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 5년차 청와대, 그리고 지금은....(16,최종회) 2017년의 대선정국, YS를 보면 길이 보인다 (下)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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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보수는 죽어야 산다
20017년 2월 1일 오후 3시 반경,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들 앞에선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 (이하 직함, 존칭 생략)은 뜻밖의 대선 불출마선언으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반기문 대선출마소동’은 허무개그처럼 20여일 만에 허무하게 끝났지만 그가 보수진영에 남긴 메시지는 크다. 어쩌면 ‘반기문 소동’ 그 자체가 지금의 보수진영 전체가 겪고 있는 ‘정체성 위기’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이란 생각이 들어서다. 사실 반기문은 자신의 생각과 의지와 상관없이 2017년 대선에서 보수진영을 구할 ‘마지막 희망’으로 떠올랐고 그러한 보수진영의 절대적 지지로 대세라는 문재인의 대항마로 까지 부상했다.
반기문은 자신의 정치적 정체성을 묻는 기자들에게 ‘진보적 보수주의자’라고 했다. “사람들은 자신을 보수주의자로 보지만 ‘대한민국 지도자 중에서 자기처럼 진보적 사고를 하는 사람이 없다’며 자신은 진보와 보수를 아우를 수 있다”고 했다. 반기문은 언론과 여야정치인들로부터 ‘반반주의’니 ‘기회주의’니 ‘낙상주의’니 하는 비아냥거림에 진보적 보수주의자로서 설득력 있는 메시지를 당당하게 전달하려 하기 보다는 “양 진영으로 갈라놓고 (당신은) 보수냐, 진보냐 라고 (선택을 강요)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특히 자신의 참모들에게 ‘표를 얻으려면 보수 쪽이다’라고 확실하게 말하라는 요청을 많이 들었는데 이는 보수의 소모품이 되라는 이야기라며 ‘보수만을 위해 일하는 사람은 대통령 자격이 없다’라고 했다”는 말은 그가 애당초 어떠한 이념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는지 혼란스럽게 한다. 그가 우리나라에서 보수(우파, 자유민주, 시장경제, 반북)와 진보(좌파, 민주평등, 반시장, 친북)가 어떤 의미로 쓰이고 있는가에 대해 정리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현실 정치판을 제대로 읽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를 희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대다수가 보수진영이라는 정치적 현실을 직시하고, 표의 확장을 위해 정치적 지형을 보수에서 중도와 진보의 영역으로 확장시켜나가는 전략적이고 전술적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는지도 조차도 의문이 든다. 그의 입장이 어떻든 그는 그와 함께 보수의 희망을 만들어 보려는 꿈을 꾸던 많은 보수진영 사람들에게는 깊은 실망과 좌절과 상처만 남긴 채 대선정치 판을 떠났다.
‘반기문 소동’은 비단 반기문 개인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이 시대 대한민국 보수정치인이나 보수이면서 보수라는 것을 감추고 싶어 하는 보수진영 사람들 모두가 겪고 있는 ‘정체성 위기’를 보여준 것이라고 생각한다. ‘반기문 소동’은 그런 점에서 이 시대 보수들에게 쏟아지고 있는 국민적 질타를 잠시 피하기 위한 정치 공학적 편법이 아니라 진정으로 국민의 소리를 겸허하게 수용하고 27년 전인 1990년 YS 3당 합당으로 만들어진 ‘보수대연합’이후 지금까지 보수가 걸어온 길에 대한 통렬한 자기반성을 요청한다. 대한민국 보수는 죽어야 산다. 그리고 무엇이,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어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지에 대한 진솔한 자기성찰을 통해 바른 보수, 특히 개혁적/진보적 보수로 거듭 나야 한다. 그리고 건강한 보수가 가져야할 이념과 가치, 그리고 정체성을 새롭게 재정립하는 일에 나서야 하고 차기를 준비하는 것이 바른 자세가 아닌가 싶다.
