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협정 체제 70년: 의의와 과제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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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7월 27일이면 6·25 한국전쟁의 군사적 행동을 중지한 정전협정이 체결된 지 70년이 된다. 정전(armistice)에는 대체로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부분 정전으로 특정한 전장이나 한정된 기간 중 전사체의 수거 등 제한된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이 경우는 휴전(休戰)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다른 하나는 전면 정전으로 주로 전쟁을 종료하기 위한 전 단계로 시행된다. 여기는 정전(停戰)이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린다. 1953년 정전협정은 후자에 해당한다.
1950년 6월 25일 미명 북한이 38선 넘어 전면 남침한 이후 전황은 대체로 네 단계로 전개됐다. 첫째는 북한이 기습의 효과를 누리며 파죽지세로 낙동강 유역까지 남진했던 첫 3개월의 기간이다. 둘째는 9월 15일 유엔군이 인천상륙 작전에 성공한 이후 압록강 유역까지 북진했던 10월까지의 상황이다. 셋째는 1950년 11월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대거 개입하고 국군과 유엔군이 후퇴하여 이듬해 1월 서울을 내주었다가 다시 북진하여 현재의 휴전선 부근에서 전선이 고착된 1951년 전반까지의 상황이다. 넷째는 같은 해 6월 미국과 소련이 휴전을 제의하여 7월 10일 시작된 휴전 협상을 한 축에 두고 협상을 염두에 두고 거의 고착된 전선에서 일진일퇴, 소모전을 벌인 2년여의 기간이다.
그렇게 2년여를 끌다가 조인된 정전협정은 여러 면에서 역사적으로 유례를 찾기 어려운 특수한 사례가 됐다.
첫째, 협상 그 자체의 어려움과 특이함이다. 2년이 넘게 걸린 협상 기간 자체가 그 어려움을 보여주거니와, 그 기간 협상의 상황이 전투에 영향을 주고 전황이 협상에 영향을 주는, 즉 설전(舌戰)과 혈전(血戰)이 연계되어 전개된 상황은 전쟁과 평화가 외줄 선상에 있는 국제협상의 한 전범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이 정전협정은 평화협정을 전제로 채택된 전면 정전이었고 실제로 전문과 본문에서 3개월 이내 평화협상 개시를 건의했다. 그러나 평화협정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70년째 정전협정으로 머무르고 있다. 셋째, 이처럼 전쟁도 아니고 평화도 아닌 한 반도의 상황이 남북한과 지역 국가를 포함한 국제정치에 누진적으로 미친 영향이다. 물론 이상 세 가지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공통의 뿌리가 있다. 즉 한반도 상황의 특수성에 기인한 바가 큰 것이다.
이하에서 필자는 세 가지 질문을 제기하고 그에 대한 해답을 따져보고자 한다. 첫째, 한반도의 정전협정은 왜 그렇게 특수한가? 그 자체의 합의에 이르기에 2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고, 이후 70년이 되도록 평화협정으로 넘어가지 못했는가? 둘째, 그렇게 70년간 이어진 정전체제는 그동안 어떠한 역할을 했고 어떠한 자취를 남겼는가? 전쟁도 아니고 평화도 아닌 위태로운 상황을 관리함에 어떠한 역할을 했고, 더 넓게는 남한과 북한, 그리고 그 관계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 셋째, 남북관 계의 개선, 나아가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정책의 수립에 정전체제의 제도와 유산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한반도 정전협정의 특수성
한국전쟁 정전협정이 합의가 어려웠고 이후 평화협정으로의 전환도 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보다 한반도 상황, 그리고 그 속에서 발발한 한국전쟁의 특수성에 기인한다.
첫째, 한국전쟁은 기본적으로 내전이었다. 내전이란 단일한 영토 안에서 정권을 다투는 둘 이상의 세력이 통일국가의 지배권을 다투는 전쟁이다.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고 시작하는 국제전쟁과 달리 내전은 상대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는 제로섬적인 상황이다. 북한 정권이 상대를 멸절하고 단일 지배권을 수립할 목적에서 전쟁을 시작했으면 남한도 그런 목적에서 전쟁을 끝내고자 한 것도 당연했다. 분단의 현상을 유지한 채 전쟁을 끝내는 것은 전쟁의 제1차 당사자인 남북한에는 명분이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회담에의 참석과 정전협정의 서명을 거부했다. 대신 미국을 압박하여 같은 해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다. 그래서 올해는 한미동맹 70주년이기도 하다.
