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청 시인의 문학산책 <42> 겨울 절간을 찾아가는 시인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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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말(대화)이 사상된 침묵이 좋다. 말이 소거되고 남은 침묵 속에 새롭게 고이는 말, 그것이 나의 참말임을 안다. 원래 말은 옹달샘의 샘물처럼 청신한 것이었다. 목 줄기를 타고 흐르며 갈증을 풀어주고 정신까지를 맑게 해주는 말-그것이 말의 근원이었다. 이처럼 말의 청신함이 일상의 때에 쩔어 관념과 타성이 되어버린 것이다.
나는 2005년에 시집 『푸른 말들에 관한 기억』을 냈다. 시집 『푸른 말들에 관한 기억』의 시편들은 거의가 절간에서 쓰여졌다. 이 시집의 시편들의 상당 부분을 절간에서 쓰게 된 것은 이미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은 이유에서였다. 소외와 단절의 공간이 필요했고, 그런 공간을 제공해주는 최적의 장소가 절간이었다. 절은 보이지 않는 제도가 엄격히 지켜지는 곳이다.
숲속을 헤매고 다니든 잠을 자든, 책을 읽든, 글을 쓰든 마음대로이지만 하루 세끼 공양시간만은 엄격히 지켜야 한다. 아침 7시, 점심 12시, 저녁 5시-거의 정확하게 시간이 지켜진다.
따라서 나의 모든 생활 규범은 이렇게 규정된 시간의 토막 속에서 영위된다. 가급적 목소리를 사용하지 않는다. 절간에서의 삶은 원래 대화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나는 열흘 동안 함평 용천사에 머물면서 한 열 마디쯤, 합쳐서 단 2, 3분 정도의 대화를 나누었을 뿐이었다.
사실 우리는 지금 너무나 무잡스런 말의 홍수, 말의 폭력 앞에 무방비로 내던져져 있다. 말의 무잡스러움이 삶의 무잡스러움을 바탕으로 해서 퍼져나가고 있음은 자명한 일이다. 말의 청신성을 찾기 위해서는 말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아마도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말의 90% 정도는 필요 없거나 쓰잘 데 없는 것들일 것이다.
나는 절간에 살며 만나게 되는 이 침묵을 좋아한다. 말이 소거된 대웅전 빈 뜨락을 거닐거나, 옛 고승들의 부도 앞을 지날 때, 그리고 이따금 마주치는 승려들과 합장으로 지나칠 때, 또한 그리고 밤 두 시나 세 시 요사채에 누워 카프카를 읽을 때, 하늘에 초롱초롱한 별들을 바라보며 해우소에 갈 때, 은하수를 볼 때 나는 모처럼 청신한 내 말들을 만난다.
요즘은 절에서도 법회도 수시로 열리고, 무슨 100일기도다 천도재다해서 많은 의식이 치러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렇게 신자들의 내왕이 빈번한 절보다는 고즈넉할 만큼 적막감이 도는 곳이 더 많은 것이 사실일 것이다. 더구나, 봄, 여름, 가을이 가고 겨울이 되면 대부분의 절은
고적감이 깃든 빈 공간이 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의 절은 대부분이 산에 있고, 그것도 명승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명승이 인간의 마을 가까이 있을 리 없으니 대개가 깊은 산속, 전망 좋은 벼랑 위의 앞이 툭 트인 곳에 터를 잡고 있다. 산으로 오르는 먼 길에 눈이 쌓이면 절간은 절해고도처럼 인간세상과 격리된 채, 절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 침묵 속으로 빠져든다. 나는 절해고도처럼 격리된 절간에 신세를 지면서 읽고 싶었던 책들을 읽고 화집들을 펼친다. 자고 싶을 때 자고 깨고 싶을 때 깬다. 그리고 말이 사라진 곳에 새로운 말이 차오르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지금 나의 이 절간 이야기는 요즘의 나와 내 시(詩)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알레고리일 수도 있으리라.
나는 말이 사상된 침묵을 사랑한다. 말이 소거된 침묵 속에 새롭게 고이는 말, 그것이 나의 참 말임을 안다. 목 줄기를 타고 흐르며 갈증 풀어주고 정신까지를 맑게 해주는 말-그런 말을 기다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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