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대통령(My President)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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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지난 대통령 선거가 51:49로 결판난 나라다. 그 만큼 양당 구조가 지배하는 나라다. 한 쪽이 승리해도 다른 쪽의 힘이 막강한 나라다. 게다가 정부가 조금이라도 실정을 하면 49는 금방 50~60으로 바뀌어 전세가 역전된다. 그러니 49:51도 선거 때 뿐이다. 어찌 보면 민주주의가 절묘하게 작동하는 나라다. 시민의식이 참으로 성숙한 나라다. 물론 시민의식이 아직 선진국에 비해 매우 낮다고 말하는 이들도 많다. 배금 만능주의, 천박한 자본주의, 낮은 문화 성숙도, 안전 불감증, 타인에 대한 배려 부족, 복지 낙후, 생활 속의 무질서 등 만족할 만한 수준은 못된다고 말한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수준이 국민 평균보다 좀 높아서 그럴 뿐이다. 객관적으로 한국은 세계 10위권대의 경제문화 선진국이다. 내가 아는 금융전문가는 “이제 외국 나가 살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다”고 말한다. 그는 미국 명문대학 출신에 골드만삭스, 도이치 방크 등 외국계 은행 임원으로 일한 엘리트다. 외국을 잘 알고 해외 출장이 잦은 미국계 한국인이다. 그의 말은 이제 한국이 미국보다 살기가 낫다는 뜻이다. 쇼핑몰이나 고층건물, 대중교통, 심야 치안, 여러 가지 편의시설, 서비스 등이 미국을 능가한단다. 우리의 생각 이상으로 한국의 수준은 세계적이다.
그런 한국이 지금 찌라시 사건으로 흔들거리고 있다. 대통령은 ‘찌라시’라고 말하고 언론은 뉴스 시간에 갖가지 ‘설’을 전한다. 국민들은 도대체 헛갈려한다. 어느 것이 사실인지 궁금해 한다. ‘짜라시’ 사건은 검찰로 넘어갔다. 검찰의 수사 결과가 어떤 형태로 나오든 액면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는 이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지난 번 세월호 사건에서도 목격했다. 검찰의 발표와는 상관없이 온갖 추측과 억측과 거짓 정보가 저잣거리를 도배하지 않았던가? 천암함 사건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라의 근간을 뒤흔드는 큰 사건이 발생했을 때 정부의 발표를 액면 그대로 믿는 사람이 거의 없다. 사실을 사실대로 말해도 믿지 않는 것이 요즘 국민들의 정서인 것 같다. 뭔가 정상은 아닌 듯하다.
우리나라 국회의원을 보자. 선거철에는 유권자들에게 90도로 인사하던 그들이 배지만 달면 거만하고 건방진 행동을 하는 경우를 종종 경험하게 된다. 힘 있는 의원들일수록 비서들의 전횡으로 곤욕을 치른다. 가끔씩 터지는 보좌관들의 비리사건을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국회위원들의 비서가 그러할진대 대통령의 비서들이야 오죽하겠는가. 올릴 서류와 뺄 서류가 그들 손을 거치다보니 힘이 셀 수밖에 없다. 게다가 대통령이 비서들을 통해 지시를 내리니 ‘대통령 지시사항’을 전하는 비서들이야 말로 엄청난 권력이다. 역대 정권에서 다 경험한 바이다. ‘십상시’란 말이 그냥 나왔겠는가?
현 정부에서 임명된 전직 장관이 인사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다는 불만을 언론에 토로한다. 현직 차관이 모시던 장관을 고소한다고 한다. 청와대 전직 비서와 현직 비서가 이전투구 싸움을 벌이고 있다. 대통령 비서실장이 기자를 고소한단다. 볼상 사납기 이를 데가 없다. 권력 암투가 고스란히 드러나니 국민들의 자존심은 심히 상한다. “사람 앞에 두고 무슨 짓들이야” 아래 사람들이 웃어른 면전에서 염치도 체면도 없이 싸울 때 어른들이 내뱉는 말이다. 국민들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황당한 사건들의 진의(眞意) 여부를 떠나 이 지경에 이른 상황의 원인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한다.
