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청 시인의 문학산책 <34> 풀씨 몇 개가 주는 기쁨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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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선생님, 보내주신 꽃씨 몇 알, 잘 받았습니다. 정년으로 학교를 떠나신 후 안부 궁금하던 차에 선생께서 보내신 흰 봉투의 우편물이 더없이 반가웠습니다. 선생께서 보내주신 흰 봉투에 담긴 짧은 사연과 내용물은 진한 감동이었습니다. 봉투 속에는 흰 종이로 곱게 싼, 꽃 씨 몇 알과 짧은 사연이 담겨 있었습니다.
“지난 여름 산길을 가다가 길섶에서 받아온 꽃씨입니다. 꽃 색깔은 아주 엷은 자주 빛이고, 꽃 모양은 흡사 초롱같았어요. 마침, 꽃씨가 여물 때여서 여문 씨앗 몇 개를 받아 왔습니다. 싹이 날지 모르겠지만 뜨락에 뿌려보시기 바랍니다. 가내 두루 평안하시기 바랍니다.”
선생께서 동봉해 보내신 글월입니다. 오랜 도시생활을 청산하고 전원에 낙향해 사는 후배 교수를 생각하시고 선생은 꽃씨 몇 알을 보내주셨습니다. 시인으로 살면서 평생 고운 마음, 아름다운 감동을 글 속에 담으려 노력해오고 있습니다만, 선생께서 보내주신 글월과 꽃씨 몇 알이 제게 주는 감동은 신선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산야에 지천으로 피어난 풀꽃 하나의 아름다움을 눈여겨보는 눈길, 풀씨 하나 속에 깃든 생명의 존귀함을 거두는 고운 마음, 그리고, 그 소중한 수확물을 나누어 건네주시는 자상한 배려, 고맙기 이를 데 없습니다.
지금, 우리는 난마처럼 얽힌 현실의 혼돈 속에 삽니다. 가치의 혼란이 극에 달해 있는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뇌물과 청탁의 대가로 오가는 재물 보화의 악취가 평균적인 삶이라도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많은 사람들의 일상을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좌절을 더욱 고통으로 치닫게 하는 것은, 그런 청탁의 대가로 오가는 뇌물들이 그냥 ‘선물’의 가면을 쓴다는 사실입니다. 천문학적 단위의 뇌물성 ‘선물’들이 오가는 세태 속에서 선생이 보내주신 꽃씨 몇 알의 ‘선물’은 참으로 귀한 감동입니다.
이 가을, 산야의 어느 곳에서도 검고 윤기 나는 풀씨들이 지천으로 여물어갈 것입니다. 선생께서 보내주신 꽃씨 몇 알이 저의 집 뜨락에 묻히고, 싹이 트고 잎이 나면, 어느 날 선생께서 어느 낯 선 길섶에서 만났던 엷은 자주의 초롱꽃을 제가 보게 되겠습니다. 늘 안녕히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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