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청 시인의 문학 산책. <9> 문학적 사제(師弟)관계는 무엇이고, 어떻게 이뤄지는 것인가 -스승 박목월 선생과 그 문하생들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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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목월(朴木月, 1915~1978) 선생 묘소는 용인공원묘원에 있다. 귀향해 사는 내 집이 바로 용인 접경지역에 있으니 차로 20~30분이면 닿을 만한 거리이다. 일 년에 서너 번, 선생 묘소엘 들르곤 한다. 그냥 산책하듯, 달려가 둘러보곤 한다. 1978년 이승을 떠나 용인공원으로 처소를 옮기셨으니, 어느덧 만 37년 (이 글은 2015년에 작성되었다), 긴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지근거리에 계시는 선생을 느끼곤 한다. 삶이 곤곤하고 삶의 갈림길에서 번민하게 될 때, 시 쓰는 일이 안일로 기울려고 할 때 선생께 여쭙는다. “어찌해야 할까요? 선생님.” 이렇게 되뇌어 보는 것이다.
2015년은 선생의 탄생 100년이 되는 해이다. 그동안 선생의 출생연도가 1916년으로 알려져 왔고, 거의 모든 문단 관계 기록도 그렇게 통용되어 왔다. 그런데 선생의 출생 기록들을 세밀히 살피고, 선생의 장남 박동규(朴東奎) 서울대 명예교수와도 협의하여 선생의 출생연도를 1915년으로 확정하게 되었다. 내게는 목월 선생 조부(祖父)부터 기재된 선생 집안의 원적부(原籍簿) 복사본이 있다. 선생의 모교인 대구 계성학교에서 목월 선생 기념사업을 준비하면서 발부받은 호적관계 서류이다. 1914년(대정 3년) 8월 25일에 이 원적부가 작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되어 있다. 원적은 경상북도 경주시 건천읍 모량리 571번지. 조부는 박훈식(朴勳植), 이분의 장남 박준필(朴準弼)이 목월 선생의 부친이다. 박준필은 1912년(대정 원년) 1월 2일 김석천(金石川)과 혼인하였고, 1915년(대정 4년) 1월 6일 목월 선생이 출생한 것으로 등재되어 있다. 1916년(대정 5년) 12월 31일 박준필은 목월 선생을 박영종(朴泳鍾)이란 본명으로 호적 관계 서류에 출생신고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 외에도 선생의 공식 인사 기록들-한양대학교의 인사기록부, 선생의 주민등록 모두가 1915년생으로 되어 있다. 박동규 교수 역시 선친의 출생연도를 1915년이라고 밝히고 있다. 무엇보다도 용인에 자리한 선생 묘지의 묘비명을 쓴 김동리 선생도 박목월 선생의 출생연도를 1915년 1월 6일로 기재하고 있다. 잘 아시는 대로 목월 선생과 김동리 선생은 문청 시절을 경주에서 함께 보낸 막역지우이다.
이상이 선생의 출생연도를 1915년으로 바로잡고, 금년에 선생의 탄신 100주년 기념사업을 벌이기로 한 연유이다. 기왕의 기록들은 어찌할 수 없지만, 사후에 탄신 100주년 기념은 원(原) 출생연도에 맞추어 행하는 것이 옳다는 판단이고, 유족과 협의하여 선생의 출생연도를 1915년으로 바로잡기로 한 것이다.
큰 시인의 생애를 평가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남긴 문학적 업적이다. 그가 일생 동안 쓴 시가 얼마나 독창적인 자기만의 세계를 이뤄냈느냐, 그렇게 이뤄낸 세계는 얼마나 드높은 가치를 지니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그리고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생애를 통하여 한 나라의 시문학 발전에 얼마나 기여했는가 하는 점이다. 특히 한 시인이 생애 동안 그 문하에서 얼마나 유망한 시인들을 길러냈는가 하는 점은 매우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글에서 필자는 박목월 선생의 슬하에서 배출된 시인들의 면면들을 살펴보고, 제자 시인들을 길러내는 과정에서 베풀어지곤 했던 선생의 인간적인 면면들을 살펴볼 것이다.
몇 년 전 어느 잡지에서 한국문학사를 일관해 볼 때, 과대평가된 시인은 누구이며 과소평가된 분은 누구인가를 앙케이트 조사한 적이 있었다. 그때, 과소평가된 시인 중 박목월 선생이 들어 있었다.
