내 고향이다. 함경도 무산 출신인 아버지가 인민군에 징용돼 포로로 거제도 수용소에 잡혀온 게 인연이 돼 서귀포 처녀와 눈 맞아 살면서 제주도에 정착했다. 유년 시절 말도 더듬었다. 지나치게 수줍어 친구관계도 쉽지 않았다. 초등학교 시절 동네 주변을 혼자 걸으며 지냈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졸업하고 시사주간지 기자를 거쳐 시사저널 편집국장, 오마이뉴스 편집장을 지냈으니 촌년치고는 성공한 셈이다.
그러나 마음은 늘 공허했다. 허허로운 밤이면 나는 서귀포를 꿈꾸었다. 내팡돌, 자구리, 소낭머리 해변, 그 와랑와랑(소리가 크게 울린다는 우렁우렁의 제주 방언)하던 유년 시절의 햇볕 등이 그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1차로 선택한 것인 산티아고 순례길 걷기였다. 종교와는 무관하다. 나에게는 실존적인 문제였다. 그래도 순례자처럼 걷고 걷고 또 걸었다. 그러다가 산티아고보다 아름다운 서귀포에 길을 만들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벼락같이 떠올랐다. 서귀포 칠십리는 정말 아름답다. 그래서 예전에는 ‘서귀포를 아시나요’라는 대중가요까지 있었다. ‘아름다운 그 바다와 그리운 그 빛난 햇빛, 내 맘속에 잠시라도 떠날 때가 없도다’ 맘속 깊은 곳에서 ‘돌아오라 서귀포로’가 끊임없이 메아리쳐 왔다. 터미네이터처럼 용감하게 무데뽀 정신으로 돌아와 시작한 것이 올레길의 시초다.”
서명숙 선생을 만나러 제주 가는 길은 어려웠다. 폭우와 강풍으로 비행기는 제주공항 하늘을 40분간 빙빙 돌았다. 덜덜 떨며 착륙을 기다렸다. 문득 제주에 가서 사는 사람들은 이런 상황을 어떻게 견딜까 궁금했다. 갈치조림 점심을 곁들인 그와의 인터뷰는 유쾌했다. 그는 비록 새 풀옷은 입지 않았으되 과연 서귀포의 봄처녀였다. 돌아오는 길, 루쉰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희망이란 원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지상의 길과 같다. 원래 지상에는 길이 없었다. 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길이 되는 것이다.” 그는 희망의 길을 만들어 내는 서귀포 여자다.
<위 글은 중앙선데이 제523호 (2017.3.19)에 게재된 “ [김동률의 심쿵 인터뷰] 세 번째 길, 몽골 올레 여는 서귀포 여자 서명숙”을 옮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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