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돈의 역사해석] 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 : #17 광개토대왕과 후연(10)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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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
(53) 후연 모용수의 황실인사 난맥상 (AD386)
후연 주군 모용수는 죽은 생모 난씨를 추존하여 문소황후로 올리고 적실인 문명황후 단씨를 빼내고 대신 문소황후를 아버지 태조의 묘실에 배향하고자 했다. 모용수의 생모 문소황후 난씨는 아버지 모용황의 정부인이 아니라 측실이었지만 자신이 새로이 황제가 되었으므로 문소황후를 빼고 문명황후를 세우자는 것이었다. 백관에게 그 여부를 묻자 당연히 중론은 그렇게 해야 한다고 했다. 박사 유상과 동밀이 반대하고 나섰다.
“ 요 어머니는 제곡의 부인이 되어서
지위가 셋째였을 뿐입니다만 귀함을 가지고 강원을 업신여기지 않았습니다.
성인이 도를 밝히는 것은
지극히 공정한 것을 우선으로 하는 것이니(明圣之道,以至公为先)
문소황후는 별도의 사당을 세우는 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합니다.“
모용수는 격분하여 유상과 동밀을 꾸짖었다. 놀란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 황상께서 하시려는 일을 신에게 묻지 마십시오.
신들은 경전을 살펴 의례를 행하는 방도를 말씀드린 것일 뿐
다른 마음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모용수는 다시는 대신들에게 묻지 않고 생각대로 행동했다. 단씨를 문소황후로 추존하고 평소 자신을 홀대하고 핍박했던 아버지의 정실 가족혼태후를 폐위하고 아버지의측실 또다를 단씨를 경덕황후로 세우고 열조에 배향하였다.
황위에 오른 모용수는 아들 모용농을 요서왕, 모용린을 조왕, 모용륭을 고양왕으로 책봉한 뒤 동생 범양왕 모용덕을 상서령, 조카 태원왕 모용해(모용각의 아들)를 좌복야, 그리고 조카 낙랑왕 모용온(모용준의 아들)을 사예교위로 임명했다.
(54) 서연 모용영과 부비의 죽음(AD386)
서연 무리들이 장안을 비우자 형양태수였던 조곡이라는 사람이 흉노 학노와 4천 여호를 불러들여 장안으로 들어왔다. 장안이 다시 붐비게 되자 위수 이북의 많은 주변 무리들이 조곡에 호응하였다. AD386년 4월 요장이 들어와 장안을 접수하였다. 요장은 즉시 황제로 즉위하고 대사면령을 내렸으며 연호는 건초, 국호는 대진으로 이름하였다.
AD386년 6월 전진황제 부비는 도독중외제군사 왕영을 통해 전국에 격문을 뿌렸다. 모용수의 후연과 후진의 요장을 토벌하는 대군을 일으켜 맹동(섬서성 대현)에 결집하자는 선동이었다. 부비의 토벌격문을 보고 곳곳의 토후들이 수백 혹은 수천의 군사를 모아 호응해왔다. 전진 주군 부비는 멀리 남안(감숙성 농서)에 웅거하고 있는 사촌동생 부등과 연락하면서 연대를 모색했다. 산서성 문희에 머물고 있던 서연의 모용영은 이미 후연 모용수에게 복속하기로 약속했으므로 전진의 부비에게 동쪽으로 가는 길을 열어 달라고 요청했는데 부비가 거절했다. 모용영이 가고자 하는 곳은 모용수의 땅이었다. 만약 서연의 모용영을 보내 준다면 모용수의 세력은 더 강해질 뿐이다. 부비는 열어 줄 수가 없었다. 모용영의 군대와 전진 부비의 군대는 양릉(산서성 임분)에서 결전을 벌였다. 불행하게도 전진이 대패했다. 전진 좌승상 왕연과 위장군 구석자가 전사했다. 부비는 수 천 기병을 이끌고 남쪽으로 도망갔으나 얼마 못가 섬(하남성 삼문협)에서 동진의 양위장군 풍해에게 패하고 전사했다. 부비의 아들 태자 부녕과 장락왕 부수는 체포되어 건강으로 압송하려 하였으나 건강 조정은 조서를 내려 부씨 유족들을 동진 강주(강서성 구강)에 망명와 있던 부굉과 합류시켰다. 모용영은 부비를 물리친 다음 장자(산서성 장치)를 점거하고 스스로 황제를 칭했다. 사로잡힌 부비의 처 양씨를 상부인으로 삼으려고 했지만 양씨 부인은 강하게 거부하면서 모용영을 패도로 찔렀다. 모용영은 크게 다치지 않았으나 양씨를 죽였다.(AD386)
(55) 전진 후계자 부등이 감숙 임하에서 일어남(AD386)
