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지 마 폭력, 한국은 분노 사회?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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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덥다.” 입 밖으로 내뱉은 한마디에 짜증이 몰려왔다. 날씨도 날 싫어하나? “하하하.” 나는 짜증이 나서 미치겠는데, 내 앞에 선 몇 명의 여자들이 재밌는 잡담이라도 하는지 깔깔 웃는다. 나를 보고 웃는 건가? “어이쿠, 죄송합니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큰 사람이, 수많은 인파에 몰려 나의 어깨를 쳤다. 일부러 그랬나? 날씨 때문인 건지, 거슬리는 웃음소리 때문인 건지, 나를 친 사람 때문인 건지 모르겠다. 이유는 이미 중요하지 않았다. 작은 짜증이 화가 되었고, 이걸 풀지 않으면 미칠 것 같은 기분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작은 욕설을 읊조리며, 거리를 걸었다. 그리고 그저 시선에 걸렸다. 찾았다. 내가 이길 수 있는 사람….
묻지 마 폭력
하루건너 한 번씩 저녁 뉴스에 ‘묻지 마 폭력’이 등장한다. 달리던 택시 안에서 손님이 기사에게 욕설을 퍼붓고 폭행한다. “자기 말을 무시했다”라는 게 이유다. 한 고등학생이 컵라면을 먹던 처음 본 초등학생에게 흉기를 휘둘렀다. “갑자기 화가 났다”라는 게 이유다. 지하철역에서 20대 여성이 신원미상의 남성에게 다짜고짜 멱살을 잡히고 폭행당했다. “눈이 마주쳤다”라는 게 이유다. 귀가하던 여성을 무차별 폭행해 의식을 잃게 한 ‘부산 돌려차기’ 사건의 재발 방지를 위해, ‘묻지 마 폭력’에 대한 신상공개 특별법이 진행 중이다.
‘묻지 마 범죄’는 가해자와 피해자 간의 관계를 찾아볼 수 없는 불특정 다수를 향한 범죄다. ① 분명한 동기가 없다. 분노 자체가 동기다. 이유 없는 범죄로서, 상해·살인 등 중범죄가 80%를 웃돈다. ② 특정 대상이 없다. 약자가 주 대상이다. 아동·여성·노인이 희생자가 되기 때문에, 정신질환으로 보기 어렵다. ③ 충동적이다. 갑자기 일어나므로 예측하기 어렵다. ‘더 잃을 게 없다’라는 막장 심리가 작동하고, 법적 처벌과 중형조차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이코패스로 보기 어렵다.
‘묻지 마 범죄’는 사회적 병리 현상이다. ① 사회적 소외다. 첨단기술의 발달은 소통의 단절을 가져온다. 함께 교류하는 것보다 혼자 지내는 게 많다. 소외계층은 사회성이 떨어지고 은둔형 성향이 크다. 언제라도 응축된 불만이 외부로 터진다. ② 경제적 빈곤이다. 빈부 격차는 상대적 박탈감을 가져온다. 신분 상승이 단절되고, 기회의 평등조차 좌절된다. 취약계층은 가난하고 절망적인 상태다. 언제라도 극단적 분노는 외부로 폭발한다. ③ 공동체의 무관심이다. 전통의 배척으로 건전한 공동체 문화가 사라지고 있다. 지자체나 시민사회, 상담센터나 정신건강센터 등과 연계해 소외층을 관리하는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한국은 분노 사회
과거는 억압 사회였다. 뭐든지 참아야 했다. 그래서 우울증이 많았다. 현대는 강박 사회다. 뭐든지 해야만 한다. 모두가 성공과 행복을 위해 열심히 뛴다. 불안증이 증가한다. 불안증을 막으려다 강박증이 생기고, 강박증을 피하려다 중독증이 생긴다. 현대는 중독 사회다. 중독증은 강박적 습관이다. 간절히 바라고, 중단하면 불안해한다. 중독증은 쾌락을 동반하고, 재미와 즐거움을 추구한다. 강박증, 불안증, 중독증은 서로 오간다.