대한민국 보수정치의 ‘흑(黑)역사’
대한민국 현대정치사는 흔히들 27년 전인 1990년 1월에 있었던 YS 3당 합당을 통한 ‘보수대연합’을 현대보수정치의 뿌리로 지목한다. 박정희-전두환 군사독재의 유산을 물려받은 민주정의당(노태우)과 신민주공화당(JP), 그리고 전통보수야당으로 민주화를 이끈 통일민주당(YS)이 합당하여 ‘민주자유당’(1990.2)이 만들어진 이후 ‘신한국당’(1995.12), ‘한나라당’(1997.11) 그리고 ‘새누리당’(2012.1)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1993말부터 대한민국 정치의 본산인 청와대 생활을 시작한 이후 4년간 YS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정치현상들을 현장에서 온 몸으로 보고, 듣고, 느끼며 체험했던 경험에서 볼 때 민자당이 신한국당으로 바뀌고 다시 한나라당, 새누리당으로 바뀌는 것은 단순한 당명의 교체가 아니라 보수진영 내부의 치열할 권력투쟁을 함축하고 있다. 그 것은 수구적 보수(TK)가 개혁적/진보적 보수(YS), 중도적 보수(이회창과 TK)로 바뀌었다가 다시 극우적 보수(박근혜와 TK)로 회귀하는 개혁과 반개혁의 ‘흑역사’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에 대한 바른 이해 없이 대한민국 보수가 왜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해가 어렵다고 생각한다.
YS 문민개혁과 ‘개혁적 보수’의 탄생
1990년 3당 합당을 기반으로 대권을 잡은 YS는 문민개혁을 통해 민자당내의 TK 등 기득권세력을 정리하고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민주화 세력 등을 대거 수혈하여 수구적 보수의 민자당을 개혁적 보수의 ‘신한국당’(1995.2)으로 환골탈태시켰다. YS는 대한민국의 32년간의 군사독재시대를 청산하고 새 시대를 열어나가는 집권세력이 될 것을 선언했다. YS는 진보진영으로부터 김문수, 이재오, 이우재, 손학규, 김영춘 를 비롯하여 사회각계로부터 이명박, 이회창, 이홍구, 홍준표, 정의화, 김형오, 안상수, 한승수, 박찬종, 김무성 등 다양한 전문분야의 신진인사들을 신한국당에 새롭게 합류시켰다. YS가 이끄는 민자당(신한국당)은 변화와 개혁의 열기가 넘쳐났다. 민자당 내 기득권 세력인 민정계는 문민개혁의 직격탄을 맞고 비주류로 몰락했고 JP와 공화계는 당내 비판을 견디지 못하고 당을 떠나야 했다. 대한민국의 보수 여당은 전통 보수야당 출신의 YS로 대표되는 민주화세력의 새 피를 수혈 받아 새로운 개혁적 보수로 거듭 태어난 것이다.
1993년 2월 25일 대통령에 취임한 YS는 1987년 민주화 이후 5년이나 지연된 박정희-전두환 군사독재가 남긴 유산 청산을 위한 문민개혁에 나섰다. 흔히들 ‘개혁은 혁명보다 어렵다’고 한다. 개혁은 기존의 질서를 바꾸어 기득권을 없애고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작업이기 때문에 기득권 세력의 저항에 맞서야 한다. YS에게 기득권 세력은 다름 아닌 자신을 대통령으로 만들어 주고 자신의 정치적 기반이 된 민자당 내 TK 중심의 민정계와 JP중심의 공화계였다. 그들은 1961년 박정희 군사쿠테타 이후 지난 32년간 대한민국을 이끌어온 박정희-전두환-노태우와 김종필로 형성된 군부독재의 수구적 보수 세력이었다. YS 문민개혁은 바로 그러한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송두리째 부수는 작업이었다. 자신의 뼈를 깎고 제 살을 도려내는 일이었다.
YS는 2월 27일 취임 후 처음 열린 국무회의 자리에서 자신의 재산을 전격적으로 공개하는 것으로 개혁의 칼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깨끗한 정부, 깨끗한 사회구현을 위해 고위 공무원과 정치인을 포함한 모든 고위 공직자의 재산공개를 요청했다. YS로부터 시작된 재산공개바람은 ‘시대의 바람’이 되었고 부패한 장, 차관이상 고위 공직자, 국회의원 등 구체제 기득권 정치인들을 공직에서 추방하는 ‘개혁의 칼바람’이 되었다. 특히 재산공개바람은 민자당을 강타했고 박준규, 김재순을 비롯한 다수의 민자당 의원들의 의원직 사퇴 또는 탈당, 구속으로 이어졌다. YS는 3월 3일 민자당 사무총장에 자신의 심복인 최형우를 임명하여 당권을 장악하고 대대적인 당 개혁을 단행했다. 김재순은 ‘토사구팽’이란 말로 YS에 대한 서운함을 표시했다. 민정계는 YS개혁을 대한민국의 민주적 발전을 위한 시대적 개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들(TK)에 대한 ‘정치보복’으로 받아들이고 반YS(개혁)세력이 되었다.
