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찬동의 문화시평 <7> 한국의 미술상과 ‘박서보 예술상’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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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대표적인 미술상으로는 일제 강점기의 조선미술전람회를 계승한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國展>)를 꼽을 수 있다. 국전은 1949년 이래 국가가 주최해온 관전으로 오랫동안 명실상부한 신인 등용문으로 미술계의 제도적 정점으로 자리했다. 1960년대 이후에는 추상미술과 실험미술들을 수용하기 위해 신문사 주최의 다양한 민전이 등장하였다.
이후 국전 역시 반관반민의 기구인 문예진흥원이 주관함으로 그 권위와 영향력이 다소 경감되었지만, 1980년대 중반까지도 그 권위와 명성은 한국미술의 절대적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1986년 이후 미술협회로 이관되어 완전 민간공모전이 되면서 잦은 심사 비리 등으로 과거의 명성은 급속히 약화되었다.
민간 공모전의 시대를 맞아 관전의 획일적 틀에서 벗어나 다원적인 가치가 존중되기 시작하였다. 90년대 이후에는 공모전을 탈피한 기획전과 초대전 등 다양한 등단 루트가 개발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다양한 미술상들이 제정되어 작가역량의 검증 기제로 작용하고 있다.
현재 국내에는 대략 국가기관, 지방자치단체, 각종 언론매체, 각종 미술단체, 미술관, 미술잡지 등이 운영 주체로 참여하는 다양한 유형의 수상 제도가 운영되고 있고, 그 수도 이루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수상 제도가 많다는 것 자체가 문제될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너무 상업적이거나 방만하게 운영되고, 사실상 나눠먹기식으로 운영되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상은 분명한 성격과 공정하고 투명한 원칙에 의해 운영될 때 그 권위를 인정받는 것이며, 이러한 권위를 상실할 때 존재 이유와 가치가 상실됨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러한 미술상들 중에는 유명 작가의 이름을 가진 것들도 다수 운영된다. 이는 작가의 작품세계를 기리는 의미를 가지며, 수상자들에게는 하나의 커다란 명예가 되기도 한다. 대표적인 것들로는 이중섭, 박수근, 김종영, 이인성, 오지호, 백남준 미술상 등이 있고 이외에도 석남미술상, 석주예술상 등 작가나 평론가의 호를 딴 미술상들이 존재한다. 이 상의 주관자들은 작고 작가나, 언론사, 재단 등이 주축을 이룬다. 그러나 이러한 상들이 지속적으로 그 명성과 권위를 유지하기는 그리 쉽지 않다. 재정적인 문제는 물론, 제정될 당시의 초심을 잃고 운영과 심사의 투명성이나 공정성을 상실함으로써 퇴색되거나 폐지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최근 《2023 광주비엔날레》에 ‘박서보 예술상’이 제정되어 첫 수상자를 선정 시상했다. 이를 둘러싸고 현장에서는 상의 철회를 주장하는 1인 시위가 열리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요지인즉, 80년 광주의 민주화 운동과 결부된 광주 정신의 소산인 비엔날레의 성격과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작가의 이름을 딴 상의 제정이 부당하다는 것이다. 작가 박서보는 후학들을 위해 자신이 설립한 비영리재단인 ‘기지재단’ 명의로 광주비엔날레에 10억 원의 기금을 기부했고, 이를 통해 제정된 ‘박서보 예술상’을 통해 광주비엔날레 개최 때마다 향후 20년간 작가 1인을 선정 1억 원의 상금을 주도록 했다.
지역예술인들에 의해 비롯된 이 상의 부적절성에 대한 논란은 타지역 예술가들에게까지 번져 1인 시위는 지속되고 있다. 시위자들은 광주비엔날레 측이 즉각 이 상을 철회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반(反)국전을 선언하기도 했던 박서보 작가는 이러한 시위 사태에 대해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시위자들의 주장에 대해 변화된 시대에 맞지 않는 논리의 빈약함을 강변하기도 했다.
