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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정치리더십-외천본민(畏天本民) <77> 진정으로 행복한 나라 IV. 진정한 복지는 훈민정음<訓民正音> 이다.<中>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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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3년06월23일 17시10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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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IV.2 훈민정음에 대한 반대파

 

훈민정음에 대한 반대는 집현전 학자들로부터 제기되었다(세종 26년 2월 20일). 그 우두머리는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였다. 이들이 내세운 훈민정음 반대이유는 여섯 가지다 ;

 

   (i) 중국을 섬기고 사모하는 데에 부끄러움이 있다.   

  

   (ii) 몽고, 서하, 여진, 일본, 서번 등 오직 이적(夷狄)에게만 문자가 있다.

 

   (iii) 이두는 천년이나 시행되어온 폐단이 없는 글이므로 야비하고 

     요상스러우며 무익한 글을 따로 만들 필요가 없다. 그리고 한자가 사용   

    되지 않으면 성현의 학문이 사라지고 교화와 학문에 큰 방해가 된다.

 

   (iv) 중국은 말과 글이 같아도 법조문 해석을 잘못하여 억울함이 많았다. 

      잘못된 옥사는 법조문 때문이 아니라 옥리들의 부정 때문에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언문으로 법조문을 번역해도 억울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v) 국가 중대사는 여러 대신들과 신중하게 의론하여 결정해야 할 것인데

      어찌 의논도 없이 만드시는 것이며 왜 이렇게 서두르는 것인가. 그리  

      고 아직 결정되지도 않았는데 관리 10여명으로 하여금 국서를 언문으  

      로 번역하게 하시고 관리 시험과목으로 채택하시며 초정에 요양하셔  

      야 할 때 성가시게 번거롭게 하시는가 알 수가 없다.

 

   (vi) 언문은 하나의 기예에 불과하고 또 정치하는 도리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데 왜 세자는 언문 따위에 기를 허비하게 하는가.

 

세종은 설총의 이두를 옹호한 최만리의 논리대로 반박했다. 이두를 설총이 만든 이유가 백성들이 보다 쉽게 사용하자고 한 것이고 그런 점에서 언문도 같은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설총은 옳다고 하면서 임금은 옳지 않다는 것이냐고 따졌다. 언문이 하나의 새로운 기예에 불과하다고 했는데 나이가 들어오직 책으로 벗 삼아 소일하는 사람인데 어찌 나더러 옛 것을 싫어해서 그런다고 비판할 수 있느냐고 질책했다. 그리고 서무를 세자에게 이미 맡기고 있는데 왜 언문을 못 맡기겠느냐고 최만리 등을 꾸짖었다. 

 

최만리는 훈민정음을 서두를 이유가 없는데 왜 재촉하느냐고 대꾸했다. 세종은 매우 화가 났다. 

 

   “지난 번 에는 김문이 계를 올리기를 언문이 불가할 것이 없다고 하더니  지금 와서는 반대로 불가하다고 하는구나. 또 정창손이 말하기를, <삼강행실도>를 반포한 이후에 충신, 효자, 열녀가 배출되었다는 소리를 못 들었으며 인간의 행동이란 오직 자질에 달려 있는 것이지 하필 언문으로 번역한 다음에야 효과가 있겠느냐고 했다는데 이런 따위 말들이 어찌 이치를 안다는 선비의 말이라 할 수 있는가. 심히 쓸데없는 속된 선비들이로구나. (前此 金汶啓曰 制作諺文未爲不可 今反以爲不可 又昌孫曰 頒布 三綱行實之後 未見有忠臣孝子烈女輩出 人之行不行 只在人之資質如何耳 何必以諺文譯之 以後人皆效之 此等之言 豈儒者識理之言乎 甚無用之俗儒也  : 세종 26년 2월 20일)”

사실 세종은 <삼강행실도>와 같은 책을 지으면 충신효자열녀가 무리로 나오리라 믿었다. 따로 정창손을 불러 그렇게 말했던 적이 있었다. 세종의 이 말에 대해 그 자리에선 가만 듣고 있었던 정창손이 이제 훈민정음 반대무리에 들어가 상소를 올린 것에 대해 세종은 단단히 화가 난 것이다.

 

   “내가 너희들을 부른 것은 죄를 주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상소 중 한 두      가지 물어볼 게 있었던 것인데 너희들이 사리를 깊이 생각지도 않고 또      바꾸어 말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면할 수가 없겠다. (予召汝等 初非罪之      也 但問疏內一二語耳 汝等不顧事理 變辭以對 汝等之罪 難以脫矣 

    : 세종 26년 2월 20일)”

 

세종은 반대파 전원을 의금부에 가두었다. 그렇지만 반대파 무리들에 대한 분노는 오래가지 않았다. 하루 만에 최만리를 포함한 집현전 학자 대부분을 놓아주었다. 다만 앞 뒤 말이 달랐던 김문과 정창손은 가만두지 않았다. 김문은 장 100대를 벌금으로 물게 했고 정창손은 즉각 파직시켰다. 징계처분이 있은 지 4개월이 지난 6월 21일 이 되어서야 이 두 집현전 학자들을 다시 원래 자리인 집현전 직전과 응교로 각각 복직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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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문]