YS는 3.1절 기념사에서 ‘부패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개혁의 바람을 전 사회로 확산시켰다. 군부독재체제에서 구조화된 부정부패와 비리의 척결을 위해 금융계, 교육계, 언론계, 군부 등에 대한 전방위 사정작업을 추진했고 이를 위해 감사원, 국세청, 검찰, 경찰 등이 총동원되었다. 특히 군사독재정부의 성역이었던 군부에 대한 ‘율곡사업감사’를 전격적으로 실시했다. 그 결과 장차관, 청와대 수석, 유력 정치인, 그리고 군 장성 등 수 많은 고위공직자들이 사법처리 되었다.
YS는 3월 4일 청와대 출입기자단과 같이한 ‘칼국수 오찬’에서 “재임 중 정치자금을 한 푼도 받지도 주지도 않겠다”고 선언했다.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겠다는 자신의 결의를 밝힌 것이다. 그리고 7월 2일 취임 후 처음을 만난 30대 재벌회장들과 가진 만찬에서 YS는 “나한테 줄 돈이 있으면 그 돈을 기술개발과 노동자들의 복지를 위해 쓰라”고 했다. YS는 퇴임 시까지 그 약속을 지켰다. 1993년 12월 23일 농수산수석비서관으로 임명받고 처음 참석한 수석비서관회의 석상에서 처음 들은 YS의 지시사항은 “돈 받지 말라”는 것이었다.
YS는 3월 8일 한국 민주주의의 최대 위협세력인 정치군인들의 사조직인 하나회 숙정을 전격적으로 단행했으며 기무사를 재정비하고 ‘5.24 숙군조치’를 통해 군부의 정치개입 불씨를 항구적으로 제거했다. 3월 15일에는 안기부를 방문하고 안기부의 국내정치사찰을 금지하고 본연의 대북업무에만 집중하도록 개혁하고 특히 국회 내에 정보위원회를 설치하여 안기부의 운영과 예산 집행 등에 대해 국회의 감독을 받도록 하는 등 안기부에 대한 통제장치를 마련했다.
8월 12일 저녁 7시 45분, YS는 전격적으로 ‘금융실명제 및 비밀보장에 관한 긴급재정경제명령권’을 발동하고 당일 8시 이후부터 모든 금융거래를 실명으로 하는 혁명적 조치를 취했다. 금융실명제실시는 정치자금의 조성과 흐름을 투명화 시키는 1950년 농지개혁이후 최대의 정치개혁, 경제개혁이었다. 1995년 7월1일에는 부동산실명제가 실시되었다.
YS는 이러한 개혁조치를 바탕으로 본격적인 정치개혁에 나섰다. 군사독재체제의 유산인 정경유착의 적폐를 없애고 기업으로부터 정치자금모금관행을 없애기 위해서는 ‘깨끗하고 돈 안 드는 정치’를 제도적으로 확립하는 일이라고 판단했다. YS는 민주주의적 정치발전을 위해서는 ‘입과 손발은 풀고 돈은 묶어야 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정치개혁을 진두지휘했다. 여야는 YS의 강력한 의지에 따라 1993년 8월부터 국회 내에 ‘정치관계법 심의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1년여의 논의를 거쳐 1994년 3월 4일 마침내 선거법, 정치자금법, 지방자치법 개정 등 3대 정치개혁관련 법안을 만들었다.
새로 제정된 ‘공직선거 및 부정선거방지법 (’통합선거법‘)’은 대통령, 국회의원, 지방선거법을 하나로 통합하고 선거별 법정비용을 제한하고 선거비용 국고지원 등 선거공영제를 강화하는 한편 불법 부정선거를 한 후보와 관계자들의 연대책임 등 벌칙을 강화했다. 선거운동방식도 대폭적으로 자유화하고 TV토론제도를 도입 정책토론을 활성화시켰다. ‘정치자금법’을 개정하여 후원회제도를 확대하고 정치자금을 양성화하였으며 정당에 대한 국고보조금지원을 확대 했다. ‘지방자치법’을 개정하여 기초 및 광역자치단체장과 의원을 뽑는 선거를 통합하여 1995년 6월 27일을 지방선거일로 확정하였다.