작가 이름의 미술상은 주로 미술계에 뚜렷한 업적을 남긴 작가가 별세한 후 유족·후배들이 고인의 뜻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생존해 있는 원로들이 후배들을 격려하기 위해 마련한 것들도 있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 아무리 선의를 가진 것이라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자칫 생존작가 스스로가 자신의 명예를 높이는 꼴이 되어 바람직하진 않다. 실제로 생존작가가 자신의 이름을 가진 상을 제정하여 자신의 제자들이나 자신의 작가론을 헌사한 이론가들에게 상을 줌으로써 결과적으로 자신을 위한 상으로 전락하는 맹랑한 경우도 있다.
주최측은 후배 작가들을 격려하고 지원함으로써 비엔날레가 더욱 발전하는 기틀을 만들기 위한 순수한 의도를 가진 것이라고 하지만 ‘박서보 예술상’ 역시 그 선의를 오해받을 소지가 높다. 심한 경우, 상대적으로 국제적 지명도가 높은 광주비엔날레라는 플랫폼을 활용하여 자신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고자 하는 의도가 담긴 것 아닌가 하는 원색적인 오해도 불러올 수 있다. 때문에 이 사안은 좀 더 신중히 결정했어야 할 문제이다. 물론, 광주 정신에 위배를 주장하는 논의에 대해서는 또 다른 논쟁의 여지가 있다. 광주 정신의 정체성 문제와 관련하여 계속 민주화에만 머물 수 없으며 미래지향적으로 지경을 어떻게 넓혀가야 할 것인가의 과제를 풀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몇 년 전 사석에서 박서보 작가에게 본인을 비롯하여 이우환,김창열 등 원로 선배 작가들이 어려운 후배들을 위한 창작 기금을 조성하는 등 선례를 보여줄 것을 제안한 바 있다. 물론 그것 때문이라 생각하지 않지만, 작가는 후학들을 위한 장학재단을 조성하고 미술상을 위해 기금을 기부했다. 그 선의는 후학들에게도 충분한 귀감이 될 것이다. 하지만, 생전에 본인이 직접 이런 상을 제정하는 것은 자신의 미술관을 짓는 것만큼이나 어색해 보인다. 이왕이면 자신의 이름을 사용토록 하는 조건 없이 순수하게 기금을 쾌척하는 편이 훨씬 더 멋진 결정이 아니었을까?
굳이 자신의 이름으로 상을 제정하길 원했다면 ‘기지 재단’에서 직접 상을 제정하고 운영하는 방안이 더 좋았을 것이다. 모든 상은 초기에 엄정하게 운영하여 그 정체성과 기틀을 잡는 것이 필요한데, 현재와 같이 이름만 사용하는 조건으로 광주비엔날레 측에 운영을 맡기는 것은 상의 정체성을 명확히 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 작가는 상의 첫 수상자로 한국 여성작가가 선정되어 다행이라 했지만, 수상자 선정의 적절성 여부에도 그리 좋은 여론이 아닌 것을 보면 출발부터 성공적이진 못한 것 같다.
어쨌든 행사의 본질인 《광주비엔날레》 자체보다도 ‘박서보 예술상’이 더 뉴스의 초점을 모은 일은 진영논리나 정치적 시시비비를 떠나 미술계에 더 바람직한 상이 제정되기를 원하는 미술계의 열망임에 틀림없다. 또한 상의 제정과 운영을 둘러싼 윤리성 담론이 제기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재차 강조되는 이야기지만, 상이 권위를 가지려면 시대에 부합되는 분명한 명분과 불필요한 오해의 소지를 없애야 한다.
금번 ‘박서보 예술상’에 관한 논의가 어떻게 마무리될지는 미지수이다. 이미 제정된 상을 취소하거나 철회할 수 없다면, 상의 명칭에서 자신의 이름을 들어내는 방법은 어떨까? 그리고 가능할지 모르지만 이와는 별도로 자신의 사후 제대로된 목표와 운영방식을 갖춘 국제적 성격의 상을 준비하는 것은 어떨까? 이것이 그동안 이룩해온 작가의 이미지를 훼손시키지 않는 길이며 작가의 정신을 살리는 길이 아닐까? 작가는 평생 추구해온 단색화의 본질에 대해 자신을 비우는 무아의 경지라고 천명해오지 않았던가? 광주비엔날레 측과 ‘기지재단’의 기지를 기대해 본다.
<ifs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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