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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과거에 갇히는가?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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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9년07월21일 17시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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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진석
  • 전 한국의희망 상임대표, KAIST 김재철AI대학원 초빙석학교수,(사)새말새몸짓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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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과거에 갇히는가? 실력이 과거를 어루만지는 것 이상을 할 정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거에 갇히면 망하고, 미래로 나아가면 흥 한다. 과거에 갇힌 사람이나 사회는 멈춰서고, 미래를 여는 사람들은 그냥 앞으로 나아간다.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가운데 과거가 제대로 정리되지 않고 어떻게 미래가 열릴 수 있느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대개 평생을 과거만 정리하다가 보낼 가능성이 클 뿐만 아니라 사실은 미래를 열 생각도 없다.

 과거로 미래의 발목을 잡느냐, 미래를 위해 과거를 연료로 사용하느냐 하는 태도는 매우 다르다. 몸 자체가 과거로 기울어진 상태에서 말하는 미래는 다 입에 발린 말이고 허구이다. 매우 드물겠지만, 어떤 이치로 그러냐고 묻는 사람이 있기도 할 것이다. 사실 이 정도의 말은 가장 당연한 말 가운데 하나여서 증명할 필요가 없다. 그래도 서운해 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해서 아주 간단하게라도 한 마디 붙인다면, 세계가 변하기 때문이다. 변하는 세계에 맞추면 흥하고, 거기에 못 맞추면 망한다. 변화에 맞추려면 흐름을 따라 나아가야 하고, 변화에 맞출 능력이 없거나 그것이 싫으면 그냥 멈춰 있는 수밖에 없다. 맞춰줘야 할 세계는 실재이자, 현실이자, 실질이다. 세계에 맞추지 않는 사람들은 대개 자기가 가지고 있는 틀을 고집하는데, 그것은 명분의 범위 안에 든다. 명분에 집착한다는 말은 과거 지향적이라는 뜻이다. 실질을 소중하게 다뤄야 미래 지향적일 수 있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문명의 단계가 아직은 ‘종속적’

 

우리는 명분과 과거에 묶여 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문명의 단계가 아직 종속적이라는 것이 근본적인 원인일 수 있다. 우리 삶을 채우고 있는 물건과 제도 가운데 우리가 만들기 시작한 것은 거의 없다. 다른 문화권에서 만들기 시작한 것을 들여와서 쓰고 있다. 총체적으로 말했을 때, 우리는 지식 생산국이 아니라 지식 수입국이다. 지식은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고 관리하고 통제하기 위해서 만든 가장 고효율의 추상 장치이다.

 지식을 수입한다는 말은 세계에 대하여 반응하는 체계적 방식 자체를 수입한다는 말이 된다. 지식 생산의 모습은 책에 나오는 원리나 공식 등의 지적 체계로만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이 세계에 등장하는 새로운 사태에 대한 개념화, 예를 들면 ‘워라벨’, ‘오타쿠’, ‘4차산업혁명’, ‘X세대’, ‘Z세대’, ‘소확행’ 등도 지적 생산력의 표현들이다. 

물건의 창의적 제작 과정도 이와 다르지 않다. 제도를 최초로 출현시키는 일도 이와 같다. 우리는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이후에는 이런 일을 해본 적이 없다. 지금도 우리는 남들이 해 놓은 개념화의 결과들을 들여와서 쓰고 있을 뿐이다. 아직 종속적이라는 뜻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새로운 것들은 다 불편함이나 문제를 해결한 결과들이다. 지식도 그러하다. 고로 새로운 것을 생산해서 앞서고 싶은 생각이 있다면, 먼저 불편함이나 문제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덤벼야 한다. 별로 어려워 보이지 않지만, 인간에게 가장 수준 높은 일 가운데 하나가 불편함을 느끼고 문제를 발견하는 일일 것이다. 불편함이나 문제를 발견할 때 인간이 하는 최초의 지적 활동이 질문이다. 불편함이나 문제를 해결한 결과를 숙지하는 것에 익숙한 사람은 자신의 지적 활동을 대부분 대답으로 채운다. 