둘째, 내전으로 시작한 전쟁이 국제화되었으나 일반적인 국제전쟁이 아니었다. 설립 5년째를 맞아 의욕에 찬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는 북한의 남침을 유엔 헌장의 규정에 따라 “평화 파괴” 행위로 규정하고 제7장의 규정에 따른 집단적 안전보장 조치를 발동했다. 집단안보 조치란 곧 국제법 위반 행위에 대한 국제사회의 사법적 조치인 바, 상응하는 정의, 즉 위법자에 대한 응징 없이 끝내는 것은 유엔군을 이끈 미국의 처지에서 물색 없는 일이었다.
셋째, 중공이 개입함으로써 전쟁은 강대국 정치로 비화하였다. 북한이라는 일탈 국가에 대한 사법적 조치가 국공내전에서 승리하여 군사강국으로 부상한 중국과의 전쟁이 되어 사법적 조치의 무조건적 적용을 고집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렵게 됐다. 일백만이 넘는 사망자를 낸 중국으로서도 외교적 성과없는 정전을 수용하기 어려웠다. 그런데도 미국 내부에서 전쟁에 대한 피로감이 높아지고 그것에 편승하여 집권한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강하게 압박하여 정전협정이 성사됐다.
그러나 앞에서 지적한 문제가 그대로 작용하여 평화협정으로 이행할 수 없었다. 1954년 한반도 평화협정을 제1의 주제로 열렸던 제네바 회의는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날 수밖에 없었다.
첫째, ‘내전’의 당사자인 남북한의 처지에서 평화협정이란 바로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과 같아 수용하기 어려웠다. 둘째, 유엔 결의안의 집행자인 미국의 태도도 크게 바뀌지 않았다. 셋째, 세계적 냉전이 여전한 가운데 중국의 대표권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중국과의 평화협정도 가능하지 않았다. 실제로 미국과 중국과의 관계 개선은 20년 후에나, 그것도 한반도 문제를 배제한 상태에서 이루어졌다.
정전체제의 역사적 의의
그래도 정전협정이 한반도의 전투행위를 끝내고 사실상의 평화를 가져온 것은 사실이었다. 그 에 따라 중국군이 철수했고 미군은 유엔군의 역할을 하며 한반도의 불안한 평화를 유지했다. 물론 평화가 전적으로 정전협정 덕분은 아니었다. 냉전 시기 북한은 정전협정을 끊임없이 위반했고 탈냉전 시기에는 군사정전위원회 참석을 거부하고 북한측 중립국 감독위원단을 철수시키는 등 정전체제를 무력화하려고 했다. 그러므로 한반도의 평화는 7월에 조인된 정전협정보다 10월에 조인된 한미상호방위조약과 그에 따라 구축된 한미 연합전력이 억지 효과를 발휘한 덕분이 더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전협정에 마련된 상세한 규정은 국제정치학에서 말하는 국제 레짐의 일종처럼 행동의 준칙을 마련하고 그에 대한 기대를 수렴하여 빈발하는 ‘사고’를 관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필자가 그 같은 군사적 측면보다 더 크고 깊은 정치경제적 효과에 주목한다. 『강대국의 흥망』이라는 책에서 역사학자 폴 케네디는 1500년대만 해도 중국 명나라에 크게 뒤지던 유럽이 19세기 중반 중국을 압도한 이유로 근대 유럽의 무정부적 국제체계 속의 치열한 생존 경쟁을 꼽았다. 그 속에서 유럽의 열강은 혁신과 모방을 통해 치열하게 국력을 키우고 전쟁 기술을 익혔다. 반면 중국의 명(明)과 청(淸)은 제국에 안주하다가 유럽의 전쟁 기계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그와 비슷하게 남북 사이 사활을 건 경쟁은 사회와 국민에게 긴장감을 형성하고 그것이 성장의 한 동력이 되었다. 그 동력을 바탕으로 지도자의 현명한 정책과 우호적 국제 환경이 상호작용하면서 대한민국은 유사 이래 최고의 성세를 이루었다. 북한은 그처럼 현명한 정책이나 우호적인 국제 환경이 없어 경제적으로 낙후한 나라가 됐으나 그나마 동독과 달리 탈냉전의 충격에 살아남 은 내구성은 과시했다.