YS의 3대 정치개혁에 대해 당시 여당은 ‘여당 프리미엄’을 없애는 것이라며 반발했지만 YS는 당파적 이해를 떠나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제도적 공고화를 위해서는 독재시대의 유산인 금권선거와 관권선거을 청산해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여야를 설득했고 마침내 관철시켰다. YS는 당파적 유불리를 따지는 진영논리를 떠나 지금은 상식이 된 우리나라 현대 민주정치의 기본 틀과 민주정치의 게임 룰을 설계하고 실천한 진정한 개혁적 보수 정치인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YS는 보수진영의 거센 반대를 무릅쓰고 ‘역사바로세우기’를 통해 대한민국은 상해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 받았음을 분명히 하고, 1995년 광복 50주년을 기하여 대한민국의 심장을 누르고 있었던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는 대 용단을 내렸다. 1993년 4월 19일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4.19묘소를 참배하고 4.19학생의거를 ‘4.19민주혁명’으로 격상시키고 묘역성역화를 통해 4.19의 역사적 의미를 재평가 했다. 5.16은 ‘군사쿠데타’로, 12.12는 ‘하극상에 의한 군사 쿠데타적 사건’으로, 그리고 5.18은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재평가하고 5.18묘역의 성역화를 추진했다. 1995년 10월 19일 박계동의 ‘노태우비자금 폭로사건’을 계기로 ‘5.18특별법’을 제정하여 전두환 노태우를 구속하고 12.12군사반란과 5.18광주민주화운동당시 시민학살에 대한 책임을 물어 단죄하여 ‘성공한 쿠데타도 반드시 처벌 된다’고 대한민국 현대사를 새로 정립했다.
‘반YS(개혁)세력’의 등장과 ‘수구적 보수’로 회귀
YS개혁은 정치개혁에서 군부개혁으로 다시 정부개혁, 경제개혁, 농정개혁, 교육개혁, 노동개혁, 금융개혁 등으로 국정전반으로 이어졌다. YS개혁으로 기득권을 박탈당한 사람들은 비단 정치인들만이 아니었다. 지난 32년간 군부독재체제 속에서 이해관계를 맺고 기득권이 된 TK 보수진영이 직격탄을 맞았다. 이러한 보수진영의 개혁에 대한 불만과 저항은 ‘개혁 피로감’이란 말로 사회적으로 확산되어나갔다. YS개혁에 환호했던 언론들도 차츰 YS개혁을 ‘YS 원맨쇼’로 희화화하기 시작했다. YS개혁이 국민적 합의를 위한 절차적 민주주의를 무시하고 권위적이고 강압적이라며 ‘YS 문민독재’란 말도 나왔다. 반YS세력은 YS가 임기 말 5년차에 레임덕으로 힘이 빠지기 시작하자 YS에 대해 총공세를 펼치기 시작했다.
YS는 반격의 기회를 노리는 반개혁세력에게 빌미를 제공하는 중대한 정치적 실수를 저질렀다. 1996년 말 ‘노동법날치기통과’였다. 1997년 새해를 맞이하면서 YS는 노동계의 총파업에 직면하게 되었고 정치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더욱 치명적인 것은 한보사태 발생과 차남비리의혹사건이었다. YS는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정치폭력의 집중포화를 받았다. 신한국당은 YS와 반YS세력 간의 치열한 당권사움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1997년 대선후보경선과정에서 TK의 지지를 받은 이회창이 대선후보로 선출되면서 YS의 당내 입지는 위협받기 시작했다.
YS개혁으로 위축되어 당내 비주류로 숨죽이고 있던 TK중심의 수구적 기득권 세력들은 이회창을 업고 반YS세력을 구축하고 YS를 중심으로 한 개혁적 민주세력에 대한 반격을 가하면서 신한국당은 사실상 내분으로 분당사태를 맞이하게 되었다. 결국 이인제를 중심으로 YS계 인사들의 탈당이 일어났고 새로운 당을 창당하거나 DJ당으로 옮기는 등 각자도생의 길을 찾아 나섰다. 당에 잔류한 민주계 인사들은 대부분 비주류가 되었다. 결국 YS도 당에서 자신이 정계에 입문시킨 이회창에게 당권을 내주고 축출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임기 말 5년차를 맞이하여 서산의 지는 해가 된 고립무원의 YS는 5년 단임제 대통령이 임기 말에 겪어야하는 여야의 무차별 정치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5년제 단임제하의 모든 대통령에 불명예스럽게 임기를 마감하는 것은 여야 대권후보들의 협공을 받고 모든 실책과 비난을 떠안는 속죄양의 신세가 되어야만하기 때문이다.
