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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 #22 ​: ​사마염의 서진(西晉) <A>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1년11월26일 17시10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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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서진(AD265-AD316)은 사마의의 손자 사마염(司馬炎)이 세운 나라다. 중국이 위, 오 및 촉의 삼국(三國)으로 분립된 것을 통일시킨 위나라(AD220-AD265)는 조조와 그 후손들의 나라였지만 사실상의 군사적 실권은 사마의의 아들 사사사와 사마소 그리고 사마소의 아들 사마염일족에게 있었다. AD263년 촉(蜀)을 멸망시키고, 요동에 웅거하던  공손탁 부자를 토벌하면서 위로부터 선양을 받아 세운 나라가 서진이다.서진 정권은 출범할 때부터 여러 어려운 문제를 안고 있었다. 삼국을 통일하였다고는 하나 지방 호족세력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고 진 무제 사마염 또한 지나친 자신감으로 방종에 빠져 점차 정치적 리더십을 잃어갔다. 특히 지방을 장악하기 위해 황자들을 지방 곳곳에 분봉하는 봉건제를 도입했지만 이것이 오히려 지방의 권력을 강화시키면서 중앙의 장악력을 떨어뜨리는 역효과를 드러내었다. 결국 서진 왕조의 몰락을 가져오는 팔왕의 난이 발생하고 또 황실 내 외척들이 발호하면서 서진은 빠르게 붕괴되었다.     

 

<1> 사마의의 쿠테타(AD249년)와 실권 장악 

    

AD249년 사마의는 두 아들 사마사와 사마소를 데리고 쿠테타를 일으켜 실력자 대장군 조상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몇 년 전부터 조상은 죽은 황제 조예의 부인 곽태후를 영녕궁에 사실상 유폐시켜놓고는 상서 하안과 등양과 정밀 같은 측근을 조정 요직에 앉혀 국정을 농단하고 있었다. 조상의 만행을 저지할 수가 없었던 태부 사마의는 병을 핑계로 조정에서 물러나 있었다.(AD247년5월) 사마의가 조정을 떠나 있자 조상의 횡포와 만행은 거칠 것이 없이 자행되었다. 동생 조희마저 만류했지만 조상의 국정농단이 그 무리들 전체가 관련된 것이지 어찌 조상 한 사람에 의해 자행되는 것이었겠는가. AD248년 가을(9월) 형주자사로 부임하는 이승이 인사차 들렀을 때 사마의는 일부러 거의 죽을 것 같은 모습을 하고서는 비녀가 주는 숟가락을 일부러 떨어뜨리기도 하고 음식을 옷에 흘리기도 하면서 겨우 이어지는 숨소리로 이렇게 부탁했다.

 

“ 병주로 간다고 들었는데 그곳은 흉노가 가까이 있으니 잘 대비해야 겠소.

  이제 다시 볼 수가 없을 것 같으니 어린 사마사와 사마소 형제를 잘 부탁하오.”

 

이승은 병주가 아니라 형주라고 재차 강조하였으나 사마의는 일부러 병주라고 들은 것처럼 연극을 해 보였다. 사마의를 만나고 나온 이승은 조상에게 이런 편지를 띄웠다.

 

“ 좀 전에 사마의를 만나 보았는데 시체처럼 마르고 기력 없는 몰골에

  몸과 기운이 따로 놀고 있으니 크게 염려할 것 없겠습니다.“

  

사마의를 깊이 의식하던 조상이 그 패거리 이승을 사마의에게 보냈던 것이고 사마의는 그것을 꿰뚫고 기막힌 연극을 연출한 셈이다. 그 해 연말 사마의는 더 기다릴 수가 없다고 생각하고 두 아들 중호군 사마사와 산기상시 사마소와 함께 거사를 준비했다.

AD249년 정월 초하루 선황 조예의 묘(고평릉)에 배알하고자 황제와 대장군 조상과 그 동생 중령군 조희와 산기상시 조언 등의 무리들이 황궁을 나갔다. 태부 사마의는 곽태후의 명을 내세워 황궁의 문을 닫아걸고 사도 고유가 조상 대신 대장군직을 차지하며 황궁 내에 있던 황궁군사를 장악하고 태복 왕관은 중호령의 직책으로 조희의 군대를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는 사자를 조상에게 보내 관직만 면직시킬 뿐 생명은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성 밖에서 쿠테타 소식을 들은 조상 무리들은 난감했다. 때마침 환범이 성문을 열고 나와서 조상 형제에게 황제를 모시고 허창으로 피신하기를 권했다. 조상은 칼을 땅에 버리고 이렇게 외쳤다.

 

“ 허창으로 가느니 차라리 부잣집 영감 되는 것이 낫겠다.”           

   

사마의에게 항복하여 목숨을 건지는 게 낫겠다는 말이다. 환범이 땅을 치며 통곡했다.

 

“ 너희 아버지 조자단은 정말로 훌륭한 사람이었지만

  그가 낳은 너희들은 돼지 새끼와 송아지 새끼일 뿐이구나.

  어찌 너희들 전 가족이 멸족되는 잔꾀에 넘어 간단 말이냐.“

 

조상은 사마의의 약속을 황제에게 전달하고 모두 황궁으로 돌아왔고 사마의는 조상 형제의가택을 포위하고 연금시켰다. 어떤 사람이 조상 무리들이 몰래 반역을 꾸민다고 밀고했다. 사마의는 조상의 반역모의에 대한 수사를 조상 패거리 상서 하안에게 맡겼다. 하안은 이번 기회야말로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 즉 조상과의 연대를 깨끗이 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그야말로 철저히 수사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조상, 조희, 등양, 정밀, 필궤, 환범 및 이승의 7 가문을 대역죄로 탄핵하고 삼족을 이멸시켰다. 사마의가 탄핵보고서를 다 읽은 뒤 이렇게 말했다.

