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즈벨트의 뉴딜과 한국판 뉴딜정책 (2) 미국의 성공과 실패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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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루즈벨트의 뉴딜 정책 ; 성공과 실패
루즈벨트 대통령은 미국이 세계 최강국으로 부상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가장 명예로운 일로 여겨질 만하다. 루즈벨트에 대한 이러한 평가를 기초로 그의 트레이드 마크라 할 수 있는 뉴딜정책도 대체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미국의 국격 상승 배경 요인을 전적으로 뉴딜정책에서 찾는 것은 뉴딜 정책에 대한 오해를 야기할 수 있다. 최근에도 위기 때마다 새로운 형태의 뉴딜정책을 추진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러한 오해에서 출발하는지도 모르겠다. 뉴딜정책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위하여 루즈벨트 대통령의 뉴딜정책을 성공한 요소(긍정적인 측면)와 실패한 요소(부정적인 측면)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하자.
결론적으로 얘기하면 경제적 측면에서 뉴딜정책은 대체적으로 실패하였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사회 정치적 차원에서는 대단한 성공을 거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 성공적 측면 >
먼저 뉴딜정책은 미국 국민을 일치 단결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당시 미국 국민들은 뉴딜 정책을 통해 역사상 처음으로 국가가 개개인의 일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그 해결을 위해 노력하였다는 점을 대단히 높게 평가하였다. 대공황의 여파가 나라 전역을 휩쓸 당시에 뉴딜정책을 통해 보여준 대통령의 국민에 대한 애틋한 관심과 약자를 보호코자 하는 자비로움 등은 자유방임 상태에서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감정적 유대감을 통해 국민들은 정부를 중심으로 단결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할 무렵에도 경제가 부진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하지만 국민적 단결을 바탕으로 대규모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그 국민적 단결을 형성시키는 계기는 뉴딜에서 연유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정부가 국민들의 어려움을 인식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고 경제상황이나 정책 방향 등에 대해 진솔하게 정부의 생각을 전하는 세심함도 국가(정부)와 개별 경제주체간의 일체감을 상승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이러한 정책 기조는 국민들의 일체감을 조성한 데 더하여 시장기능을 보완하는 효과를 발휘하여 위기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즉 위기시에 개인 각자가 이기적 행동을 보임으로써 위기가 심화되었다 반면 뉴딜정책을 시행하면서 일종의 조정메커니즘(coordination mechanism)이 되살아나게 됨으로써 위기가 진정되었던 것이다. 많은 국민들이 금의 개인적 보유를 포기하고 은행에 맡겼고 예금 인출을 중단하고 현금을 은행에 저금하기 시작하는 데에는 정책결정자의 진솔한 정책 설명 등이 큰 기여를 하였다.
그리고 감정적인 측면에서도 뉴딜은 성공하였다고 볼 수 있다. 대공황의 악화로 대다수 국민들은 절망에 가까운 실망감에 휩싸여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뉴딜을 계기로 적어도 대공황이 악화되는 것은 막았다. 따라서 뉴딜정책으로 끝 모를 나락으로 추락하고 있던 나라가 회복하였다고 믿을 여지가 많았다. 이런 점에서 국민들의 자긍심을 회복시키는 감정적 측면도 뉴딜정책이 가져온 긍정적인 효과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뉴딜정책은 당시 전세계적으로 유행한 전체주의나 공산주의 물결로부터 미국을 지켜냈다는 점도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발전하는 방식을 새롭게 정립한 것도 중요한 의미라고 평가할 수 있다. 경제체제는 그 형태를 막론하고 위기 상황에 이를 수 있는 데 이 상황에서 난제를 슬기롭게 극복한다면 새로운 발전 기회를 맞이할 수 있다는 역사적 경험을 제공하였다.
뉴딜정책의 일환으로 도입된 여러 제도들이 현재까지도 유지되고 그 효력을 발휘함으로써 현대 자본주의의 기틀을 다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중앙은행 제도의 정비, 금융감독 체계 확립, 노사관계의 정립, 사회보장제도의 도입 등이 그것이다. 필요에 따라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거나 직접 사업을 영위하는 등 정부가 경제적 역할을 적극적으로 수행할 필요성도 증명하였다.