 

내가 자주 한 말이지만, 논의를 조금이라도 더 탄탄히 하기 위해서 덧붙여 말한다. 대답은 이미 있는 이론과 지식을 그대로 먹어서 누가 요구할 때 뱉어내는 일이다. 이때 가장 중시되는 일은 누가 더 빨리 뱉어내는가, 누가 더 많이 뱉어내는가, 누가 더 ‘원래 모습’ 그대로 뱉어내는가이다. 

대답이라는 활동이 가장 높은 단계에서 제도적으로 운용된 것이 고시(高試)일 것이다. 대답의 최상위 전문가들이다. 여기서 급소는 ‘원래 모습’이다. ‘원래 모습’을 시제로 따지면 현재나 미래가 아니라 과거이다. 그래서 대답은 어쩔 수 없이 과거를 어루만지는 일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다 보니, 대답에 익숙하도록 훈련된 사람들은 미래보다는 과거를 살게 된다. 대답에 익숙하도록 훈련된 인재들이 채우는 사회의 거의 모든 논쟁이 다 과거 논쟁으로 빠지는 이유이다.

 과거를 한 점 오류 없이 철저히 따져야 진실하게 사는 생각이 들도록 훈련되어 있기 때문에 입으로는 미래를 말하면서도 몸은 정작 과거에 붙어있다. 또 ‘원래 모습’은 기준으로 작용한다. 그러므로 기준에 맞으면 선(善)이라 하고, 기준에 맞지 않으면 악(惡)이라 한다. 그래서 대답에 익숙하도록 훈련된 사람들로 채워진 사회의 거의 모든 논쟁은 다 선악 논쟁이다. 

 

진위와 선악논쟁으로 가득 찬 우리 사회, 미래 궁금증이나 호기심에는 ‘미숙’

 

우리가 도덕과 명분에 갇힌 이유도 우리 영혼을 이런 식으로 훈련해서이다. 또 ‘원래 모습’은 기준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원래 모습’에 맞으면 참[眞]이고 맞지 않으며 거짓[僞]이다. 당연히 대답에 익숙하도록 훈련된 인재들로 채워진 사회의 거의 모든 논쟁은 ‘옳으냐, 그르냐’를 제일 중요한 위치에 놓고 따지는 진위 논쟁으로 흐른다. 각자 자기만의 정의에 갇혀서 상대방을 적대시하며 극단적인 분열을 겪고 있는 우리 사회의 모습이 이와 관련이 없지 않다. 우리 사회의 거의 모든 논쟁이 진위 논쟁이자, 선악 논쟁이며, 총체적으로 과거 논쟁인 이유는 우리가 대답으로만 양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세계에 출현하는 새로운 것, 위대한 것 가운데 진위 논쟁을 거치거나 선악 논쟁을 거쳐서 나온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어떤 물건이나 제도나 사상이거나 간에 옳다는 이유나 선하다는 이유로 등장한 것은 없다. 문제나 불편함을 해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해서 나올 뿐이다. 진위 논쟁이나 선악 논쟁은 과거를 따지고 지키는 데에는 효과적이지만, 미래를 여는 일에는 과거를 지킬 때만큼 효과적이지 않다.

 

