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아프간 철군과 동맹정책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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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세종연구소가 발간하는 [정세와 정책 2021-10월호-제35호](2021.10.5.)에 실린 것으로 연구소의 동의를 얻어 게재합니다. <편집자> |
아프가니스탄 철군 이후 미국의 대외전략과 향후 국제정세 전망에 대한 전문가들의 다양한 평가와 전망이 제기되고 있다. 미국은 베트남에서처럼 아프간에서 굴욕적인 패배를 감수하고 물러난 것인가? 그렇다면 향후 국제정세에서 바이든이 공언한 미국의 글로벌 리더십은 회복은 가능할 것인가? 아프간 철군은 미국의 동맹정책이 변화하고 있음을 시사 하는가?
혼란의 아프간 철군 과정
1979년 소련의 침공 이후 전쟁과 내전, 그리고 다시 전쟁이라는 비극의 무대가 되어 온 아프가니스탄은 2021년 8월 미국이 철군을 단행하면서 ‘42년 전쟁’ 시대의 막을 내리게 됐다. 아프가니스탄은 남서쪽 영토의 3분의 1 정도가 사막 지역이고, 나머지는 북동부 험준한 고산으로 이루어진 불모지에 가까운 곳이다. 산악지형은 해발고도 3천~6천 미터의 산들이 힌두쿠시산맥의 본류와 지류를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지형으로 인해 전통적으로 카불의 중앙권력이 지방을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이 창출되었고, 외세가 침입해 와도 산악의 저항군을 진압하지 못해 줄줄이 패퇴하는 통제불능의 나라라는 신화가 만들어졌다.
1979년 아프간을 침공한 소련은 1989년까지 무자헤딘을 상대로 치열한 전쟁을 치렀지만 결국 막대한 전비만 쏟아부은 채 물러났다. 그 후 2001년 9.11 테러가 발생하면서 미국은 테러 근거지를 발본색원한다는 명분으로 아프간을 침공해 친미정권을 수립했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한 이후 이 지역에서 주력한 정책은 ‘연합정부’의 구축, 탈레반을 비롯한 반군세력의 진압, 카불 정권의 지방행정 능력 강화, 아프가니스탄 군의 양성 등이었지만, 이러한 정책목표들은 아프간의 부패문화와 네포티즘, 탈레반 그림자 정부의 엄존, 전통적인 강력한 지방 토호와 군벌 세력의 존재 등으로 사실상 성공하지 못했다. 점령 미군의 목표가 탈레반 소탕과 알카에다 축출에서 국가건설(nation-building)로 바뀌면서 미국은 군사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지역에서, 네포티즘의 국가를 서구적 기준의 정치윤리가 확립된 민주국가로 재건하려고 했다.주 1)
이러한 목표가 사실상 불가능한 것임을 인지한 미국은 마침내 철군을 추진하기에 이른다. 미국은 2018년 하반기부터 탈레반과 접촉해 평화합의를 모색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아프간 전쟁을 ‘끝없는 전쟁’이라고 비판하면서 철군을 공약했고 이를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그 성과가 2020년 2월 29일 미국과 탈레반 사이에 성사된 ‘도하 합의’이다.
양측이 서명한 도하 합의에 따르면 탈레반은 아프간에서 극단주의 무장조직이 미국과 동맹국을 공격하는 활동 무대가 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미국은 그 대가로 아프간에 파병된 미군과 NATO의 국제동맹군을 14개월 안에 모두 철군하기로 했다. 이러한 합의에 따라 미국은 2021년 5월부터 아프가니스탄 철수를 시작했다. 미국은 지난 20년 동안 거의 2조 달러(2천조원) 가까운 예산을 투입하고 2천명 이상의 전사자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이슬람 테러세력 척결과 아프간 국가재건이라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물러나게 된 것이다. 이로써 아프간은 ‘제국의 무덤(graveyard of empires)’라는 명성을 재확인하게 됐다. 미군이 사실상 철수를 시작한 2021년 8월 탈레반은 본격적인 군사작전을 시작했고, 보름도 채 지나지 않은 8월 15일 카불을 접수하는 데 성공했다.