이와 같은 여러 차원에서 루즈벨트 대통령과 뉴딜정책은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게 일반적이다. 루즈벨트가 미국 역사상 전무후문하게 4번에 걸쳐 대통령에 당선되었던 것은 이러한 평가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 실패한 측면 >
뉴딜정책들의 구체적인 수단들을 효과 면에서 살펴보면 뉴딜이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GDP 자체가 전쟁 발발 이전에 이르러서도 1929년에 비해 크게 늘어나지 않은 데다 실업률은 계속 높은 수준을 유지하였다. 특히 기업 투자가 극히 부진한 것이 대공황이 길어지게 되는 결정적인 이유로 작용하였다.
초기 뉴딜정책 중 국가산업부흥법과 농업조정법은 전적으로 실패하였다. 쏘련식 경제정책운용 방식을 채택한 것이 그 원인이었다. 그리고 그릇된 이론이나 선입견에 입각하여 정책을 입안한 것도 문제였다. 이 법률들은 국가가 산업을 통제하는 방식을 채택함으로써 미국의 사정에 맞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선입견이나 그릇된 이론 등이 적용되었는데 과잉 생산으로 물가가 하락한다고 보았고 이를 시정하기 위해서는 생산량을 줄여야 한다고 보았다. 제품의 가격을 유지하거나 상승시키면 그 제품의 생산자는 소득 상승을 경험하게 될 것으로 예측하였다. 그리고 복잡한 경제현실을 감안하지 못하는 단순함도 문제였다. 한 산업에 대해 단일가격을 적용하였는데 이로 인해 대기업이나 업력이 오래된 기업이 매우 유리하였다. 이들의 생산규모는 효율적 생산 수준을 넘지만 신생기업이나 중소기업은 그 이하에 머무르기 때문이었다. 지리적 여건이나 환경 등을 고려하지 않은 채 단일 가격을 책정함으로써 원격지 기업이나 그 제품은 가격경쟁력 면에서 낙후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법률적으로도 위헌 판결을 받게 됨으로써 나중에는 효력이 정지되기에 이르렀다.
심지어는 잘못된 정책을 더욱 강화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하였다. 일종의 정책의 악순환이 발생하였다. 일반적으로 법이나 규제를 통한 정책은 그 효과가 제한적인 경우 더욱 강한 대책을 마련하여야 하는 속성이 있다. 이상적으로는 그 정책이 예상한 효과가 나지 않으면 그 원인을 다시 분석하고 새로운 차원의 대책을 강구하여야 한다. 하지만 루즈벨트 대통령 및 뉴딜러들은 독단적인 정책들을 더욱 강력하게 밀어붙이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산업부흥법(National Industrial Recovery Act)이 위헌 판결을 받게 되자 그에 포함되어 있던 노사관계조항을 더욱 발전시켜 일명 와그너 법인 노사관계법을 제정하였다. 이로 인해 노사관계가 더욱 악화되는 일이 초래되었다고 생산은 더욱 위축되기에 이르렀다.
뉴딜정책이 추진되는 동안 루즈벨트 대통령은 기업에 대한 혐오와 배척과 관련한 선입견을 버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민간 투자의 중요성 혹은 투자의 경제적 역할을 인식하지 못함으로써 실업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하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선입견은 정부가 모든 것을 행하여야 한다는 오류를 낳기도 하였다. 루즈벨트 정부는 정부조직을 계속적으로 확대하였는데 이는 모든 경제 문제를 정부가 직접 다루어야 한다는 사고를 반영한 것이었다. 이러한 정책 태도는 민간 활동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다만 전쟁이 발발함으로써 이 조직들이 나름대로 역할을 수행하는 효과를 보기는 하였다. 하지만 전쟁 이후 많은 정부 조직들이 뉴딜 이전으로 환원되었다.
루즈벨트 대통령이 뉴딜정책 집행과 관련하여 경직적인 반면 유연하지 못한 대응 자세는 문제였다고 볼 수 있다. 이 요인으로 인하여 역설적이게도 전쟁이 대공황을 종식시킨 이유가 되었다. 전쟁 발발 가능성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접하여 기업에 대한 정책기조를 변경하지 않을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던 것이다. 재정지출을 늘이고 기업들에 대한 억압이나 배제를 철폐하고 기업들이 전쟁물자의 생산에 참여하도록 유도하였다. 역설적으로는 뉴딜정책의 기조였던 친노동-반기업 정책을 포기함으로써 실제적으로 공황에서 벗어났던 것이다.