미래를 여는 지적 활동은 질문이다. 질문은 내 안에 있는 궁금증과 호기심이 안에 머물지 못하고 밖으로 튀어나오는 일이다. 그런데 궁금증과 호기심은 이 세계의 어느 누구와도 공유되지 않는다. 자기에게만 있는 매우 비밀스럽고 사적인 것이다. 그래서 질문하는 인간, 즉 궁금증과 호기심을 발동하는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만 있는 것을 근거로 활동하기 때문에 ‘독립적 주체’라는 호칭을 얻는다. 세계를 앞서서 이끄는 선도자 역할은 다 이런 독립적 주체들이 독점한다. 궁금증과 호기심은 이미 있는 것을 밟고 서서 아직 드러나지 않는 것, 아직 오지 않은 것, 아직 해석되지 않은 것을 알거나 가지려고 도모하는 일이기 때문에 개방적이고, 확장적이며, 미래적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미래적이지 않다면, 궁금증이나 호기심을 발동하는 데에 아직 미숙하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모든 발전은 ‘현재’의 ‘다음’ 단계를 궁금해 하고 꿈꾸다가 거기에 몰입하면서 이뤄진다.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기적적인 발전을 이룬 나라이다. 그렇다면, 긴 시간 동안 ‘다음’을 향한 궁금증과 호기심을 발동하고 그것을 구현했다고 봐야 한다. 해방이라는 ‘현재’에 서서는 ‘건국’이나 ‘정부 수립’이라는 ‘다음’을 꿈꿨고 그것을 완수했다. 완수된 다음에는 ‘건국’이나 ‘정부 수립’이 ‘현재’가 되었다. 그 새로운 ‘현재’에 서서는 또 그 다음의 미래인 ‘산업화’를 꿈꿨고 또 그것도 완수했다. ‘산업화’가 ‘현재’로 등장하자 거기서는 또 그 다음의 ‘민주화’를 꿈꿨다. 민주화도 완수하였다. 이처럼 ‘다음’이 바로 미래이다. ‘다음’을 완수해가며 우리는 착실히 미래를 연 것이다. 여기까지가 우리의 발전 맥락이다. 

표현을 바꿔보자. ‘산업화’는 ‘건국’과 ‘정부 수립’을 과거로 만들었고, ‘민주화’는 ‘산업화’를 과거로 만들었다. 그러면서 ‘미래’를 단계적으로 소유하게 되었다. 이것을 발전이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민주화’를 과거로 만들지 못하고 있다. 사실 ‘민주화’에 멈춰 있다. ‘민주화’를 과거로 만드는 일은 민주화 세력이 새 시대를 향해 스스로 각성하거나 새로운 아젠다로 무장한 새로운 세력이 등장하여 ‘민주화’ 세력을 과거로 만들 수 있어야 하는데, 지금 우리 형편으로는 두 가지 모두 매우 요원해 보인다.

 

‘민주화’라는 과거에 사로잡힌 권력층, ‘갤럭시S10을 들고 80년대 초반을 산다’

 

 다시 말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있는 모든 혼란과 답답함은 ‘민주화’라는 현재에 계속 멈춰 있으면서 ‘민주화’ ‘다음’의 새 시대를 맞이하지 못하고 있는 사실에 기인한다. ‘민주화’는 이미 과거이다. 발전하는 나라에서는 과거가 순조롭게 도태되는데, 우리는 아직 그런 일이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 ‘민주화’를 주도했던 세력들 가운데 일부가 권력을 장악하고 있고, 그러다보니 그 세계관에 여전히 갇혀 있다. 불행하게도 그들은 공부를 하지 않았고, 80년대 초반 논리에서 진화되지 않았다. 이념에 갇히면 사고력이 현저히 떨어지는데, 사고력 저하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은 것 같다. 우리의 권력층은 4차 산업 혁명 시대에 갤럭시S10을 들고 80년대 초반을 산다. 통탄해야 할 일이다.

 

그렇다면, 혹자는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겠다. 세종대왕 한글 창제 이후에 새로운 일들을 벌여본 적이 없다는 말과 어울리지 않은 것은 아닌가. 우리는 단계별로 ‘다음’ 즉 ‘미래’를 열어 본 적이 있고, 그것을 기적이라고 하지 않은가. 일정 부분은 맞다. 그러나 우리가 열어본 적이 있다고 말했던 ‘미래’는 우리보다 앞서서 다른 나라들이 먼저 열어 본 것들이다. 다른 나라들이 했던 일을 따라서 잘 이룬 것도 물론 위대하지만, ‘민주화’ 다음의 미래는 이제 우리의 힘만으로 열어야 한다. 민주화 다음은 ‘선진화’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선진화는 창의적 활동이 이끄는 단계이다. 창의적 활동은 독립적 주체만 할 수 있다. 우리는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인격의 한 형상이다. 대답하는 실력으로는 민주화 단계까지도 가능하지만, 민주화 다음 단계는 질문하는 능력이 필수가 된다. 이제 정말 우리의 실력을 발휘하고, 또 그것을 증명해야 하는 때가 왔다. 이 사실을 깊이 깨닫지 못하면, 민주화를 이룬 경험으로만 살려 할 것이다. 물론 지금까지는 그렇게 살고 있다.