(사진설명) 50대 중반 쯤의 박목월 선생
우리는 대단히 험난한 사회적 변혁의 시기를 거쳐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특히, 1980년대로부터 2000년대에 이르는 시기는 민주화의 거센 욕구가 분출된 때였고 민중 성향의 이념이 우리 사회를 휩쓴 시기이기도 하였다. 순수 서정시의 위상은 관심 밖으로 밀려나게 되었고, 어느새 ‘시’는 투쟁의 무기가 되어야 하는 것으로 인식되었으며(실제로 《시여 무기여》라는 제목의 시집도 있었다), 문학은 모름지기 현실 저항적이고 비판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어야 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박목월 선생의 시처럼 순수 서정을 노래한 개인 지향의 ‘민족시’는 비선호 목록으로 밀려나게 된 셈이었다.(‘민족시’와 ‘민족주의 시’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민족주의 시’가 한 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할 목적으로 쓴 이념 지향의 것인 데 반하여 ‘민족시’는 특정 민족의 사람이 그 민족의 고유 정서를 그 나라 언어로 아름답게 표현한 문학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980, 90년대 이 나라에서는 강한 목적성을 띤 ‘민족주의 시’를 주창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민족주의 시’만이 ‘민족시’라는 억지 주장들이 문학의 전면을 차지하는 듯 보이기도 했다. 이념적, 목적적인 시가 피치 못할 어느 시대 상황의 투사체로 대두하였다 할지라도 애초부터 그것이 한국시의 본령일 수는 없는 것이었다. 편향된 시각의 논자들이 전면에 나서게 되면서 박목월 선생같이 순수 서정시를 쓴 시인들의 입지가 좁은 곳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그러나 이제 이념시를 주창하면서 민중시의 선봉에 섰던 시인들도 거의 시의 본령으로 돌아섰으며(고은, 이시영, 김사인 같은 시인들의 요즘 시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순수 서정시에 대한 일방적 매도의 논지도 거의 잦아든 셈이다. 박목월 선생의 시 세계에 대한 새로운 평가와 성찰도 진행되고 있다.
박목월 선생의 시, 특히 《청록집》의 시와 《산도화》의 시편들은 형극의 시대를 사는 시인의 뜨거운 모국애를 담아낸 것이었다. (《청록집》의 시와 《산도화》의 일부는 해방 전 간난의 시기에 쓴 것들이다)
시는 실재하는 현실이 아니라 ‘있어야 할 현실’을 노래한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박목월 선생의 초기 시편들은 ‘형극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있어야 할 현실’을 노래함으로써 언젠가 도래해야 할 ‘창조된 질서의 세계’를 향한 희망의 전언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특히, 박목월 선생의 초기 시편들이 담고 있는 면면한 한국인의 정조와 아름다운 모국어가 일제 식민통치의 가장 그악스럽던 시기, 조선어 말살정책이 강제되던 엄혹한 시대에 쓰였다는 사실은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박목월 선생은 1959년, 한양대학교 교수로 초빙되어 타계할 때까지(1978. 3) 대학 강단에 봉직하면서 많은 문인을 길러 냈다. 그동안 선생은 왕성한 작품 활동을 벌였으며, 사회적으로도 저명인의 반열에 있었다. 예술원 회원, 한국시인협회 회장, 한국기독교 문인협회 회장, 효동교회 장로, 한양대학교 문리대학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서울시 문화상, 예술원상, 국민훈장 모란장, 명예문학박사 학위(한양대학교) 등을 받았다. 또한, 1973년 전문 시지 《심상》을 창간 운영하는 등 많은 업적을 이뤄냈다. 한국시의 ‘어른’의 자리에서 시의 바른길을 전력을 다해 견인하셨다.
(사진설명) 박목월 시비. 한양대학교 구내 목월 시동산. 좌로부터 김종해, 이건청, 오세영, 신달자
목월 문하의 시인들
박목월 선생은 시에 엄격하셨고 인간에 대해서는 다감하셨던 스승이셨다. 특히, 제자를 선택하시는 기준이 대단히 엄격하였다. 시적 재질과 인간적 품성을 통해 지속적으로 시에 헌신할 수 있는 자질인가를 선택의 기준으로 삼으셨던 것으로 생각한다. 우선 박목월 문하 시인들의 면면을 살펴보기로 한다. 선생의 영향하에 시의 길로 정진해 시단에 등단한 시인들의 면면을 기억나는 대로 소개해보면 다음과 같다.
이중, 허영자, 이승훈, 김종해, 박건한, 유안진, 오세영, 김제현, 이건청, 정민호, 김준식, (고)주성윤, 김영준, 권국명, 이창윤, (고)전재수, 유승우, 신달자, 조정권, 정호승, 윤석산, 나태주, 신규호, 유재영, 김성춘, (고)권명옥, 권택명, 김용범, 이준관, 한광구, 이명수, 조우성, 목철수, 한기팔, 권달웅, 황근식, 이상국, (고)김용직, 김명배, 추명희, 이명자, 서영수, 이근식, 윤강로, 서종택, 신승근, 신협, 이진호, 박상천, 이상호.
몇 분은 이미 고인이 되었고, 발표 지면에서 얼굴을 대하기 어려운 분들의 이름도 눈에 띈다. 그러나 박목월 선생의 문하 시인들의 면면은 알토란처럼 빛난다. 상당수 시인들이 선생의 슬하에서 시적 성숙의 과정을 거쳐 시단에 등단한 이후 용맹정진의 길을 달려, 2000년대 한국 시단을 견인해가는 자리에 우뚝 서 있다. 허영자, 김종해, 오세영, 이건청, 신달자 등은 한국에서 가장 오랜 전통과 권위를 인정받는 시인단체인 한국시인협회 회장으로 한국 시단 발전에 큰 족적을 남기고 있다. 신규호, 유승우 등은 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장의 중책을 성공적으로 이뤄냈다. 목월 문하의 시인 7명이 한국의 양대 시인단체의 수장으로 추대되어 한국시 발전에 기여하였고, 시업에 정진하여 높은 성취를 이룩한 것이다. 그리고 오세영, 유안진 등은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으로 선임되었다. 김종해, 박건한, 유재영, 이명수 등은 한국의 출판문화 창달에 신명을 다하고 있는 분들이다. 목철수, 조우성 등은 언론계에서 빛나는 활약을 보여준 시인들이다.