그 외에도 당시 보편적으로 수용되는 일종의 집단지성으로부터 연유한 오류도 많았다. 임금 수준을 유지하거나 인상을 통해 수요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후버나 루즈벨트 모두 같았다. 대공황이 시작되면서 기업들에게 임금을 인하하지 말도록 요구하였는데 루즈벨트도 이 기조를 유지하였다. 하지만 임금의 조정이 불가능해지면서 불황이 길어지고 나중에는 대규모 실업을 피하지 못하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적자 재정을 두려워한 것도 두 사람의 공통점이다. 적자 재정은 정부에 대한 신뢰를 잃게 하는 요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 사고방식으로 경기가 하락하는 상황에서 증세 조치를 취함으로써 경기 하강을 더욱 촉발하는 정책을 반복적으로 시행하였다. 1936년에도 이러한 정책으로 재차 불경기를 맞게 되었다.
거시경제라는 관점이 부족했던 것도 문제였다. 자금의 집행이나 지원 등이 일회성 지출의 회계 개념에 입각하고 있었다고 해야 하겠다. 금융자금 방출이나 재정지출 등의 효과는 장기 순환구조의 결과로 분석하여야 한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러한 관점이 형성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한편으로는 장기적 안목의 부족하였다고 할 수 있지만 거시경제정책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다고도 할 수 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케인즈와도 면담하였는데 케인즈의 건의는 수용되지 않았다고 한다.
< 뉴딜정책의 성공적 요소 ; 공동체 의식의 함양 >
위기 상황에서 국민들은 불확실성이 커짐에 따라 불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 상황에서 정부의 역할은 국민들로 하여금 심리적 감정적 안정을 찾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이것을 의도하였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이 점에서는 확실히 성공을 거두었다. 국민들을 안심시키고 단결토록 함으로써 임박한 위기를 극복하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더 큰 위기를 극복하는 원동력을 제공하였다.
지금의 상황에서도 공동체 형성이 경제적 성과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라는 점을 인식하여야 한다. 우리나라가 최근 코로나19로 인한 경제적 피해가 다른 나라에 비해 적었던 데에는 국민들의 성숙한 시민의식을 바탕으로 자발적 방역활동이 효과를 거두었고 경제질서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동체 의식은 한 나라 차원만이 아니라 국제적 수준에서도 요구되는 개념이다. 이 점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 뉴딜정책의 부정적 요소로부터 시사점 >
뉴딜정책은 대체적으로 초기에는 성공을 거두었으나 후기에는 그 효과가 뚜렷하지 않았다. 이 결과 뉴딜정책의 3 가지 R 중에서 경제회복(recovery)는 실패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간접적으로는 구제(relief)의 면에서도 효과를 거양하지 못하였다. 경제가 회복되지 않음으로써 실업 문제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실업 문제를 대규모 토목 사업이나 보조금 등을 통해 구제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장기적인 측면에서 기업 활동을 활성화하여 고용을 늘이는 것이 이상적일 뿐만 아니라 필수적이라 하겠다.
이러한 실패의 직접적인 원인은 뉴딜정책에서 기업을 배척한 것이었다. 특히 거대기업에 대한 부정적 선입견을 버리지 못한 것을 보다 근원적 문제라고 볼 수 있다. 또 다른 측면에서는 시기별로 정책의 주안점을 달리하는 신축성을 발휘하여야 하는 데 그러지 못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위기 초기에는 구제에 치중하되 이는 가능하면 짧은 기간 안에 그치고 장기적인 대책을 곧바로 준비하여 시행하여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였다.
신축적인 정책 집행에는 정책당국자의 유연한 정책 대응 자세가 필수적이다. 현실의 인식, 정책 실패 원인에 대한 객관적 분석, 다른 이해관계자들의 의견 청취, 전문가 그룹의 의견 존중 등 모든 면에서 열린 자세로 임하여야 한다. 달리 말하면 효과적인 정책을 수립 집행하기 위해서는 독단에서 벗어나고 초기 이념을 과감히 버려야 하는 것이 관건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앞의 글에서 뉴딜정책은 고질적인 문제의 해결이 지연되는 상황에서 새로운 접근법에 의거 혁신적인 정책을 택함으로써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일련의 시도라고 정의하였다. 그런데 집권 기간이 오래되면 될수록 “뉴딜” 대신 수구의 입장을 취하는 모순에 직면하게 된다는 것이 루즈벨트 뉴딜정책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이라고 할 수 있다.
<ifs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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