 

김문은 실력이 대단히 뛰어난 인재였다. 세종 2년 인정전에 복시를 수석으로 급제하였고 이후 주로 집현전에서 종사하였다. 그에 대한 실록의 평가는 침착하고 중후하며 말이 적다고 했다. 학문을 통달하면서도 고루하지 않고 박학하면서도 정밀하여 누구라도 물어오면 즉시 대답해도 맞았으므로 세상이 놀라고 세종도 그를 아꼈다. 그러나 아는 것은 많아도 글을 쓸 줄을 몰랐으며 아집이 강하고 권모술수가 능하여 겉과 속이 다르고 속으로 탐욕이 많았다고 했다. 정인지가 문에게 학문이란 ‘심성을 바로 하는 것’이라고 깨우쳐 주기도 했었다. 이 말을 들은 김문은 부끄럽고 한스럽게 여겨 밤새 잠을 자지 않았다고 했다. 집현전 학사들이 연명으로 상소를 올릴 때에도 병을 핑계로 빠졌으며 동료 정창손이 불교반대 상소를 올리다가 옥에 갇혔을 때에도 홀로 구명운동에 참여하지 않았었다. 그런 외곬으로 인해 사람들은 그를 ‘김문의 육경(六經)은 아무 쓸모없는 쓰레기(金汶六經 掃地)’라고 질타했다. 동료 사회의 이런 따돌림에도 불구하고 세종은 그를 직제학으로 승진시키고 사서를 번역하도록 지시했는데 뇌출혈(혹은 뇌졸중)로 갑자기 사망했다(세종 31년 3월 13일).    

 

[정창손]

 

정창손(1401-1487)은 중추원사 정흠지의 넷째아들이다. 세종 5년(1423)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3년 뒤 세종 8년(1426)에 문과에 급제했다. 집현전과 사헌부에 있으면서 곧은 말을 많이 했고 특히 세종 28년(1446) 불교를 반대하는 상소를 주도했다가 옥에 갇히기도 했다. 세종이 승하할 당시 직책은 집현전 직제학이었으며 <세종실록>은 물론 <고려사> 찬술에도 깊이 참여했다. 문종 즉위 직후 대사헌이 되었고 단종 즉위 직후 이조판서가 되었다. 계유정난(1453) 때 세조 편에 서서 추충좌익공신이 되었으며 세조가 즉위한 후에는 우찬성으로 승진하였다. 

 

정창손 일생의 최대 전환기는 세조 재위 중에 발생했다. 사위 김질로 부터 성삼문, 하위지, 이개의 단종 복위계획을 듣고 이를 세조에게 밀고한 사람이 정창손이다. 세조는 그의 공을 높여 추충경절좌익공신으로 추대하고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세조 7년(1461)에 영의정을 역임했다. 세조 8년(1461) 5월 임금이 영의정 정창손과 양령대군을 불러 함께 술을 마시며 둘째아들 세자(황,예종)의 교육을 의논하면서 세조가 아들에 관해 이렇게 말하였다.

 

   “(세자가) 크게 통달하고 나면 후에 국사를 맡기고자 한다.

    (達大之後 將歸國事 : 세조 8년 5월 8일)”   

  

그러자 정창손이 ‘진실로 마땅한 말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옆에 있던 세조의 큰아버지 양령대군은 무슨 말인지 매우 당황해했다. 무슨 말도 되지 않는 말이냐고 하면서 정창손이 실언을 한 것이라고 꾸짖었다. 세조가 세자에게 양위를 하겠다는 것을 정창손이 부추긴 셈이 된 것이라는 말이다. 그 말이 밖으로 퍼져나가자 좌의정 신숙주, 우의정 권람, 좌찬성 황수신 등 대소 신료가 모두 들고 나와 정창손의 큰 죄를 비판했다. 세조는 공신 중에 공신인 정창손을 끝까지 옹호하지 못하고 이틀 뒤 영의정직을 파면하였다(세조 8년 5월 10일). 그리고 세조는 혼자 중얼거렸다.

 

   “내가 아들 사랑이 과해 극도로 칭찬하다가 창손에게 죄를 지었구나.

    (予過於愛子 極稱譽之 乃作昌孫罪惡 : 세조 8년 5월 10일)”   

   

정창손은 세조가 죽고도 20여 년을 더 살았다. 예종을 지나 성종 때에 죽었다. 성종이 왕비 윤씨를 폐비 조치 할 때 정창손이 영의정으로써 폐비 조치를 반대하지 않았으므로 연산군이 즉위하자 한명회, 윤필상 등과 함께 12간(奸)으로 지적 되어 부관참시 되었다가 중종 때 신원되었다. 그에 대해 <성종실록>은 천성이 조용하고 소탈하며 재물에 신경을 쓰지 않아 항상 집이 가난했다고 전한다. 뇌물과 청탁을 받지 않았으며 지친의 사사로운 간청도 들어주지 않았다고 했다. 효심이 뛰어 났고 동료 간 신의가 있었으며 조금도 임금의 뜻에 아부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다고 평가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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