목월 문하의 시인들 중 상당수는 대학 강단에서 시학 교수로 후진 양성에 헌신해왔다. 이중, 허영자, 이승훈, 유안진, 오세영, 김제현, 권국명, 이건청, 유승우, 신달자, 신규호, 조정권, 윤석산, 권명옥, 김용범, 김명배, 신협, 한광구, 박상천, 이상호 등이 대학교수로, 시인으로 빛나는 업적들을 쌓은 분들이다. 김성춘, 추명희, 서종택, 한기팔 시인 등은 중등학교 관리 책임자로, 시인으로 빛나는 업적들을 남기고 있다.
박목월 선생과의 인연들
이중 시인은 박목월 선생이 문단에 등단시킨 첫 번째 제자이다. 이중 시인과 박목월 선생의 첫 만남은 당시 학생문예지로 명망을 얻고 있던 《학원》에서였다. 당시 《학원》은 매달 학생문예란을 게재하고 있었고 전국의 내로라하는 학생 문사들이 이 잡지의 문예란에 투고하고 있었다. 《학원》에서는 매달 투고 작품들 중 우수작품을 선정하고 심사위원의 심사평을 게재하였다. 그때 《학원》의 편집자 중에 이중 기자가 있었고, 심사위원으로 박목월 선생이 계셨다. 당시 문학적 열정에 불타던 이중 기자와 박목월 선생의 만남은 아주 운명적인 것이었다고 이중 시인은 회고하고 있다. 이중 시인의 〈유혹〉 〈후반〉 등의 작품이 《현대문학》에 추천되면서 박목월 문하 시인들의 맏형이 되었다. 이후 경남일보 사장, 한국조폐공사 사장, 연변과기대 부총장, 숭실대 총장 등 사회적 책무를 감당하게 되면서도 시집 간행 등을 통하여 시인으로서의 소명을 위해 노력하였다.
허영자 시인은 특이한 만남을 통해 박목월 문하의 시인으로 ‘발견’된 경우를 보여준다. 박목월 시인이 숙명여대에서 개최된 대학생 문학의 밤에 초청시인으로 참석하였고, 낭랑한 목소리로 자신의 시를 낭독한 어느 여대생의 시를 접하면서 ‘놀라운 환희’를 느끼게 된 것이었다. 박목월 선생은 이 여대생이 한국 시단의 큰 별로 입신할 재목임을 단박에 알아보았다.
다음에
죽은 다음에도
또 세상 있으믄
자비하신 석가세존
그 말씀대로
삼월(三月)에 제비 오는 세상 있으믄야
엄마야 오늘같이
바느질하는 엄마 옆에서
바늘에 긴 실 꿰어드리지
새아씻적 옛말은
인두에 묻어나고
어룽진 앞섶자락
섧디섧은 눈빛을
물려줄 테지
이 다음에
죽은 다음에도
이런 세상에
엄마는 울 엄마
나는 또 까망머리
엄마 딸 되리
눈밝애 되리야
귀밝애 되리야.
— 허영자 〈사모곡〉 부분
이 시가 1962년 《현대문학》에 추천, 발표되면서 허영자 시인은 당시 문청들에게 일약 화제의 대상이 되었다. 발표 지면이 《현대문학》 《자유문학》 《사상계》 세 곳밖에 없었던 그때, 매달 발표되는 시는 관심의 대상이었고, 문청들에겐 분석 비평의 대상이었다. 허영자 시인의 섬세함 속에 깃든 강한 통찰은 1960년대 새로운 서정의 개화를 알리는 신호였다.
이승훈 시인은 그가 한양대학에 입학하게 된 것이 박목월 선생이 그 대학에 계셨던 때문이었다고 회상한다. 그가 서점에서 처음 구입했던 시집이 박목월 시집 《산도화》였다는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학원》의 학생문예란을 통해 박목월 선생의 격려를 받게 되었고, 박목월 선생이 계신 한양대를 지망해서 입학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입학한 학과는 국문학과가 아닌 공과대학 섬유공학과였다. 시는 의학이나 공학을 공부하면서 틈틈이 쓰면 되리라고 생각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대학 2년을 마치고 박목월 선생이 계시던 국문과로 전과했다. 시가 공과대학 공부를 하면서 틈틈이 써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터득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공과대학을 다니면서 그가 쓴 시편들을 박목월 선생님께 보여드리곤 했는데 그중 두 편을 문예지 《현대문학》에 초회 추천해주셨다. 1962년 4월, 대학 2학년 때였다.