 

어느 한 진영에서 ‘이것이 나라냐?’라고 하면서 자칭 혁명을 했다. 하지만, 분명히 혁명은 아니다. 바뀐 것이 없기 때문이다. 혁명도 아닌 것을 혁명이라고 자칭하면서 실제로는 미숙하게 우왕좌왕하는 것을 보고, ‘이것이 나라냐?’라는 소리를 들으며 밀려났던 쪽에서는 다시 ‘이것은 나라냐?’라고 반격한다. 대한민국의 슬픔은 어느 진영도 ‘미래’를 말하는 능력이 없다는 점이다. ‘이것이 나라냐?’라고 했던 진영과 ‘이것도 나라냐?’라고 하는 진영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 서로 같은 수준에서 다른 색깔의 옷을 걸치고 다른 색깔의 스피커를 틀었을 뿐이다. ‘이것은 나라냐?’라고 하는 쪽이나 ‘이것도 나라냐?’라고 하는 쪽이 모두 ‘과거’를 지키는 일 외에는 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대답하는 훈련만 하면 진위를 따지는 명분이나 선악을 따지는 도덕 감성에 갇힌다. 이것들은 영혼을 과거에 맡긴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대표적인 특성이다. 그러면서 사실을 자세히 보는 능력을 기르지 못한다. 세계를 ‘보여 지는 사실 그대로’ 보지 못하고, 보고 싶은 대로 보거나 봐야 하는 대로만 본다. 과거에 갇히면 도덕과 명분이 앞서게 되어 사실을 볼 수 없게 되는 것이 큰 부작용이다. 효율성이 떨어지고 있는데도, 자기만의 방식으로 해석하여 문제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세금을 풀어 문제를 해결하려다가 망한 나라들이 우리 앞에 이미 즐비하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그대로 따라간다. 우리만은 아무 일 없을 것이라고 의식을 조작하는 확신범이 된다. 치욕을 당하고 무시를 당하는 것인데도 그것을 치욕이나 무시당한 것으로 보지 않고, 굴종을 굴종으로 보지 않고, 진실을 위해 감당하는 고난으로 간주한다. 

사실과 동떨어진 말을 하고도 알아채려 하지 않는다. 사실과 동떨어진 말을 했다고 비판해도 상관하지 않는다. 자신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야 더 진실하게 사는 착각이 들도록 훈련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라나 기업이나 망할 줄 모르고 망한 경우는 없다. 망해가는 것을 보면서 망해간다”

 

갖추고 있는 실력이 그러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이 비극인 것이다. 나라나 기업이나 망할 줄 모르다가 졸지에 망한 경우는 거의 없다. 망해가는 줄 알고, 심지어는 망해가는 것을 보면서 망해간다. 다만 어찌할 수 없을 뿐이다. 그래서 다산이 “이 나라는 털끝 하나인들 병들지 않은 게 없다. 지금 당장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는 반드시 망하고 말 것이다.”라고 경고하였지만, 70여 년 만에 나라는 망했다. 조선의 실력은 경고를 듣고 개선에 나설 정도가 못 되었던 것이다. 지금 우리도 사실은 이 지경에 이르렀다. 보지 않고 듣지 않을 뿐이다. 일은 실력 이상의 결과로 나올 수 없기 때문에 설령 알았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장자라는 철학자는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죽음에 가까울 정도로 굳고 딱딱해진 마음은 다시 생기를 회복하지 못한다.”(近死之心, 莫使復陽也. 『莊子 · 齊物論』) 우리네의 마음들은 굳기가 지금 어느 정도일까? 과거에 갇힌 사람들에게 더 슬픈 일은 자기를 가둔 과거가 점점 자신의 자각 능력이나 각성 능력을 갉아먹는다는 것이다. 낡은 말과 낡은 태도를 극복하고 <새말 새몸짓>으로 무장하는 일을 서두르고 더욱 철저히 해야 하는 이유이다. <ifs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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