미국의 아프간 철군 과정은 몇 가지 전략적 오판에 의한 잘못된 결정이라는 비판이 제기된다. 무엇보다도 철군 과정의 우발적 혼란을 고려하지 않은 채 성급한 철군 일정을 밀어부친 점이다. 바이든 행정부는 9.11 테러 20주년에 맞춰 무리한 철수 일정을 강행했다. 더구나 철군 과정이 진행되는 와중에 발생한 카불 공항 자살테러는 혼란스런 이미지를 더욱 부각시켰다. 이슬람국가 호라산(IS-K)이 주도한 자살 폭탄 테러로 미군 13명이 사망하고 민간인 170여명이 숨졌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심각한 근본적인 문제점은 탈레반과의 도하 합의 과정에서 카불정부가 철저히 배제된 채 사실상 미국 철수 이후 카불정부가 정치적 세력으로 자리매김할 여지를 없애버렸다는 점이다. 카불정부에 통보도 없이 전격 이뤄진 철군은 아프간 정부 입장에서는 일종의 배신과 기만으로까지 해석될 여지가 적지 않다. 미군 철수와 함께 미군 하청 군수업자들이 동시에 철수하고 공군력 지원과 병참 및 군수지원이 중단되면서 아프간 전역에 배치된 아프간 정규군의 고립과 이탈, 그리고 무력화는 급격히 심화되었다. 그 결과는 허망할 정도로 신속한 아프간 국가의 붕괴였다.
바이든 행정부의 외교정책 환경과 동맹정책
미국의 아프간 철군은 과연 그것이 동맹정책의 근본적 변화를 뜻하는 것인가 하는 논란을 제기한다. 논란의 핵심은 아무리 동맹국이라고 해도 미국의 이익에 되지 않거나 동맹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미국으로부터 가차없이 버림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한 쪽에서는 한미동맹을 더욱 강화해서 미국이 원하는 방향으로 동맹의 역할을 재규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른 쪽에서는 결국 믿을 것은 우리의 자강 의지와 역량뿐이므로 전작권을 신속히 전환해서 우리의 자주적 국방태세를 확립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프간 철군 이후 미국의 신뢰성에 대한 주요 동맹들의 우려가 터져나오자 바이든은 대만과 한국, 유럽은 아프간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며 미국 동맹 네트워크의 동요를 막기 위해 부심했다. 하지만 유럽에서는 아프간 철군 이전부터 이미 독자적인 유럽군 창설 목소리도 나오기 시작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아프간에서 철군한 주된 이유가 중국, 러시아 등 경쟁자들과의 관계에 집중하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하지만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미국 국내문제가 더 급선무이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허리케인 아이다 후속 조치 미흡, 텍사스주 낙태법 대응, 예상보다 더딘 경기회복, 트럼프 진영의 공세 등 바이든에게는 다양한 악재들이 중층적으로 밀려오고 있다. 특히 날로 악화되는 코로나19 상황이 좋지 않다. 델타 변이 확산 이후 중증 환자가 늘면서 미국의 코로나19 확산세는 백신이 없던 1년 전보다도 오히려 더 심각하다.
미국의 동맹정책이 변한 것인지 판단하기 위해서는 우선 바이든 행정부가 처한 외교정책 환경과 우선순위를 간략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바이든 행정부의 대외정책 환경과 새로운 국제질서를 규정하는 특징으로는 COVID-19 팬데믹, 국제체제의 분절화(systemic fragmentation), 세계경제 침체, 미중관계 악화 등을 꼽을 수 있다. 국제체제 분절화의 원인은 글로벌 리더십의 부재가 큰 원인이다. 근간 국제질서에서 민주주의를 비롯한 각종 국제 레짐과 제도의 퇴조, 거버넌스의 약화는 미중 패권경쟁의 일부로서 전개되는 강대국 정치, 지정학의 복귀에 따른 ‘G-zero’ 시대, 심지어 궐위(interregnum)의 시대로 불리는 현 국제질서의 특징이다. 이러한 국제정세 혼란상에 비해 바이든 행정부의 정책 대응은 대체로 국내적 상황 개선에 중점을 두고 있다. 바이든 정부가 현재 가장 큰 관심을 가진 것들은 COVID-19 대응, 경제회복, 기후변화, 인프라 재건 등 대부분이 국내 문제들이다. 외교정책에서 트럼프의 뒤를 이은 중국 때리기 외에는 이렇다 할 특징이 아직 보이지 않는다.
바이든 대통령은 ‘미국이 돌아왔다(American is back)’고 선언했지만 미국의 글로벌 리더십 회복 징후는 보이지 않는다. 글로벌 리더십은 패권국(hegemon)의 일정한 자기 희생을 요구한다. 국제관계에서 리더십은 간단히 말하자면 글로벌 공공재(public goods)를 제공하려는 의지와 역량에서 발생한다. 패권국의 자기 희생에 따른 국제체제 내 성원들의 정당성 부여와 자발적 존중, 그러한 정당성에 입각한 규칙제정(rule-setting) 역량과 의지가 있어야 가능하다. 국내 문제에 함몰된 바이든 행정부가 과연 글로벌 리더십을 회복할 수 있을까?