김종해 시인은 살아가는 일이 힘들고 적막할 때 목월 선생을 만나는 일 하나만으로도 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염증을 와해시킬 수 있었으며, 선생의 부드럽고 온후한 음성을 듣는 것만으로도 닫힌 자신의 자폐를 해소할 수 있었다고 술회한다. 선생께서 자신의 벌거벗은 모습을 보시고도 모두를 이해해주시고 쓰다듬어 주셨다고 말한다. 김종해 시인은 선생께 끼쳐드린 말썽 가운데 평생 잊히지 않는 일화 하나를 적어놓고 있다. 1971년 어느 날 저녁 박목월, 박남수, 정한모, 김종길, 김남조, 김광림 선생들과 자리를 함께한 식사 자리가 있었단다. 양주가 나왔고, 몇 잔을 연거푸 마시는 바람에 그만 정신을 놓아 버리고 말았다는 것. 이날 원로 시인들의 대화 중엔 시국 비판의 얘기도 섞여 있었는데 말없이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던 김종해 시인이 별안간 음식상을 꽝 치고 일어나 큰소리로 외쳤다고 했다. “목월 선생, 할 말 있소.” “남수 선생, 할 말 있소.” 그러니까 “와 그러노, 할 말 있으면 해봐라.” 박목월 선생께서 부드러운 소리로 말씀하셨지만 김 시인은 이미 정신을 놓아버리고 상 위에 엎어지고 말았다는 것. 이튿날 숙취도 덜 깬 채 원효로 목월 선생께 전화를 드려 어제 일을 사과하려 하니 목월 선생이 화들짝 웃으며 한마디 하셨단다. “그래, 닌 술을 고거밖에 못 마시나, 우째 그래 주량이 작노? 아하하하…….”
유안진 시인의 경우, 서울대 사범대학 교육학과에 다닐 때 백일장 제출 작품을 보고 가능성을 발견한 박목월 선생께서 ‘시작(詩作) 노트를 갖고 연구실로 한번 놀러 오라’는 엽서를 보내왔다고 한다. 유 시인은 이 엽서를 안고 밤새 눈시울을 적셨다고 한다. 며칠 후 그동안 써둔 시작 노트를 정리하여 한양대로 선생을 찾아갔다고 한다.
“안 계시기를 기도했어요. 너무 떨렸던 거지요. 연구실 앞에서 차마 노크도 못 하고 계속 서 있었답니다. 선생님께서 점심 드시러 나오시다가 저를 보고선 ‘따라오라’고 하시더군요. 옛 화신백화점 뒤에 있던 유명한 설렁탕집으로 따라가 마주 앉았지요. 둘 다 설렁탕을 시켜 먹는데 선생님께서 소금을 당신 그릇 옆에 놓고 저에게 주지 않으시는 거예요. 감히 ‘소금 좀 주세요.’라는 말이 나와야지요. 소금도 치지 않고 맨 설렁탕을 먹었지요.”
목월 선생은 이런 유 시인을 보면서 ‘저런 숙맥(菽麥)이니 시는 제대로 쓰겠다’며 유 시인의 자질을 평가했다고 한다. 유 시인은 목월 선생에 대해 “자상하면서도 엄한 분이셨다”며 그의 손을 거쳐 등단할 수 있었던 것을 행운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오세영 시인이 서울대학교 국문과 입시를 마치고 면접을 치르는 과정에서 면접 교수였던 이숭녕 교수로부터 “자네는 국문학을 전공해 무엇이 되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받고 “시인이 되고 싶습니다.”라고 답변해서 호통을 들었다고 한다. 서울대학교는 시 창작을 공부하는 곳이 아니라 모름지기 학문하는 곳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을 것이다. 오세영은 서울대 국문과 출신으로 그가 되고 싶었던 시인이 되었고 학문적 업적도 함께 쌓았으며, 그런 업적을 평가받아 후에 서울대학교의 시학 교수가 되었다. 시인으로서 높은 업적을 쌓았으며 학문적으로도 큰 업적을 쌓아 시창작과 학문의 양면을 성공적으로 끌어 올린 서울대학 출신의 유일한 시인이 된 것이다. 오세영 시인은 그가 이루고자 하는 일에 전력을 다 쏟아 붓는 사람이다.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의 자리에 있으면서 지칠 줄 모르는 시 창작의 열의는 70대 중반에 접어든 지금도 불타오르고 있다.
필자가 박목월 선생을 처음 뵌 것은 1959년으로, 1978년 3월 24일 선생께서 타계하실 때까지 20여 년을 늘 선생 곁에 있었다. 고등학생 시절 선생 댁을 찾아뵙고 ‘시인’이 되기로 작정한 이후, 고교 졸업 후 선생의 대학 강의실을 따라가 선생의 체온 속에서 시에 매달렸다. 그리고 시를 써들고 원효로 선생 댁을 수도 없이 드나들었다. 1973년 선생께서 월간 시지 《심상》을 창간하시면서 나는 그 잡지의 편집자가 되었다. 낮에는 학교 선생, 밤에는 잡지 편집에 매달리는 나날이었다. 국내 최고 권위의 시 전문 월간지를 만들어 낸다는 보람에 힘겨운 줄도 몰랐었다. 선생께서 타계하실 때까지 5년간 통금시간이 임박해서야 집에 겨우 닿곤 했었다. 지금도 뇌리를 떠나지 않는 선생의 당부 말씀이 있다. 나는 1959년 선생을 뵌 후 10여 년이 지나서야 시인의 길에 들어설 수 있었는데 그때, 선생께서 이런 말씀을 내게 주셨다. “이 군, 앞으로 자네가 시를 쓰다가 어느 단계에 이르면 반드시 내 시가 이쯤 되면 되었지 싶을 때가 올 것이다. 그때, 자네 시가 매너리즘에 빠지고 있다는 걸 알아라.” 아직도 등짝에 아픈 채찍으로 와 닿곤 해서 나를 깨우쳐주곤 하는 선생의 말씀이다.