당권을 장악한 이회창과 TK세력은 1997년 대선을 앞두고 당명을 ‘한나라라’(1997.11)으로 바꾸고 대선 막바지에는 TK지역에서 YS허수아비를 만들어 불태우는 등 반YS 감정을 드러내며 본격적으로 ‘YS지우기’에 나섰고 수구적 보수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회창은 TK의 지지를 얻기 위해 대선을 불과 10여일 앞둔 1997년 12월 2일 박근혜를 찾아가 지지선언을 부탁하며 잠자는 박정희를 다시 깨워 정치판으로 끌어냈다. 박근혜는 이회창의 권유로 한나라당에 입당했고, 1998년 4월 대구 달성군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면서 정치에 입문했다. 1997년 대선실패로 야당이 된 한나라당은 박세직, 권정달 등 YS개혁으로 정치적 타격을 받았던 TK인사 영입에 적극 나섰고 더욱더 TK당으로 변모해 갔으며, 당내 비주류인 민주계는 DJ가 제시한 ‘민주대연합’이라는 명분을 쫓아 대거 한나라당을 탈당 했다. 2002년 대선실패로 이회창이 정계를 은퇴하면서 당권은 박근혜를 앞세운 TK계가 장악했고 김부겸, 김영춘, 이부영, 이우재 등 진보성향의 인사들이 대거 한나라당을 탈당했다. 10년 야당생활 끝에 정권교체의 가능성이 커진 한나라당은 2007년 대권경쟁에 YS의 지지를 받은 MB가 대권을 잡으면서 친이계와 친박계간의 치열한 당권싸움이 벌어졌고 친박 세력이 밀렸으나 MB의 권력약화로 마침내 박근혜를 앞세운 TK세력이 당을 완전히 장악하고 당명도 ‘새누리당’(2012.1)으로 바꾸었다. 이후 대권마저 거머쥐면서 박통과 친박세력은 박정희 독재시대의 권위적 통치를 복원하는 등 새누리당을 박근혜 사당으로 전락시키면서 역사의 역주행을 시작했고, 시대와 소통하지 못하고 결국 오늘과 같은 시대착오적인 박통국정농단사태를 가져왔고 보수진영의 궤멸을 자초했다. 급기야 새누리당 내에 비주류로 남아있던 개혁적 보수를 지향하는 세력들마저 탈당하여 ‘바른정당’(2017. 1)을 창당하면서 새누리당은 사실상 3당 합당이전의 민주정의당처럼 극우적 수구 보수집단으로 남게 되었다. 일부언론들이 새누리당의 뿌리가 YS의 ‘3당 합당’에 있고 YS와 신한국당을 마치 박통과 새누리당으로 대표되는 극우적, 수구보수의 원조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역사해석이고 역사왜곡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마디로 대한민국 보수는 YS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제도적 공고화를 위해 추진했던 변화와 개혁의 수많은 업적을 자랑과 긍지로 여기고 계승 발전시키기 보다는 오히려 반개혁세력이 되어 YS를 폄하하고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면서 오늘의 위기를 자초했다. 특히 1997년 ‘환란’이 YS문민개혁을 뒤덮으면서 YS는 보수와 진보 여야 정치인과 국민 모두로부터 비판을 받게 되었다. 그가 이룩한 수많은 개혁의 성과들은 빛을 잃고 역사의 어둠속으로 사라지고 잊혀졌다. 그러나 대한민국 현대정치경제의 기본 틀과 룰은 물론 대한민국 현대정치사의 재정립도 대부분 YS개혁의 유산이라는 역사적 사실까지를 지워버릴 수는 없다. 언젠가는 YS개혁으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으로 새로 거듭 태어났다는 역사적 평가를 받게 될 것으로 확신한다. 1990년 3당 합당이후 27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새누리당 친박의 중심에 서있는 서청원을 비롯한 김문수, 이인제, 그리고 개혁적 보수를 외치며 반박을 이끌고 새누리당를 탈당 하여 ‘바른정당’을 만든 김무성, 정병국 등이 모두 한 때는 YS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YS를 보면 길이 보인다.