작금의 상황들이 모함과 음모에서 비롯된 허상의 결과일 수도 있다. 잘못된 정보에 의한 루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사건에는 반드시 그 배경이 있다. 문장을 읽을 때 행간의 의미를 짚어봐야 맥락을 그나마 파악할 수 있다. 우리의 눈이 사시(斜視)라서가 아니다. 우리의 귀가 난청(難聽)이어서 듣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가재가 게걸음을 걷는 상황’을 목격하는데도 가재 왈 “앞으로 잘 가고 있는데 왜 옆으로 걷는다고 떠드느냐”고 말한다. 사람들은 그래서 실소(失笑)를 금치 못한다. 나의 얼굴에 묻은 숯검정을 나는 보지 못한다. 길거리를 지나가던 사람들이 왜 나를 보고 힐끔거리며 웃었는지를 거울을 보고서야 비로소 알게 된다.
정치는 국민의 마음을 쓰다듬는 것이다. 어머니가 울고 보채는 어린 아이를 달래고 어르듯 정치는 국민의 마음을 위로해 주어야 한다. 대통령은 나의 대통령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대통령이기도 하지 않은가? 나의 대통령이 너의 대통령이 되고 우리 모두의 대통령이 될 때 우리나라가 잘 사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정부 출범 초기 국민대통합위원회가 구성되었음을 기억한다. 그런데 ‘국민대통합위원회’의 활동이 보이지 않는다. 대통령 직속 ‘청년위원회’도 있고 ‘문화융성위원회’도 있다. 다들 노력을 엄청나게 하고 있다지만 그래도 미흡하다고 느끼는 것이 국민들의 정서다. 청와대 홈페이지에는 국민소통 배너가 커다랗게 있다. 그런데 소통이 활발해 보이지 않고 국민의 소리가 잘 전달되는지도 모르겠다. 소통도 통합도 보이지 않는다고 느낀다. 이것이 국민 다수의 정서라면 어쩌겠는가.
매서운 한파가 몰아친 토요일 저녁 예술의 전당 콘서트 홀에서 객석의 수많은 관객들은 ‘부라보’ ‘부라비’를 외친다. 차이코프스키의 오페라 <예브게니 오네긴>공연이 있은 직후의 일이다. 지휘는 샤오치아 뤼, 연출은 제임스 로빈슨, 오리긴 역에 바리톤 공병우, 렌스키 역에 테너 파볼 브레슬릭. 한국과 외국 예술가들의 협연이 두드러진 훌륭한 콘서트 오페라였다. 150년 전 푸시킨의 원작 소설을 기초로 한 <에브게니 오네긴>은 관현악의 앙상블과 성악가들이 품어내는 절창(絶唱)이 어우러져 한국의 관객을 감동시켰다. 서로 다른 이질성(異質性)은 지휘자의 큰 능력에 수용되어 완벽한 하모니를 창조했다. 예술의 감동을 모처럼 느낀 기분 좋은 무대였다. 힘들고 피곤한 요즘 국민들은 가슴 벅찬 감동과 위로를 대통령에게 기대한다.
천 년 전 칭키스칸이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이질성의 융합이었다. 탕평책이었다. 그는 점령군과 정착민의 협력과 조화를 제국 통치의 근간으로 삼았다. 조선의 영조와 정조 역시 당파 정치의 폐해를 혁파하기 위해 탕평책(蕩平策)을 실시했다. “인군(人君)의 정치에 편사(便私)가 없고 아당(阿黨)이 없는 대공지정(大公至正)의 지경에 이름”을 의미한다. 입맛에 맞는 반찬만 골라 먹는 것을 편식이라고 한다. 편식을 하면 몸이 허약해지고 병에 걸린다. 편식 습관을 버리고 음식도 골고루 먹어야 하듯 국가의 경영도 탕평책이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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