신규호 시인과 유승우 시인은 목월 선생께서 홍익대학교에서 강의하실 때 뵌 인연으로 선생의 문하 시인이 된 경우이다. 홍익대 국문학과가 폐과되고 선생께서 한양대학교로 자리를 옮기시자 신규호는 동국대로 갔고, 유승우는 경희대를 거쳐 한양대 대학원에서 박목월 선생을 지도교수로 석·박사 과정을 거쳤다.
1967년 봄, 한양대학교에 학적 관계 서류를 떼러 갔던 필자는 인문대 계단을 내려오고 있는 유승우를 만나게 되었다. 마침 중학교 국어교사 적임자로 필자를 찾고 있던 그를 따라가 학교장을 만나고 당일로 국어교사 취임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유승우와 신규호는 단짝 친구였고 나보다 두어 살 연상의 이들과 친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유승우 시인과 함께 같은 교무실에 근무하게 되면서 바로 학교 앞에 신혼의 보금자리를 꾸민 그의 좁은 방에서 밤늦도록 시 얘기로 꽃을 피웠다. 좁은 셋방을 두 남자가 차지하고 앉아 시 얘기에 꽃을 피우니, 유승우의 아내는 밖에서 오랜 시간 기다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신규호 시인도 내가 사는 오류동 인근 유한공고에 취직이 되자 내 집 인근에 신혼의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등단 전 이들과 나눈 숱한 문학담이 시인으로 입신하는 거름이 되었으리라. 신규호는 성결대 부총장으로 현대시협 이사장으로 헌신하면서 시의 길에 깊이 들어서 있다. 유승우 역시 현대시협 이사장으로, 교회 장로로, 시인으로 성공적인 생애를 이뤄가고 있다.
신달자 시인은 결혼 초, 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고 한다. 그는 이때의 상황을 ‘정신병’ 수준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대학 시절의 화려한 꿈들이 사라지고 막막한 불안과 고통이 밀려왔다고 한다. 신달자 시인은 박목월 선생을 만나 다시 시에 매진하여 구원의 밝은 빛을 보게 되었다면서 이때의 정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어느 날 집에서 입은 옷 그대로 버스를 탔다. 종로에서 내려 무작정 걸었다. 그러다가 종로 2가에서 시인 박목월 선생님을 만났다. ‘신 군 아이가?’ 선생님은 대학 문학 활동 때 자주 뵙던 분이셨다. 3시에 주례가 있는데 30분 남았으니 커피나 한잔 하자고 하셨다. 종로 YMCA 커피숍에 들어서서 의자에 앉으시며 선생님이 물었다. ‘요즘도 글을 쓰나?’ 나는 그때 온몸에 전율 같은 것이 일었다. 그래. 내가 찾던 것이 바로 ‘글’이었구나. 내 차림으로나 표정으로 지금 내 삶이 고단하고 어지럽다고 판단하셨는지 선생님은 일요일마다 선생님 댁에서 시 공부를 하자고 하셨다. 내 인생의 등불이 활짝 켜지는 순간이었다. ‘다시 시 공부를 하다니. 그것도 박목월 선생님 댁에서…….’ 나는 새로운 활력으로 만년필을 잡았다. 가정도 아이도 새롭게 보였다. 다시 살아나는 비상의 날개를 얻은 기분이었다. 내가 시인의 길을 찾은 것은 그날 종로의 거리에서 선생님을 우연히 만난 행운 덕분이다. 나는 그날 하늘의 축복을 거리에서 만난 것이 분명했다.
조정권 시인이 박목월 선생의 문하 시인으로 자리 잡게 된 계기는 그가 재학 중이던 양정고등학교 문학의 밤이었다. 매년 그 자리에 참석해서 격려의 말씀을 주곤 하시던 박목월 선생께서 조정권의 시적 재질을 알아보신 것이었다. 조정권은 필자가 졸업한 고등학교의 후배이기도 해서 영등포 끝머리에 살던 나를 가끔 찾아오기도 했다. 이따금 고등학교 문학 친구들인 윤석산, 신현정과 동행하기도 했다. 깊은 통찰과 상상력, 언어 감각이 뛰어난 그는 시 창작자가 지녀야 할 강한 몰입과 엄격한 금도의 정신에 투철한 문청이었다. 박목월 선생께서 조정권의 인품과 시적 재질을 아끼셔서 늘 선생의 지근거리에 두고자 하셨고, 그는 그 슬하에서 시업에 정진하였다. 중앙대학교 영문학과를 다녔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가 한양대학교를 다닌 것으로 알았다. 조정권은 1970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하였다. 《현대시학》이 배출한 첫 번째 시인이었다. 그는 음악과 미술 분야에도 해박한 안목을 길러 그 방면의 비평에도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조정권은 그 나름의 개성을 이뤄낸 시인이다. 시인이 자기 개성을 이룬다는 게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가.