한국은 분노 사회다. 뭐 하나 되는 게 없다. 불안증은 공포증이 되고, 심해지면 공황장애가 된다. 공황장애를 극복하지 못하면 심각한 우울증에 빠진다. 이때 생기는 우울증은 자살 충동과 타살 충동을 동반한다. 중독증의 쾌락은 삶의 동력이다. 하지만 거짓 열정이고 가짜 에너지다. 이면에는 공허가 꿈틀거린다. 벗어나는 순간 나락으로 떨어진다. 중독증의 종착역도 우울증이다. 이때 생기는 우울증은 무기력과 분노를 동반한다.
한국 사회에 만연한 분노(화)
사방팔방, 화가 가득하다. 경제성장이 멈췄다. 저성장·저출산·고령화가 발목 잡는다. 취업은 바늘구멍이고, 창업은 가시밭길이다. 과도경쟁은 심해지고, 신분 상승은 꿈도 못 꾼다. 자살률이 10년째 OCED 국가 1위다. 남녀노소, 화가 그득하다. 민생 열차가 멈췄다. 고금리·고물가·고유가에 휘청인다. 결혼은 쉽지 않고, 육아는 막막하다. 가계부채는 늘어나고, 복지혜택은 뒷걸음질이다. 삶의 만족도가 최악이다.
화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자기보호의 기능이 있다. 상대의 공격으로부터 나를 지킨다. 분노의 분위기는 내 몸을 감싸는 위엄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분노는 에너지다. 어디론가 분출하고, 누적되면 폭발한다. 내부로 향하면 무력감에 떨어지고, 외부로 향하면 희생양을 찾는다. 분노는 자신을 뜯어고치는 에너지로 사용된다. 자기 개혁을 이룰 수 있다. 사회를 뜯어고치는 에너지로 사용된다. 사회개혁을 이룰 수 있다. 의로운 분노(義憤)도 있다. 안중근 의사는 청년의 피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다. 정당한 분노도 있다. 어떤 때는 마음 먹고 화를 내야 한다.
화가 나면 문제가 되는 사람이 있다. 충동조절 장애다. 충동조절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다.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고, 자신이나 타인에게 해가 되는 행동을 반복하는 것이다. 충동적 행동을 하기 전 긴장이 고조되고, 행동으로 옮긴 후에 일시적 쾌감을 경험한다. 분노조절 장애도 있다. 분노조절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다. 사소한 일에 폭력을 사용하려 하고, ‘너 죽고 나 죽자’라는 말을 자주 한다. 정신적 고통이나 충격 후에 부당함·모멸감·무력감으로부터 나타나기도 한다. 분노표현이 효과적이었던 경우, 습관적으로 굳혀지기도 한다.
우리 뇌는 크게 뇌간, 구피질, 신피질로 나눈다. 뇌간은 ‘파충류의 뇌’로 충동적인 부분을 담당하고, 구피질은 ‘포유류의 뇌’로 감정인 부분을 담당하며, 신피질은 ‘영장류의 뇌’로 이성적인 부분을 담당한다. 안정된 상태에선 ‘영장류의 뇌’가 지배한다. 그런데 화가 나면 달라진다. ‘포유류의 뇌’가 뇌 전체를 지배한다. 화가 나면 짐승이 된다. 이성은 감정에 굴복하고, 감정은 충동에 굴복한다. 우리 뇌는 복잡하면서 단순하다. 한순간 무지개의 아름다움에 경탄하다가, 다음 순간 살인적인 분노에 사로잡힌다.