냉전 종식 이후 한반도의 안보 환경이 크게 바뀌면서 정전협정의 의미도 달라졌다. 외교적으로 고립되고 경제력에서 크게 뒤진 북한이 정전협정을 북미 직접 협상을 위한 디딤돌로 삼으려고 함으로써 그것의 외교적 의의가 부각됐다. 즉 북한은 군사정전위원회 유엔군 측 수석대표를 한국의 장성이 맡기로 한 것을 빌미로 정전위원회에의 참석을 거부하고 미국과의 평화협정 체결을 주장 하고 나섰다. 그러나 한국을 배제한 평화협정이라는 논리적, 현실적 한계로 진척되지 못하였다.
또 1994년 제1차 북핵 위기 결과 채택된 10.21 제네바 합의에서 미국과 북한은 상호연락사무소 설치에 이어 대사급 국교 정상화를 약속했으나 2002년 제2차 북핵 위기의 발발로 무산됐다. 이후 2005년 9월 19일 새로운 북핵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열린 6자회담의 제4차 회담에서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을 약속했으나 이듬해 북한이 제1차 핵실험을 강행함으로써 사실상 무산되고 말았다.
또 남한의 여러 정부도 정전협정의 한시적 성격에 주목하여 그것의 전환을 남북관계 개선의 계기로 삼고자 노력했다. 지난 문재인 정부도 2018년 6월 싱가포르 미북정상회담 이후 비핵화와 연계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구상했고 그 종착점으로 정전협정의 평화협정 전환을 상정했다. 이듬해 하노이에서 열린 2차 미북 정상회담이 실패로 끝나자 종전선언의 형식으로라도 그 과정의 매듭을 지으려고 노력했으나 결국 실패로 끝났다.
향후 과제와 전망
한반도 정전협정이 기존의 정형을 벗어난 이상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를 위해 한국전쟁 ‘당사국’들 사이의 평화협정이 필요하고, 그 정전협정을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는 정형적 발상은 탈피할 필요가 있다. 정전협정 체결 당시의 상황은 여러 면에서 변화했다. 중국이 유엔에서 대표권을 회복하고 안보리 상임이사국이 된 지는 이미 오래다. 또 남북한이 유엔에 가입한 이후 전쟁의 집단안보적 성격은 거의 사라졌다. 대신 북한은 핵과 미사일 개발로 인한 유엔의 제재를 받는 새로운 국면이 조성됐다. 이후 불변의 요소가 있다면 남북한이 통일국가를 전제로 대립하는 정치세력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한반도의 평화는 기본적으로 남북한이 풀어야 할 과제이다.
요컨대,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는 요식적 발상은 한국이 당사자니 아니니 하는 형식 적 논란만 부를 뿐 실익이 없다. 우리 정부가 우월한 국력과 명분으로 남북관계의 개선을 추구하는 정책적 묘를 발휘해야 한다. 그로부터 확고한 평화 상태가 오면 정전협정의 새로운 측면이 부상할 것이다. 정전협정의 유산인 비무장지대의 진정한 ‘비무장화’, 예컨대 지뢰 제거작업이 하나다. 70년 동안 사람의 발길을 거부한 결과 생겨난 생태환경의 관리가 다른 하나다. 남북관계가 진전되고 평화가 구축되면 이들은 남북 사이의 협력과 신뢰 구축을 심화하는 계기로 활용될 것이다. <끝>
※ 이 글은 세종연구소가 발간하는 [정세와정책 2023-7월호 제36호]에 실린 것으로 연구소의 동의를 얻어 게재합니다.<편집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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