(사진설명) 이건청 시인 첫 시집 [이건청 시집] 출판 기념회에 문하생들과 자리를 함께 하셨다.(1970. 5)(좌로부터) 유승우, 김용직, 오세영, 이승훈, 권달웅, 목월 선생, 이건청, 신규호, 조정권..
나태주 시인은 시인과 시인 사이에도 혈연관계가 맺어질 수 있다며, 박목월 선생이 아버지쯤의 혈연으로 이어져 있다고 말한다. 나태주 시인은 1960년 사범학교 1학년 때 목월 선생의 《보랏빛 소묘》를 접하면서 시로 가는 자상한 길을 안내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나 시인은 초등학교 교사로, 교장으로 평생을 어린아이들 속에서 지내면서도 평이한 언어 속에 깊은 감동과 깨우침을 담아내는 시편들을 써서 일가를 이룬 시인이다. 선후배 시인들을 잇는 따뜻한 인정을 소중히 지켜가면서 고향을 지키고 있다. 고도(古都) 공주 토박이의 안목으로 공주의 문화를 지켜가는 문화원장의 중책을 맡고 있으면서, 광휘 어린 시편들을 써내고 있다.
윤석산, 권달웅, 조우성, 고 김용직 등으로 이어진 박목월 문하 시인들은 한양대학교 국문학과를 태반으로 재능을 드러낸 시인들이었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들 시인이 한양대학교에서 박목월 선생에 의해 길러진 순혈 시인들이라 할 것이다. 한양대학교에 국문학과가 생긴 것은 1959년이었지만 1961년 12월 정부의 강제적 지시로 과 자체가 폐과되었고, 1962년 12월에 다시 복과가 되는 격변을 겪었다. 학과가 다시 길을 트고 강의를 시작한 1963년 3월, 이승훈이 한양공대 섬유공학과에서 전과해오고 필자, 권명옥 등이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를 마치고 편입되어 오면서 한양 시단의 맹아가 싹트기 시작했다. 이후, 정상적인 입시를 거쳐 한양대 국문학과에 입학해온 재원들이 목월 선생 문하에서 시업을 갈고 닦으면서 1968년 동인시지 《해일문학》을 펴내게 되었다. 드디어 자생적으로 문학적 생명이 끓어오르는 문청들이 모여 시에 정진할 터전이 마련된 것이었다.
윤석산 시인은 고등학교 3학년 때인 196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동시 부문에 당선하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었다. 이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으로 시적 재질을 확인받았으며 이후 드높은 상상력과 감수성의 역편들을 발표하면서 시단의 기린아로 우뚝 자리를 잡았다.
권달웅 시인은 봉화 출신으로, 아버지가 소 판 돈으로 등록금을 마련해주어 학교에 등록할 수 있었단다. 방학이 되어 시골에 내려가 있는 동안 그는 목월 선생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는데 편지에는 꼭 읽어야 할 독서 목록들이 적혀 있었다. 권달웅은 그 방학 동안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많은 책을 읽었다고 술회한다. 그리고 학기가 시작되면 매주 5편씩의 시를 써가지고 오라는 말씀도 적혀 있었다. 학기가 시작된 어느 날, 교정에서 권달웅을 본 선생의 말씀이 평생 가슴에 남아 있다고 한다. “니 시 와 안 써 오노? 시는 아주 버려뿌렸나. 얼굴이 이게 뭐꼬. 자취한다고 그랬제? 빠다 있잖나? 그걸 밥에 비벼 먹거라. 꼭 시 써온네이. 손이 와 이리 차노? 이거 연구실 키다. 손 좀 녹이고 가거라.”
조우성 시인의 회고담. 목월 선생의 자신에 대한 기대가 남달랐던 듯해, 그는 모 신문사의 신춘문예에 작품을 보내면서 내심 어느 정도 기대를 했다고 했다. 그러나 끝내 당선 통지는 오지 않았고, 정월 초하루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있는데 전화기가 울렸단다. “나 목월이다. 지금 동인천 다방에 있는데 나온나.” 놀랍게도 목월 선생께서 인천까지 오셔서 제자를 찾았던 것. “이눔아 네 작품 봤다. 남수 씨가 너를 밀자는 걸 내가 말렸다. 너는 내 밑에 안 있나? 아직 나이도 어리고…… 알겠제?” 낙심하고 있을 제자를 찾아와 격려와 용기를 북돋워 준 것이었다. 더 큰 시인으로 우뚝하게 서라고.
김성춘 시인은 박목월 선생께서 창간한 월간 시지 《심상》이 첫 번째 신인으로 선정한 시인이다. 《심상》은 박목월 선생께서 필생의 사업으로 창간한 월간 시지였다. 《심상》 창간호가 간행되어 나오면서 여러 면에서 화제만발이었다. 특히 《심상》에서 추진한 신인발굴제도가 그랬는데, 단 1회 작품 발표로 등단이 되고, 등단 신인의 작품 활동을 적극 지원한다는 모집 요강이 시단 진출을 꿈꾸는 문청들에게 매력으로 다가왔다. 신인작품의 선고 위원이 박목월, 박남수, 김종길 같은 우리나라 최고 권위의 면면들이었다. 신인작품 모집 요강이 발표되면서 수많은 응모작이 발표되었는데 그 첫 번째 당선자가 김성춘 시인이었다. 잡지 실무를 맡고 있던 내가 당사자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했다. 당선자는 울산의 어느 고등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는 교사였는데, 후에 교장의 직책에서 정년을 맞았다. 김성춘의 등단작품은 일약 화제작으로 떠올랐고, 그는 늘 주목받는 자리에서 정진하여 한국시의 복판에 우뚝 섰다.