분노는 통제 부족에서 온다. 통제 부족의 덫에 걸린 사람이 있다. 불편한 것을 못 참고, 힘든 환경을 못 견딘다. “맘대로 안 되면 다 부숴버릴 거야!” 과음·과식·성적 문란 등 충동조절에 어려움이 있다. 불편한 상황을 피하고, 힘든 업무를 쉽게 포기한다. 결정을 내리는데 경박하고, 절제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보통 어려서 부모가 안 계시거나 바쁘셔서, 규칙을 정해주지 않은 경우다. 원하는 대로 하다가 버릇이 나빠진 경우다. 성장 과정에서 인내를 못 배운 경우다.
분노는 지치고 힘들 때도 일어난다. 분노는 보통 대상이 있다. ‘누구 때문’, ‘누구 탓’이라는 허상의 벽을 만들 때 일어난다. 책임을 회피할 때 일어난다. 상대에게 기대고 의지하고 싶을 때 일어난다. ‘의존 심리학’은 인간 유전인자에 내재해 있다. 모든 어린이는 100% 어른에게 의존한다. 성인이 되면 100% 독립해야 한다. 스스로 100% 책임져야 한다. 어릴 적에는 누군가 나를 돌봐준다. 그런데 어른이 돼서 ‘그 사람’이 나를 돌봐주기를 원한다면, 좌절할 수밖에 없다. 의존 욕구의 좌절은 분노를 일으킨다.
분노를 다스리는 탁월한 처방
첫째, 인(忍)이다. 인(忍)은 한국인의 미덕이다. “참을 인(忍) 자 셋이면 살인도 피한다.” 분노를 유발하는 호르몬은 15초 내에 피크에 도달하고, 이후 서서히 분해된다. 30초만 참아도 분노는 누그러진다. 화가 나는 순간, 즉시 60초 동안 심호흡을 하자. 화나는 나를 받아들이고, 그런 나를 사랑하고, 마음의 평화를 선택하자.
분노가 치솟는 순간, 즉각 자리를 피하자. 한적한 곳을 걸으면서, 세 가지에 집중해 본다. ① 왜 화가 나는가? ② 무엇을 위해 화를 내는가? ③ 다른 효과적인 방법은 없는가? 분통이 터지는 순간, 하루만 모든 결정을 보류하자. 떠오르는 모든 생각을 종이 한 장에 써 보자.
둘째, 서(恕)다. 서(恕)는 동양인의 미덕이다. 서(恕)는 참된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다. 자공이 물었다. “제가 평생 실천할 수 있는 한마디 말이 무엇입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그것은 바로 용서의 서(恕)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시키지 말라.”
용서는 자기 사랑이다. 용서하여 분노를 이기면, 혈압이 낮아지고 면역력이 강화된다. 세로토닌이 올라가고, 도파민이 생성된다.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라.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셋째, 인(仁)이다. 인(仁)은 한국인의 이념이다. 인(仁)은 남을 사랑하고 어질게 행동하는 것이다. 인문주의의 시작이고, 인간다움의 실천이다. 윤리적인 모든 덕(德)의 기초고, 인의예지의 출발점이다.
한국은 동방의 예의지국이다.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오륜이 강조되었다. 부모는 부모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 상사는 상사답고, 부하는 부하다워야 한다. 예(禮)가 과도하면 허례허식이 되지만, 예(禮)가 사라지면 무례한 사회가 된다. “극기복례, 자기를 극복하고 예의범절을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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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이후경은?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경영학 박사, LPJ마음건강의원 대표원장(www.lpj.co.kr), 연세대 의과대학과 동대학원을 거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를 취득하고, 연세대 경영대학원과 중앙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다. 2014년부터 2020년까지 7년 동안 경제주간지 『중앙 이코노미스트』 칼럼리스트로 활동했다. 2022년부터 월간지 『건강다이제스트』 와 인터넷 매체 『ESG 경제』 칼럼리스트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는 『사례로 풀어본 한국인의 정신건강』, 『아프다 너무 아프다』, 『임상집단정신치료』, 『와이 앰 아이』, 『힐링 스트레스』, 『관계 방정식』, 『변화의 신』, 『선택의 함정』 등 10여 권의 책을 저술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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