야반도주하듯 이뤄진 미군의 아프간 철군은 상징적으로 미국 리더십 약화, 신뢰의 실추를 보여주는 사례다. 미국의 국익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전쟁에 막대한 전비를 더 이상 쏟아붇고 싶지 않은 바이든 행정부가 아프간 철군을 단행한 것을 비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철군을 하더라도 상황을 주시하며 현명하게 해야 할 것을 바이든 행정부는 간과했다. 철군 이후 바이든 행정부에 대한 비난이 커지는 것은 철군 결정 자체가 아니라 철군 과정 관리가 잘못됐기 때문이다. 아프간 철군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가 높다가 철군 이후 지지도가 크게 하락한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미국 여론조사 사이트 ‘FiveThirtyEight’의 가장 최근 조사에 의하면 바이든 업무수행 지지는 45.2%, 반대는 49%에 달한다. 이제 취임 반 년이 조금 지난 바이든 행정부로서는 전도가 순탄치 못할 것이고, 특히 외교 분야에서 시련이 예상되는 대목이다.
바이든 독트린(Biden Doctrine)의 본질은 끝없는 공세적 전쟁과 국가건설 시도를 중단하는 대신 신흥 권위주의 국가들에 대항해 동맹을 규합하는 외교로 귀착되고 있다. 바이든 행정부는 중국을 실존적 위협으로, 러시아는 교란자(disruptor)로, 이란과 북한은 핵확산자로 규정하는 한편 사이버 위협의 지속적 증가와 아프간 너머로의 테러 확산 가능성을 주목한다. 하지만 아프간에서의 혼란스런 종전은 인권을 보호하고 민주주의를 확산시킨다는 바이든 외교정책의 핵심이 미국의 목표와 부합할 때에만 유의미하다는 점을 확인시켜 주었다.
한국에 대한 시사점
산적한 국내 문제로 인해 당분간 미국의 글로벌 리더십 부재 상황은 지속될 전망이다. 아프간 철수작전이 종료된 후 바이든 대통령은 대국민 연설을 통해 이 결정이 옳은 결정이며 미국을 위해 현명한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평가했다. 바이든의 연설에도 불구하고 아프간 철군으로 바이든 외교의 두 축인 가치·규범 외교와 동맹·네트워크 다자협력은 타격이 불가피하게 됐다. 아프간 철군으로 대중국 견제에 좀 더 확고하게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됐지만 미국 외교의 대외적 신뢰성 추락은 피할 수 없게 됐다. 단기적으로 바이든 행정부의 외교안보 환경은 녹녹치 않아 보인다. 금년 10월 G-20 정상회의에서 바이든-시진핑 정상회담 성사 여부에 관심이 쏠리지만 미중관계에서 획기적인 개선 가능성은 크지 않다. 중국으로서는 내년 2월 베이징 동계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미중관계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한편, 북한이 한반도 문제로 소란을 피우기를 원치 않을 것이다. 더욱 중요한 이벤트는 내년 10월로 예정된 중국 제20차 당대회이다. 당대회에서 시진핑 주석이 3연임에 성공할지 여부와 새로운 리더십 구성이 주요 관전 포인트가 될 것이다. 그리고 11월에는 미국 중간선거가 열리는 바, 현재로서는 민주당의 고전이 예상된다.
안팎으로 외교적 어려움에 처한 바이든 행정부에게는 동맹국들의 신뢰를 되찾는 것이 커다란 도전이 될 것이다. 바이든은 아프간인들이 당면한 인도적 위기와 대규모 난민 발생을 우려하는 유럽 지도자들과 충분한 상의 없이 아프간 철군을 결정해 버렸다. 아시아와 유럽에서도 동맹국 미국을 믿을 수 있느냐 하는 불만이 터져 나온다. 바이든 행정부가 아프간 철군을 무의미한 해외 군사활동을 중단하고 미국과 동맹국들에게 더 중요한 미래의 도전에 집중할 수 있는 계기로 반전시키기 위해서는 여전히 동맹 및 우방국들과의 협력이 필수적이다.
아프간 철군이 한국에게 주는 교훈도 분명하다. 한국은 아프가니스탄과 다르다. 미국의 아프간 철수를 주한미군의 철수와 연관지어 보는 것은 가능성도 없고 너무 자기비하적 평가다. 아프간 사태가 주는 명백한 교훈은 우리의 안보는 우리 스스로가 지켜야 한다는 점이다. 한미동맹에 앞서 우리가 먼저 자강의 의지와 역량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미국의 리더십이 흔들리는 가운데 우리부터 그런 의지가 없으면 한미동맹이 앞으로 60년을 더 간다해도 한국을 결코 지켜주지 못한다. 베트남 패망의 역사가 그랬고 아프간 철군이 주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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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이웅현, 「아프가니스탄 현황과 전망」, 세종연구소 세종정책브리프, No. 2021-16 (2021.9.2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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