김용범 시인은 한양대학교 2학년 학생으로 《심상》을 통해 등단하였다. 1974년의 어느 날, 박목월 선생께서 한양대에서 간행되는 대학신문 한 부를 들고 오셔서 내게 읽어보라고 하셨다. 제목이 ‘오후 세시에 멈춘 시계’(?)였을 것이다. 한양대에서 간행되는〈한양대학보〉에서 매년 문예작품 현상모집을 하고 있었는데, 작품 심사를 맡으신 선생께서 놀라운 작품 한 편을 발견하셨던 것이었다. 감각이 참신하고, 상상력의 비약과 단절이 놀라운 광휘를 토해내고 있었다.
권택명 시인은 은행원이었다. 매사 분명한 일 처리는 물론 그의 시 역시 명징한 이미지를 추구하는 그만의 어조를 이룩해낸 시인이었다. 외환은행 지점장, 한국외환은행 동경 지점장 등을 역임하였다. 권택명 시인은 일본어 구사를 능숙하게 하는 시인이었다. 한국시의 일어 번역은 물론, 일본 현대시의 한국어 번역 등을 통해 한일 문학 교류에 큰 업적을 남겼다.
한광구 시인은 박목월 선생의 연세대 강의를 수강하면서 능력을 인정받게 된 시인이다. 대학 졸업 후 취업이 어렵던 때, 선생이 유한양행 출판부 직원으로 추천, 직장 주선을 해주시기도 하였다. 알레고리 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기도 한 한광구 시인은 현실의 내면을 통찰해낸 깊은 인식 담아낸 시편들로 개성의 세계를 개척해 보여주었다.
이준관 시인은 고등학교에 다니다가 학업을 쉬고 있던 절망의 시기에 박목월 선생의 시 〈임〉을 접하고 나서 펑펑 운 적이 있었다고 한다. 가난과 병환 중인 아버지, 불쌍한 동생들로 자신에 대한 열패감에 사로잡혀 있을 때 “냇사 애달픈 꿈꾸는 사람/ ……/ 어느 날에사/ 어둡고 아득한 바위에/ 절로 임과 하늘이 비치리오”라는 선생의 시를 접하면서 시가 구원의 길임을 깨달았단다. 1974년 《심상》에 작품이 발표되고, 목월 선생께 격려를 받게 되면서 자신만의 시 세계를 찾아 나섰다. 이준관은 동시에도 일가를 이룬 시인이다. 성인시의 시적 긴장과 에스프리를 동시에 접목시킴으로써 한국 동시의 수준을 한껏 드높인 시인으로 우뚝 서 있다.
한기팔 시인은 제주 서귀포에 사는 제주 토박이이다. 서라벌 예대 재학 중 박목월 선생과 인연이 닿았다고 한다. 그런데 한기팔 시인은 문예창작과가 아니라 미술학과 재학생이었다. 시가 좋아 박목월 선생께 종종 시편들을 보여드리고 했던 것. 한기팔 학생은 대학 졸업 후 향리에 내려가 중학교 미술 교사로 봉직하였다. 제주 서귀포의 풍광 속에서 시심이 솟구쳐 올랐고, 작품들을 박목월 선생께 보내드리곤 했다고 한다. 이따금 선생께서 제주에 강연 등을 핑계로 내려오시면 한기팔을 불러내어 낚시를 즐기기도 하셨단다. 한기팔의 시는 명징하다. 그리고 짙은 밀도의 시어들이 견고한 구조를 이뤄낸다.
이명수 시인은 박목월 선생 작고 후 《심상》의 명맥을 잇는 일에 20여 년을 바친 시인이다. 필자가 1973년 10월 《심상》 창간호 간행에 관여하기 시작해서 박목월 선생께서 1978년 3월 24일 타계하실 때까지, 그리고 5월호 《심상》 전권추모 특집 〈박목월 선생〉을 펴내고 나서 《심상》을 떠났다. 그 후 박동규 교수를 도와 《심상》을 이끌어 온 사람이 이명수 시인이었다. 현재 그는 계간지 《시로 여는 세상》을 주재해서 펴내고 있다. 어렵고 힘든 일을 계속 해내고 있는 것이다.
신감각 동인
동인지 《신감각》 제1호가 간행된 것은 1975년이었다. 《심상》을 통해 역량 있는 신인들이 발굴되어 나오고 작품발표가 활발해지면서 이들을 중심으로 한 시운동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었다. 동인지 《신감각》에는 박목월 선생의 커다란 바람이 담겨 있었다. 한국 시사에서 1970년대는 현실지향, 이념지향의 시들이 거센 소용돌이를 이루고 있을 때였다. 1960년 4·19를 기점으로 한국시는 시의 정통을 따라 민족시의 근간을 지켜 가려는 서정 계열 시인들과, 시의 대사회적 책무를 따르는 이념지향 시인들로 부류가 나뉘고 있었다.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이런 상호 대척적인 시편들이 한국 시단에 뒤섞일 때였다.