전진의 남안왕 부등은 부비의 사촌 동생으로써 남안(감숙성 농서)에 웅거하고 있었다. 장안의 전진이 무너지고 부씨 황실이 곳곳으로 흩어져 패사하거나 동진으로 망명했지만 유일하게 독자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던 사람은 부등 뿐 이었다. 전진에 호의적 이었던 유민들은 하나 둘씩 농서로 모여들어 3만호 이상의 큰 세력으로 발전했다. 부비는 천수에 주둔하고 있는 후진의 진주자사 요석덕을 습격했는데 후진 황제 요장이 직접 지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요석덕을 격파했으며 요장은 부상까지 입었다. 이 때 죽은 후진군사가 2만을 넘었으니 부등으로써는 보기 드문 대승을 거둔 셈이다.(AD386년 10월)
[그림] AD387년경 중국 세력도
이 때 부비의 어린 아들 발해왕 부의와 제북왕 부창이 상서 구유와 함께 난을 피해 농서 부등에게로 찾아왔다. 부등을 부의를 황제로 세울 생각이었으나 후진의 요장이나 후연의 모용수와 서연의 모용영이라는 강적을 맡아 처리하기에는 부족하다는 주변의 권고를 받아들여 본인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AD386년11월) 부등은 군사 5만을 이끌고 동쪽에 있는 후진을 공격했다. 모든 갑옷과 병기에는 사(死)와 휴(休) 라는 글자를 새겨 넣었는데 죽어야 휴식을 취한다는 비장한 각오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엄격한 군율과 매우 과학적인 포진법(네모 형태의 방진형 포진)을 구사하여 전투에 임할 때마다 승리를 거두었다. 부등은 요장이 후하게 부견의 시체를 묻어둔 섬서성 빈현의 보루를 확보하고 그곳을 지키는 후진의 서숭과 호공에게 각각 옹주자사와 경조윤이라는 직책을 내렸다. 마침내 부등은 다시 장안에 입성했다.
(56) 서연에 있던 모용수 자손들의 후연 귀속(AD386)
AD386년 서연 황실 내부에서 모용충(충)등이 피살되면서 이어지는 혼란을 가라앉히며 모용영이 장자(산서성 장자)에서 황제로 등극하는 동안 모용수의 아들 모용유, 태자 모용보의 아들 모용성 그리고 그의 동생 모용회는 모두 장자에 있었다. 이들은 모두 장안에 있다가 모용영이 동쪽으로 옮겨 오면서 장자에 머무르게 된 것이다. 모용성이 삼촌 모용유와 동생 모용회에게 말했다.
“ 주상(모용수를 말함)이 이미 유주와 기주를 중흥시켰으나
동쪽(후연)과 서쪽(서연)이 아직 통합이 되지 못했습니다.
우리들은 여기서는 의심을 받는 사람들일 뿐이니
어리석든 현명하든 다 죽게 되어 있습니다.
틈을 타서 동쪽으로 돌아가서 어육이 되는 것을 피합시다.“
이들은 모두 모용수에게는 아들이거나(모용유) 손자(모용성과 모용회)였지만 모용영에게는 8촌 동생(모용유) 혹은 9촌 조카일 뿐이었다. 모용영의 할아버지 모용운이 전연 창업자 모용외와 친형제였다. 마침내 장자를 빠져나와 성공적으로 후연으로 돌아왔다. 모용영은 1년 뒤 자신의 휘하에 있던 전연 주군 모용준과 모용수의 자손을 모두 죽여버렸다. 다음해 초 이들이 중산에 도달하자 모용수는 크게 기뻐하며 모용유는 양평왕, 모용성은 장락공, 모용회를 청하공으로 책봉했다.
(57) 모용수의 제남일대 장악과 적요 공격(AD387)
모용수는 남쪽 땅을 경략할 생각을 오래전부터 했었다. AD386년 8월에는 태자 모용보에게 수도 중산을 맡기고 동생 모용덕과 모든 다른 아들을 대동하여 남쪽으로 진군했다. 조왕 모용린은 남쪽 방면, 고양왕 모용륭은 동쪽으로 보냈다. AD387년 정월 황하 주변을 시찰하던 모용수에게 고양왕 모용륭이 황하를 건너 공략할 것을 제안하자 모용수가 받아들였다.
정월 21일 난한과 평유를 보내 확오(산동성 사평현) 부근에서 황하를 건너게 하고 모용륭은 전군을 모아 황하강둑 북변에 진을 치고 대기했다. 그쪽을 지키던 동진의 온상과 부하 수비대들이 혼비백산 도주하면서 모용수는 연주지역을 장악하게 되었다. 아들 태원왕 모용해에게 연주자사를 주어 동아(산동성 양곡현 동북)지키게 하였다.
(58) 부견의 환관 광조와 모용수의 등용(AD387)
전진의 부견에게는 광조라는 충직한 내시가 있었다. 모용수와 부견은 장안에 같이 있을 때 자주 손짓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 부견에게 광조가 이렇게 물었다.
“ 폐하께서는 아직도 모용수를 많이 의심하시는지요?