2017년 대한민국의 보수가 살아남는 길은 YS와 같은 개혁의 리더십을 가진 진보의 피를 수혈하는 결단을 내리고 개혁적/진보적 보수로 환골탈태한 것 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어 보인다. 지난 27년간 보수가 대한민국 정치의 중심에 설수 있었던 것은 YS이후 때때로 진보적 개혁인사들을 적극적으로 영입 새 피를 수혈하면서 보수진영내부에 수구파와 개혁파들이 당권경쟁을 하면서 ‘긴장의 균형’을 유지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긴장의 균형’이 깨지고 수구세력이 당을 점령하면 당은 위험에 빠졌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개혁적 보수를 선언한 바른 정당은 합리적, 중도적 진보인사의 영입은 물론 야권이나 제3지대의 정치세력들과 적극적인 정치적 연대를 통해 정치적 지형을 넓히고 건강한 보수로 거듭나 보수의 중심에 서게 되면 다시 보수대연합을 이룰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2017년의 시대정신인 87체제 30년간의 ‘5년 단임 대통령제의 실패’로 인한 제왕적 대통령제와 권위적 국가운영시스템을 개혁하기 위한 정치체제와 정부혁신과 지방혁신, 그리고 시장경제혁신, 교육혁신 등 국가혁신에 나서야 하고, 이를 위한 헌법 개정에 앞장서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그동안 경험해 보지 못한 북핵을 둘러싼 안보위협과 외교 갈등, 초고령 저출산 사회의 인구절벽의 위험, 사회적 불평등과 이중화로 인한 세대 간 지역 간 갈등 등 어려운 도전에 직면해 있고 국민들은 미래 불안에 빠져있다. 이러한 세기적 도전에 맞서기 위해 1948년 대한민국 수립이후 지난 70여 년간 지켜온 대한민국의 헌법적 가치, 예를 들면 “인간의 존엄성,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주의, 법치주의, 그리고 세계평화주의”를 더욱 굳건히 다지면서 “21세기 초세계화, 초정보화, 4차 산업혁명, 그리고 지구온난화와 에너지, 식량 등 생태적 위기 등과 같은 급격한 기술혁신과 변화에 대응하는 새로운 국가발전 패러다임을 구축해야 한다. 그리고 진정한 개혁적 보수로서 대한민국의 국가발전목표를 세계국가와 통일에 두고 우리사회에 만연되어 구조화 된 불평등, 불공정과 반칙의 잘못된 관행을 혁파하고 바로잡아 ‘공의’를 바로세우는 제도혁신과 교육혁신에 앞장서야 한다. 그래서 대한민국 가치를 지켜 국민들에게 미래에 대한 안정과 더 나은 내일에 대한 희망을 되찾아 주어야 한다. 그리고 대한민국정치가 과도하게 진보로, 혹은 좌경화로 흐르는 것을 막고 균형을 잡아주는 쐐기가 되고 지렛대가 되어야 한다.
김정남(‘이 사람을 보라-인물로 보는 한국 민주화 운동사 2’, 2016)은 YS에 대해 “한국 민주주의에서 그는 민주주의의 길을 내고,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고,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위험과 장애를 제거하고 뿌리쳐 준, 한국 민주화의 원훈이었다. 한국 민주주의는 그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라고 평가했다. 이어서 그는 “YS를 너무 가까이서, 너무 오래보다 보니, 그의 단순함이나 실수까지도 나의 눈엔 인간적이어서, 나는 차마 그를 욕할 수도 미워할 수도 없다”고 그의 책에 그렇게 적었다. 나의 마음을 그대로 적은 듯하다. 그는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제 살을 도려내고 제 뼈를 깎으며 진정한 ‘변화와 개혁의 길’을 걸은 대도무문(大道無門)의 개혁적 보수의 참 모습을 보여준 정치인이었다. 그의 실수들로 그의 큰 업적을 덮으려하는 것은 역사에 죄를 짓는 일이다. 이제라도 정체성 위기에 빠져 갈 길을 못 찾고 있는 대한민국 보수는 거산(巨山) 김영삼의 족적을 보고 진정한 개혁적 보수의 길이 어떤 길인가를 성찰해야한다. 거산에 오르면 보수의 길이 보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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