《신감각》은 새로운 감각을 시의 지향으로 한 시인들의 모임으로 민족시의 정통을 잇고, 계발하는 큰 소임을 감당한 동인지였다. 일찍이 박목월 자신이 민족 고유 정서와 시어로서 모국어의 감각에서 시를 찾았듯이 자신의 시 세계를 이어갈 시인들의 집합에 거는 기대는 퍽 크고도 너른 것이었다. 선생이 《신감각》에 거는 기대가 그만큼 큰 것이었다고 할 수도 있었다. 《신감각》 동인들을 아끼고, 될 수 있는 대로 자리를 함께하는 기회를 자주 가지려 하였다. 동인지 《신감각》의 제호도 박목월 선생의 글씨였다.
윤석산, 조정권, 권달웅, 조우성, 이명수, 한광구, 김용범 등을 초기 동인으로 시작된 《신감각》에 김선굉, 이상국, 한기팔, 이준관, 황근식, 서종택, 박상천, 이상호, 이진호, 김성춘 등이 참가하면서 40여 명을 포괄하는 커다란 동인 운동으로 저변을 넓혀갔다.
고인이 된 문하 시인들
권명옥 시인은 세속에 물든 시를, 시인을 혐오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시에는 너무나도 엄격한 시인이었다. 그는 평생 쓴 시편 중에서 43편의 시를 골라 시집 《남향》 한 권만을 세상에 남겼다. “쓰레기로 범람하는 시집 홍수 속에 시집 한 권을 더하는 것은 송구스런 일”이라 하였다. 지독한 독서광, 지독한 금도의 시인이었다. 그는 김종삼 시인을 마음속 지향점으로 살아온 사람이다. 그가 김종삼의 시 47편을 새로 발굴하여 엮어낸 《김종삼 전집》은 김종삼 연구를 위한 완결 텍스트라 할 만하다. 문교부 편수국 편수사, 한국시인협회 심의위원, 세명대학교 교수로 한 생애를 살았다. 2013년 3월 타계.
주성윤 시인은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였다. 내성적인 성격이어서 교분이 두텁질 못한 편이었다. 자취 생활을 하면서 시 쓰는 일에 모두를 걸고 있었다. 그가 선생 댁을 찾아오면 사모님 유익순 여사는 옷가지며 반찬 등을 주어 보냈다. “주성윤이 시인으로 등단하면 사는 일이나마 좀 나아지지 않을까?” 선생님의 생각이었다고 사모님이 말씀하시는 걸 들은 적이 있다. 주성윤은 관념시로 자기 세계를 이뤄낸 시인이었다. 주성윤의 타계 소식은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 시인들 입을 통해 알려졌다. 그의 은둔은 그렇게 깊고 적막한 것이었나 보다.
전재수 시인은 무한 욕구의 시인이었다. 경북대학교에서 김춘수 선생 문하에서 시작 수업을 했지만, 김춘수 선생이 목월 선생께 의뢰하여 목월 선생 추천으로 등단하였다.(권국명, 이창윤 등도 같은 경우였다.) 그러나 그는 특유의 친화력으로 목월 문하 시인들과 소통의 길을 넓혔고, 곧장 두터운 친교를 맺었다. 1980년을 전후한 시기, 시에 몰두하면서 고등학교 진학담당 교사로 이름을 날렸으며, 대학원에 등록, 논문 쓰는 일에 매달렸다. 1986년 그는 그가 사는 아파트 입구에서 쓰러졌다. 과로사였다. 향년 46세의 아까운 나이였다.
글을 맺으며
박목월 선생께서 이승을 떠나신 지 37년이 되었다. 그리고 올해 박목월 선생 탄신 100년 기념축제를 준비하고 있다. 선생께서 타계하셨을 때 30대였던 필자도 어느새 70대 중반에 접어들고 있다. 훌륭한 스승 밑에서 시를 익히고 시인으로 입신하게 된 것은 문하생 모두가 공통으로 느끼는 홍복이 아닐 수 없다.
(사진설명) 박목월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식(2015.3. 24. 문학의 집. 서울). 목월 선생 문하의 시인들이 '박목월 선생 100주년 기념 후 대형 휘장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선생의 문하생 들은 한국시를 견인해가는 역할을 하고 있다.
선생의 하늘은 너무나 넓고, 선생의 바다 역시 너무나 넓고 깊다. 선생께서 한국 사람들에게 남겨주신 감동의 폭과 깊이를 어찌 글로 다 적을 수 있으랴. 하물며, 선생께 직접 선택을 받은 문하 시인들이 가슴속에 쌓아 둔 공교로움이야 어찌 필설로 적어낼 수 있으랴. 분명한 것은 선생께서 남기고 가신 작품들을 통해 만나 뵙는 선생의 생각과 느낌들이 늘 그렇듯이 푸르청청한 생명으로 영원하리라는 것이고, 문하의 시인들 역시 선생이 일러주신 드높은 정신적 훈육 속에서 시의 길에 정진할 것이란 점이다.
(유심, 20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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