그는 아무래도 남의 밑에 있을 사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부견은 그 말을 모용수에게 알려줬다. 광조라는 사람조차도 모용수의 능력을 높게 평가한다는 호의로 모용수에게 전한 것이다. 한참 뒤 모용수가 독립하고 업을 포위하며 공격할 때 광조는 빠져나와 동진으로 갔고 광조는 동진 조정에서 하북지방 태수로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하북지방이 모용수의 영토로 들어오게 되자 광조 또한 모용수에게 사로잡혔다. 모용수는 부견의 은혜가 생각나 눈물을 흘리며 광조 등을 용서해 주었다.
“ 그대들을 모두 용서한다.
전진왕(부견)이 나를 깊이 대해줬고
나 또한 그를 마음깊이 섬겼으나
두 공(부비와 부휘)가 질투하고 시기하여 내가 뛰쳐나온 것이다.
전진왕을 생각할 때마다 한 밤중에도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모용수는 슬픔에 빠진 광조에게 금과 비단으로 후하게 선물을 내렸으나 광조는 받지 않았다. 모용수가 이렇게 물었다.
“경은 아직 나를 의심하는가?”
광조가 대답했다.
“ 신은 오로지 주군에게 충실해야 함만을 알고 살아왔습니다.
폐하께서 지금까지도 부견황제를 마음속에 품고 계신 줄을 헤아리지 못했으니
신은 어찌 감히 죽음에서 도망칠 수가 있겠습니까.“
모용수가 이렇게 말했다.
“ 이것이야말로 경의 충성이요 진실로 내가 요구하는 것이다.
앞서 의심하느냐고 물은 것은 농담이었다.“
모용수는 광조를 더욱 두터이 여겨 중상시라는 자리에 앉혔다.
(59) 모용수가 청주, 연주, 서주를 장악(AD387)
제섭이라는 사람이 8천여 무리를 이끌고 신책(하북성 청하부근)이라는 곳을 장악하고서는 후연에 투항하자 모용수는 그를 위군태수(하북성 임장현)로 임명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제섭이 장원이라는 사람과 연합하여 후연에 등을 돌리고 배반했다. 장원은 1만여 군사를 이끌고 축아(산동성 우성현)에 주둔하면서 변방 이민족의 하나인 정령족 우두머리 적요를 불러서 서로 연대를 꾀했다.
고양왕 모용륭이 주군 모용수에게 말했다.
“ 신책이라는 곳은 매우 험하여 갑자기 뽑아버리기 쉽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들을 오랫동안 포위한다면
장원이 유랑민들을 규합하고
적요 또한 정령무리들을 부를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걱정거리는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먼저 장원 무리를 공략해야 합니다.
저들은 먼 길을 걸어왔고 또한 자신들의 능력을 과신하고 있어서
우리가 먼저 싸움을 걸어오면 피하지 않고 덤벼 들것입니다.
일단 장원무리들만 격파하면
제섭 일당들은 싸움거리도 되지 못할 것입니다.“
모용수는 모용륭의 전략을 전폭으로 지지하고 수용했다. 2월 모용덕, 모용소, 장숭에게 2만 기병을 주어 모용륭과 함께 장원을 치게 했다. 장원군대는 모용덕의 대 부대가 이동중 잠시 쉬고 있는 틈을 타서 습격해 들어왔는데 모용덕의군대가 놀라서 급히 퇴각했지만 모용륭은 이미 그것을 예견하고 있었으므로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장원이 아들 장귀를 보냈지만 모용륭의 부장 왕말이 장귀의 목을 베어 돌아왔다.
모용륭의 부대가 장원의 습격을 훌륭히 방어하는 동안 피했던 모용덕의 대군이 다시 합류했다. 모용덕은 잠시 공격을 늦추자고 제안했지만 모용륭은 거부했다.
“ 기대하지 못할 때에 습격을 하고도 장원이 이기지 못한 이유는
급박한 상황에서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각오가 투철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저들은 매우 낙심하고 있을 것입니다.
싸우자는 사람과 우리의 병력이 너무 강하므로
피하자는 생각들로 복잡할 것입니다.
이 때를 놓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조카지만 지략이 뛰어난 것에 놀란 모용덕이 이렇게 말했다.
“ 나는 오직 경이 하고자 하는 대로 할 뿐입니다.”
모용륭의 부대는 적 7천8백여 급의 머리를 베었고 장원은 도망가서 숨었다. 후연의 군사가 역성(산동성 제남)을 공략하자 주변의 모든 성이 투항하고 사람들이 복속해 들어왔다. 이로써 후연은 청주는 물론 서주, 연주지역을 손아귀에 넣게 되었다. 모용수는 모용소를 역성에 주둔하게 하고 군대를 돌려 신책의 제섭에게로 향했다. 장원을 제압한 후연의 대군이 신책으로 몰려들자 신책에 있던 동란이라는 사람이 제섭을 잡아 모용수에게 보내왔다. 모용수는 제섭 부자의 목을 베고 나머지는 모두 용서해 주었다.(AD387년 2월)
[그림] 후연 및 서연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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