 

“ 부족한 것이 있소.”

 

하안이 놀라서 이렇게 물었다.

 

“ 부족하다니요.   

  설마 제가 관련이 있다는 말은 아니시겠지요?“

 

사마의가 말했다.

 

“ 내가 부족하다는 것이 바로 그 부분이요.”

 

하안은 즉시 체포되었고 다른 일곱 가족과 함께 처형되었다. 2년 뒤인 AD251년 왕릉이 조표를 옹립하려는 쿠테타를 일으켰으나 사마의에게 진압 당했고 그 해 8월 사마의는 72세의 나이로 죽었다.

 

<2> 사마사의 정권 장악(AD252)    

 

AD252년 사마의의 큰 아들 사마사가 군권을 장악하고 대장군이 되었다. AD254년 사마사는 무절제한 황제 조방을 폐위시키고 조모를 황제로 옹립했다. AD255년 관구검과 문흠이 사마사를 토벌하겠다고 수춘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되었다. 그러나 그 전쟁에서 눈을 다친 사마사는 후유증으로 곧 죽었다. 47세였다.

 

 

<3> 사마소의 정권장악(AD255)    

 

사마사의 동생 사마소가 즉시 대장군 겸 녹상서사가 되어 군권을 이어받았다. 사마소에게는 최대의 난적이 정동대장군 제갈탄이었다. 제갈탄은 제갈량의 동생으로 평소 등양과 사이가 좋았는데 등양은 조상 숙청 때 같이 제거된 터라 자신도 사마소에게 의심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스스로 10만 대군을 길러 대비하는 한편 오에도 사신을 보내 연대를 모색하고자 하였다. AD257년 사마소는 황제와 곽태후의 조서를 받들고 26만의 대군으로 제갈탄의 본거지 수춘을 포위했다. 오에서도 손침이 제갈탄에게 응원군을 보냈다. 그러나 장기간 포위된 수춘성 내에서 제갈탄과 문흠의 의견대립으로 서로 죽이려는 음모 끝에 문흠이 살해되고 제갈탄은 부하에 의해 참수되면서 반란군은 무너지고 말았다.(AD258)  사마소는 최고직인 상국 및 진공으로 책봉되었다.

 

AD260년 18살이 된 위나라 황제 조모는 자신의 권위가 쇠퇴된 것에 격분하여 사마소를 토벌할 생각을 세웠다. 상서 왕경에게 그 뜻을 전하자 왕경이 말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 폐하께서 누구와 무슨 능력으로 하루아침에 이렇게 하신단 말씀입니까.

  고질병을 고치시려다가 더 깊게 할 뿐입니다.

  화란을 헤아릴 수가 없으니

  마땅히 자세히 살피셔야 합니다.“

 

조모는 곽태후에게 달려가서 이렇게 외쳤다.

 

“ 결심했습니다.

  이렇게 죽은 들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황제가 직접 칼을 뽑아 들고 나섰다. 그 소리를 들은 시중 왕침과 산기상시 왕업은 사마소에게 달려가서 알렸다. 가충은 심복 성제를 불러 그동안 기른 은혜는 오늘 이날을 위해서라고 말했다. 성제는 그 즉시 달려가서 조모 황제를 시해했다. 사마소에게 조모의 결행을 알린 왕침과 왕업은 무사했으나 알리지 않은 왕경은 주살되었다. 왕경이 죽기 전날 어머니에게 죄송하다고 말하자 왕경의 어머니가 이렇게 말했다.

 

“ 마땅히 죽을 곳을 얻지 못할까 두려웠는데

  이 옳은 일로 죽게 되었으니

  무슨 여한이 있겠느냐.“

 

사마소는 피살된 조모를 폐서인시켜 장례를 치렀으며 그 후임으로 조환을 황제로 옹립했다. 위나라 마지막 황제 원제다.(AD260) AD263년 위는 촉한을 공격하여 멸망시켰고 그 다음해 일어난 종회의 반란도 사마소가 진압하였다.

 

 

<4> 세자책봉 : 사마염이냐 사마유냐

 

사마소의 아내 왕씨는 사마염과 사마유를 낳았다. 사마염이 열 살이나 위인 맏형이었으나 사마유는 재능이 뛰어났고 온화하며 명성이 자자했다. 따라서 사마소는 틈틈이 이렇게 말하곤 했다.

 

“ 천하는 경왕 사마유의 천하다.

  나는 재상 자리를 차지할 뿐 

  백년 후의 대업(즉 건국)은 마땅히 사마유가 이룰 것이다.“

 

반면에 사마염은 매우 특이한 상을 지니고 있었다. 팔이 매우 길었고 머리카락이 땅에 닿을 정도로 길었다고 했다. 사마유와는 달리 사마염에게는 배수와 양수와 산도라는 조정 중신들의 지원이 있었다. 사마소가 사마유를 세자로 책봉하려고 할 때마다 이들은 나서서 반대했다. 장자를 폐출하는 것은 법도에 어긋나는 일(산도)이라고 했고 군주의 덕이 있는 사람은 사마염(가충)이라고 지지했다. 특히 하중과 배수는 총명하고 귀신같은 전략을 세우며 세상에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인망이 높고 또 하늘에서 내란 특별한 인상을 지닌 것을 보면 누구의 신하가 될 상은 아니라고 치켜세웠다. 사마소가 드디어 사마염을 세자로 책봉하기로 결정했다.(AD264년10월20일)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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